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올해는 봄바람이 거세다. 사흘거리로 바람이 몰려왔다가 몰려간다. 바람도 예년의 그것처럼 대충 마음이나 흔들어놓고 스쳐가는 문자 그대로의 봄바람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자꾸 데려오고, 그리고 가져가 버린다. 대나무를 마구 흔들어서 이파리를 죄다 떨어뜨리고, 떨어진 그 잎을 다시 모퉁이에 수북이 쌓아놓는가 하면, 아침에 빨아놓은 양말짝을 뭐에 쓰려는지 몰고 가다가 그만 연못 같은 데다 떨어뜨려 놓기도 한다.

마당에 꽃이 필 때부터 알아보기는 했었다. 아직 수선화도 피지 않았는데 매화가 먼저 화봉을 터뜨리고 있었고, 눈 속에서 핀다 해서 이름도 설중매라고 근사하게 붙여진 홍매는 일반 매화보다 오히려 늦게 피는 게으름을 연출하고 있었으며, 봄나물의 대명사 격인 냉이는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맘껏 뽐내기도 전에 꽃부터 피어내 버리고 있었고, 고창의 동백은 춘백이라 해서 4월이 깊어질 즈음에야 피건만 금년에는 개나리와 짝을 이뤄서 피어버렸고, 수선화가 다 진 뒤에야 피던 우아한 목련은 수선화를 내려다보는 형국으로 너울거리고, 불꽃같은 명자꽃 또한 외로움은 싫다는 듯 그 모든 꽃들과 함께 불을 붙여 버렸다. 

이게 뭘까. 왜 이러는 것일까. 무슨 새로운 것이 오고 있는 것일까. 흔해빠진 별똥별 하나만으로도 미래를 예견할 수 있었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시절이라면 믿거나 말거나 식 여러 이야기가 만들어져서 호기심 많은 아이들의 눈을 초롱초롱 빛나게 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시절이 아니다. 지금은 텔레비전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스승 노릇을 하는 시절이다.
“날씨가 왜 이러는 것일까요?” 하고 내가 여쭤보면 아랫집 할머니께서는 “긍게 쩌그 텔레비전에서 뭐라고 합디다마는,”하시면서 싱긋이 웃고 말아버리신다. 그 앞에서 내가 어쩔 것인가. 나도 같이 싱긋이 웃고 말아버리는 것 외에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지금은 어느 계절인가? 아직은 4월이다. 달력이 가리키는 계절로만 보자면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고 그늘을 피해 따스한 햇살을 찾아야 할 것 같지만, 하지만 몸으로 느끼는 계절은 벌써 전에 오월도 지나고 유월도 지나서 칠월쯤 되는 것 같다.

체감온도만이 아니라 자연의 하는 모양도 꼭 여름의 그것이다. 하늘에서 벌건 태양이 눈 크게 뜨고 내려다보는데 비가 내린다. 장마철의 여우비처럼,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 옛날 할머니들이 말씀하셨던 그런 비가 4월에 내리고 있다. 바람도 제법 대차게 분다.






바람 속에 비가 내리니 복숭아꽃들이 흩날린다. 상추며 쑥갓이며 아욱 등등을 뿌려놓은 텃밭에 분홍빛 복숭아꽃이 떨어져서 야릇한 선경을 만들어낸다. 아니 이것은 작품이다. 이 오묘한 작품을 보고 있자니 온갖 생각이 춤을 춘다. 바람에 흩날리는 복사꽃이 나를 데리고 어디로 가버렸는가.

아이구야, 내 나이가 이제 겨우 여섯 살밖에 안 된 것 같다. 아니 한 일곱 살쯤 되었다고 해둘까? 때는 하늘에 달도 새초롬하고 별빛은 우박이라도 쏟아진다는 느낌이 드는 초여름 날의 초저녁, 산에서는 소쩍이라든가 두견이라든가 하여튼 그런 어떤 새가 독감이라도 걸린 듯이 안타깝게 울어대는 그 밤에 동네 누나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아직 이십대 후반이었던가, 삽십대 초반이었던가, 하여튼 젊으나젊은 우리 엄마도 집을 나서고, 엄마 친구들 또한 집을 나선다. 입은 옷은 각자 다르고 키도 각자 다르지만 손에 든 것은 다 똑같다. 애들이 학교 갈 때 책을 싸서 어깨에 메고 다니는 책보 한 장에 통보리 한 됫박씩을 싸 들었다.

