<김범진의 문화 그리고 이러쿵 저러쿵> 드라마 ‘기황후’와 영화 ‘노아’에 대하여



영화란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사실을 기반으로 한 ‘팩션’ 그리고 완벽한 가상의 스토리를 그린 ‘픽션’이다. 하지만 굳이 하나를 더 끼워 넣자면 ‘씽킹(thinking) 팩션’이 있다. 물론 마지막 ‘씽킹 팩션’은 필자가 이 글을 쓰면서 만들어내 본 새로운 용어다. 생각이 가미된 사실극이란 의미다. 사실을 뜻하는 ‘팩트’와 가상의 다른 말인 ‘생각’을 결합해 만들어본 것이다. 최근 들어 사실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들이 쏟아지고 여러 뒷말을 남기는 과정에서 필자가 하나의 어떤 현상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에서 조합해본 말이다. 뭐 그 의미가 어떻든 간에 말이다.

드라마 ‘기황후’가 제작된다는 말에 방송가에선 여러 뒷말이 무성했다. 현 정권의 어떤 분(?)을 빗대 ‘아부’라고 표현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필자와의 술자리에서였지만 충분히 그럴듯한 의견이었다. 해당 방송사의 상황을 보면 말이다.
다른 한 편으론 ‘소재주의’를 지탄하는 목소리가 컸다. 다시 말해 소재만 좋다면 그 소재의 좋고 그름은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그 안에서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얘기를 찾아내자는 것이다. 이것 역시 해당 드라마와 아주 약간의 연관이 있던 한 관계자를 통해 필자가 실제로 들은 얘기다.



<드라마 `기황후`=자료제공 MBC>


그럼 기황후가 누군가. 고려 말,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간 뒤 우여곡절 끝에 원나라 제1황후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입지전적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그런데 그 후가 문제다. 전 세계 어느 나라든지 말기 시대는 폐망의 징조가 다분하다. 당시 고려는 기황후의 권세를 등에 업은 기씨 일족이 나라의 판세를 좌지우지했다. 기황후가 고려를 핍박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제작진은 전자에만 집중한 채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글로벌 여성으로 기황후를 조명하겠다고 했다. 즉각 온라인은 난리가 났다. 한 네티즌의 말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기황후가 글로벌 여성의 시초라면, 이완용은 발달한 일본의 문물을 우리나라에 받아들이는 데 앞장선 글로벌 애국주의자의 시초인가?”

생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사람 각자의 기준 점은 달라진다. 이런 논란에 ‘기황후’에 출연하는 배우 주진모는 “드라마와 다큐를 구분하지도 못하느냐”는 입장을 다시 밝힌 바 있다. 배우란 직업적 특성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하지만 그가 극중 맡은 ‘왕유’란 캐릭터는 역사를 조금만 알고 있다면 고려 말 폭군 중 폭군 충혜왕을 떠올릴 법하다. “이건 드라마다. 그러기 때문에 기황후나 왕유나 모두 가상이란 ‘씽킹’이 들어간 내용이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명성황후’를 이미연, 주몽을 송일국이라고 말하는 지금의 초등학생들. 6.25를 육쩜 이오라고 말하는 고교생들이 버젓이 지상파 9시 뉴스에 등장하고 있는 시점에서 과연 드라마의 팩션 또는 픽션이 정말 ‘드라마와 다큐’를 구분하지 못하는 대중들의 ‘무지몽매’함으로만 치부하기엔 너무하단 생각을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들어 비슷한 영화 한 편이 또 다시 개봉돼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그것도 대중문화에선 결코 손을 대면 안 되는, 아니 어떤 식으로든 손을 댈 경우 논란의 불씨를 키울 수밖에 없는 분야인 종교 소재다. 영화 ‘노아’가 그것이다.
노아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경 속 ‘노아의 방주’ 속 그 노아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최고 블록버스터인 성경(바이블)의 당당한 한 챕터를 책임지고 있는 주인공이다. 39권의 구약과 27권의 신약으로 구성된 총 66권의 ‘바이블’ 스토리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거대한 영적 스토리를 담은 한 편의 대서사시다.

이 가운데 노아는 창세기 6~8장에 등장한다. 거대한 바이블의 세계 중 비종교인들조차 가장 스펙터클하게 느끼는 요한계시록과 창세기, 그 가운데 노아의 스토리는 이미 수년 전부터 할리우드 관계자들에게 가장 좋은 소재였다. 영화 ‘노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얘기를 그린다. 타락한 인간 세계를 멸하기 위한 창조주의 결단 그리고 유일하게 그 계시를 받아 방주를 만드는 노아, 그리고 노아의 방주를 노리는 ‘두발가인’이란 가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우선 한 영화 평론가의 얘기다. 이 평론가는 위험스럽게도 성경을 하나의 픽션으로 규정하고 얘기를 해나갔다. 성경 자체가 소설이기에 노아 역시 존재하지 않은 완벽한 가상의 스토리란 것이다. 결국 가상의 스토리에선 어떤 맥락의 얘기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야기꾼이 말하는 소재에서 ‘노아’란 성서 속 인물이 어떤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영화 ‘노아’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모독’이란 단어도 서슴지 않는다. 성경 속 노아는 메시아에게 예언을 받고 거대한 방주를 만들어 전 세계의 생명들을 구원하는 인물이다. (참고로 필자는 철저한 무신론자다. 성경 속 실제와 다른 미묘한 부분에 대해선 이해를 바란다.) 거대한 대재앙을 예견하고 방주를 만들어 자신의 가족들과 생명체를 구한 그는 대재앙 후 인간의 근본과 전 세계 생명의 근간이 방주에서 시작되는 기점을 만들어 낸다. 대략적인 성경 속 얘기를 여기까지다.

하지만 영화 ‘노아’는 대략적인 맥락에선 성경과 같은 길을 걷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선 약간의 위험성도 담고 있다. 어떤 기사에선 방주에 탑승한 모든 가족들이 배우자를 갖고 있는데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어린) 홀로 탑승한 점. 그리고 첫 째 아들이 방주에서 쌍둥이 딸을 낳은 점을 들어 근친상간의 가능성까지 제기한다. 또한 노아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메시아의 결정에 반하는 것이라며 자신의 손녀를 죽이려 하는 것까지 불편한 시각을 거둬들이지 않으려 한다. 거대한 바위 괴물로 묘사된 천사들의 그것도 성경에 반하는 반기독교적인 시각이란다.

그럼 대중들이 받아들이는 ‘노아’의 기독교적 관점의 해석은 어떨까. 재미있는 해석이 SNS를 통해 퍼지고 있었다. 한국의 기독교와 미국의 기독교가 바라보는 ‘노아’다. 당연히 출처는 불명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노아’를 ‘뉴에이지적인 반기독교 영화다. 죄악이다’고 평가한다. 반면 미국의 기독교는 ‘잘 만들어진 영화다. 보고 즐길 수 있을 것이다’고 평가했다. 한국과 더불어 미국의 기독교 역시 상당히 보수적임은 전 세계 어느 것을 비교해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앞선 ‘기황후’는 월화 드라마에서 경쟁 상대가 없을 정도로 시청률 독주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노아’ 역시 국내 박스오피스 2위를 유지 중이다.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인 것 같다. 국내 엔터테인먼트의 관점은. 특히 역사적 사실적 근거를 둔 소재주의에선.


<김범진 님은 언론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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