보리타작을 끝낸 지는 아마 한 달도 채 안 됐을 것이다. 모내기도 대충은 다 끝났다. 하늘이 비를 안 내려주면 쌀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천수답만 산자락 여기저기에 남았다. 고구마 모종 또한 비가 와야 한다. 그런데 복숭아는 익었다. 복숭아가 익어간다는 소문이 벌써 전에 마을에 도착했다.

내일 갈까? 모레 갈까? 아니 글피로 결정하지. 내일은 영숙이네가 제삿날이라 안 되고 모레는 금암댁네가 또 제삿날이라 안 되고 글피가 좋겠어. 엄마와 엄마 친구들 그리고 시집갈 날이 얼마 안 남은 누나들이 모여서 그렇게 일정을 조율한다. 그 옆에서 아이들은 복숭아, 복숭아, 노래를 불러댄다.

복숭아 과원으로 복숭아 사 먹으러 가는 날을 언제로 잡을 것인가 하는 그런 공론의 장이 펼쳐지는 날부터 아이들은 그러니까 마음이 설레서 밤에 잠도 잘 못 자고, 밥도 잘 못 먹는 이상한 병에 걸려버리는 셈이다. 복숭아, 아, 그놈의 복숭아, 말만 들어도 침이 질질 나와서 밥맛조차 잃어버리게 하는 그놈의 복숭아는 우리가 어렸던 그 시절에 참으로 귀하디귀한 과일이었댔다.







지금은 고인돌 공원이 돼버린 우리 마을 매산을 중심으로 약 사 킬로미터 이내에 복숭아 과원은 딱 한 곳밖에 없었다. 선운사 골짜기와 연결되는 인천강 옆 사신원, 옛날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하룻밤을 묶어가는 객사 비슷한 것이 있었다 해서 지금도 사신원이라 불리는 바로 그 마을에 복숭아 과원이 있었다.

밤길을 쉬지 않고 걸어서 족히 한 시간은 잡아야 하는 그 복숭아 과원을 혼자서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찻길이 훤하게 뚫려 있지만 그 시절에는 우마차나 겨우 다니는 산길이었다. 여럿이 함께 몰려 가면서도 무슨 낯선 소리만 들리면 두 귀를 쫑긋 하고 걸음을 멈춘 채로 한참을 서 있어야만 할 정도로 어둠이 깊은 길이기도 했다.

남자 어른들이 동행을 한다면 물론 그렇게까지 무서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 어른들이 밤중에 복숭아를 사 먹으러 가는 그 행렬에 동참한 적은 거의 없었다. 남자 어른들은 여자와 아이들, 그야말로 아녀자들이 그 밤중에 그 먼 길을 다녀온 뒤에 내려놓은 복숭아를 맛이 있네, 없네, 온갖 품평을 해가며 우걱우걱 씹어 먹을 줄이나 알 뿐이었다.

그렇다고 동행해주지 않는 남자 어른들을 원망했을까? 아니었다. 원망은커녕 동행해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고, 요청할까, 하는 생각조차도 누나와 엄마들은 해보지 않았다고 나는 감히 자신 있게 증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둠이 깊은 밤길을 걷는 데서 오는 미증유의 두려움과 공포, 그 짜릿짜릿한 스릴을 엄마와 누나들은 즐기고 있었던 것이니까.

아이들 또한 남자 어른들의 동행을 눈곱만큼도 원하지 않았다. 만약에 남자 어른들이 동행하는 밤길이라면 아이들이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만 펄쩍 뛰어도 어매! 하고 소리를 질러대며 아이들의 손을 꼭 잡아주는 엄마와 누나들의 그 뭐랄까, 요새 흔히 쓰는 말로 하자면 스킨십? 그래, 그 따뜻하게 옹골진 것을 느끼는 포곤한 즐거움이 있었다. 먹고살기도 바쁜 시절이다 보니 아이들은 그런 밤길을 걷고 있을 때나 겨우 자신이 보호받고 있다는 위로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엄밀하게 따지고 보자면 그 밤길은 사실 복숭아를 먹으러 가는 길이라기보다 벌레를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복숭아 속의 벌레가 사람을, 특히 여자를 예쁘게 해준다는 전설을 엄마들과 누나들은 종교처럼 믿고 있었다. 그래서 벌레를 먹기는 먹어야겠는데 훤한 대낮에는 용기가 없어서 못 먹는다. 깜깜한 밤에는 용기고 뭐고 다 필요 없이 그냥 먹어질 수가 있다.

먹는 것이 아니라 먹어질 수 있다는 것. 이 재미있는 한 줄의 문장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재미있다. 재미도 보통의 재미가 아니라 아주 크고 깊고 넓은 재미가 그  한 줄의 문장 속에 보석처럼 숨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그것은 뭐랄까, 인생이란 이름의 너무도 모호한 것을 아주 극명하게 단적으로 드러내준다고 하면 말이 좀 되려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한 번 더 중얼거려 본다.
먹는 것이 아니라 먹어질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요즘은 그런 복숭아를 찾아보기 어렵다. 시장에 나온 복숭아들은 화장을 잘한 배우들처럼 흠집 하나 없이 그저 매끈하기만 하다. 복숭아 과원으로 직접 찾아가도 벌레 먹은 것은 눈을 아주 깨끗이 씻고 찾아보면 한 개나 보일까 원,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소비자들이 매끈한 상품을 원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복숭아 과원 자체가 농약을 퍼붓다시피 하지 않으면 단 한 알의 복숭아도 얻어낼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농약을 퍼붓다시피 사용해야만 한다. 이것은 내가 매년 체험하고 있는 일이라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벌레의 문제가 아니다.

복사꽃이 좋기도 하고, 복숭아 또한 좋아서 복숭아나무를 다섯 그루나 심었었다. 묘목 장사가 말하기를 4년생이라고 했다. 이듬해 바로 꽃이 피었다. 열매도 열렸다. 꽃은 보기에 좋았지만, 열매는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파란 열매가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할 무렵부터 작은 구멍이 숭숭 뚫렸다.







바늘로 콕콕 찔러놓은 것 같은 구멍은 날마다 조금씩 커져 갔다. 구멍을 통해서 속살이 조금씩 빠져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복숭아는 껍질과 씨앗만 남은 홀쭉이가 된 채로 툭 떨어졌다. 복숭아벌레만 복숭아를 먹는 게 아니었다. 과일만 찾아다니면서 먹는 나비가 떼로 몰려 다녔다. 벌도 복숭아를 먹고 있었고, 바퀴벌레 또한 복숭아를 맛나게 먹고 있었다. 내가 어렸던 시절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생각도 해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랬다. 자연은 진화하고 있었다. 자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존재의 방식을 다각화 내지 다양화 하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진화하고 있는 자연의 한복판에서 복숭아 먹는 즐거움을 포기해야만 했다. 농약을 치지 않으면 단 한 알도 복숭아를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그렇게 해서 알았다.

그리고 또 알았다. 사람이 농약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은 자연 자신의 구성원 중에 하나인 각종 벌레와 곤충들에게 내성을 길러 주었다는 것을, 사람이 농약의 강도를 높임에 따라 그 내성 또한 강화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았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미래의 세계는 어떻게 될까, 하는 아주 흥미진진한 의문을 갖고 이런저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보는 재미를 만끽하기에 이르렀다.

날씨가 겨울에서 봄을 건너뛰다시피 하며 여름으로 직진하는 현상도 자연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어렵지 않게 풀린다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봄이 사라졌다고 야단법석을 떨며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기도 하고, 지구의 수명이 다 되었다는 등의 공포를 유포시키고도 있지만, 자연의 입장에서 보자면 쓸데없는 걱정이요 유언비어들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마치 사람 자신은 자연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자연의 일부이기는커녕 자연을 만들어낸 신이거나 그 신의 후계자라도 되는 듯이 행동하지만, 자연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람은 수천 수억 종류에 달하는 자연의 구성원 중에 한 종류일 뿐이었다. 따라서 자연은 사람의 일방적인 요구를 들어줄 필요도. 이유도. 근거도 없는 것일 터이었다.







자연은 다만 자연으로서의 할 일을 다 하고자 할 뿐일 것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봄이 사라졌다고 허둥거리게 하는 것은 자연이 애당초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이 뭔가 의도한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자연 자신의 풍성한 생존 그 자체였을 것이다.

자연은 인간이란 이름의 종 하나와 그 종이 잡아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종들만으로는 생존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아니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서 부득이 인간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재앙이 되는, 재앙이라고 밖에는 생각이 안 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자연에게 사람이 가령 뭔가 한 말씀만 해주세요, 한다면 자연은 아마 이런 말을 할 것이다.

제발 함께 좀 살아가거라. 너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해서 무조건 죽이려고만 들지 말고, 함께 사는 방법에 대해 연구도 좀 하고 그렇게 살란 말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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