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우리는 수많은 디자인에 둘러싸인 채 일생을 살아간다. 디자인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삶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디자인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디자인은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 발전하고, 그런 디자인의 발전에 맞추어 사람들의 삶도 변화한다. 이 둘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는 셈이다. 이러한 톱니바퀴의 사이클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디자인은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침투되었다. 디자인의 흐름이 사람들의 삶의 방향, 더 나아가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게 이른 것이다.

현대 사회는 디자인의 발전 주기가 상당히 짧고 신속하다.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반영한 결과겠지만, 이제는 새로운 디자인이 오히려 사람들의 생활을 결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세태를 잘 보여주는 분야가 바로 IT 이다. 특히 모바일 분야는 단기간에 빠르게 발전해왔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준다. 내 유년시절만 해도 공중전화와 삐삐가 당연한 것이었는데, 내 나이 채 만 25살도 되기 전에 사람들의 손에 들린 ‘스마트 폰’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스마트한 ‘안경’도 나온단다.

사람들의 삶의 모습 역시 모바일 기기의 발전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진다. 약 20년 전만해도 공중전화가 없으면 외출해서 서로 연락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전화나 문자 메시지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이메일이나 ppt도 손바닥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 일러스트 정다은 기자 panda157@naver.com



이런 변화는 사람들의 여가생활, 업무형태 등등 여러 가지 삶의 모습의 변화로 이어진다. IT의 발전이 문화적 변화로 연결된 것이다. 디자인은 이렇듯 ‘삶’을 바꾼다. ‘새로운 디자인’이란 결국 사회를 바꾸는 ‘혁신’이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분야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스마트폰이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바꾼 것처럼, 한쪽의 변화가 연속적으로 다른 분야에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어떤 디자인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앞으로의 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 디자인에 ‘의식’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 사회는 그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이해관계 역시 복잡하게 얽혀 있으므로 ‘의식’이 결여 된 디자인은 곧 사회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니버셜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있다. 쉽게 말하자면, ‘모두를 위하는 디자인’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자면 장애인만을 위한 특수한 디자인이라 장애가 없는 사람들에겐 효용이 없는 그런 디자인이 아니라,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도 편리하게 사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애가 없는 사람들도 역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 같은 것이 바로 유니버셜 디자인이다.

그래, 나는 이 개념에 감동한 경험이 있다. 이 경험에 대해 설명하려면 우선 내가 봉사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나의 짝꿍이었던 오빠. 오빠는 나보다 한 살이 많은, 꽤 훤칠한 미남이다. 피부도 곱고 이목구미도 오밀조밀 모난데 없이 잘 생겼다. 하지만 오빠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 겉보기로는 이렇게 25살의 잘생긴 청년이지만, 20년째 다섯 살로 살고 있다는 점이다. 오빠는, 정신지체를 앓고 있다. 오빠가 가진 특별함에 대해서, 기관의 식구들은 조금 안타깝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결코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빠는 많은 사랑을 받고 있고, 오빠도 그 사랑을 알고 있다. 오빠는 불행한 사람이 아니다. 오빠는 누구보다 천진난만하게 세상의 행복함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오빠를 좋아한다. 하지만 오빠의 삶을 위해서, 오빠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하나씩 늘려 가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기관에서는 설령 오빠가 조금 힘들어 하더라도, 오빠가 무언가를 스스로 해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그중 하나가 ‘글’을 쓰는 것이다. 오빠는 아직 글을 떼지 못했다. 읽지 못하고, 쓰지도 못한다. 억지로 시키면 너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조급해하지 않고 꾸준히 연습시키기로 했다. 읽기 공부는 오빠도 재미있어 한다. 대부분 글자를 그대로 읽지 못하고 동화책의 삽화 따위를 보고 자기가 지어낸 이야기를 말하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읽는 흉내를 내면서 관심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꽤 고무적인 발전이다. 하지만 쓰기 공부는 유독 힘들어 하고 짜증을 내는데, 오빠의 손에 악력이 부족해서 글씨를 쓰는 것 자체가 너무 힘겨운 일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는 펜을 놓치기가 일쑤고, 어렵게 한 획을 긋는 중에도 펜이 넘어지거나 빠지고는 하니 펜을 잡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쁜가 보다. 몇 획 긋고 펜을 던져버린다. 아무리 칭찬을 해줘도, 쓰기 공부시간에는 오빠의 기분을 맞춰줄 수가 없다.

그러던 중에, 쇼핑몰에서 특이한 펜을 발견했다. 아주 평범한 문구류 쇼핑몰이었다. 디자인 문구나, 팬시제품들을 판매하는, 그런 평범한. ‘오래 써도 손이 아프지 않은 펜’이라는 설명을 달고 있는 그 펜은, 가격대가 조금 있었지만, 모양이 굉장히 독특해서 클릭을 안 해볼 수가 없었다. Y자로 생긴 펜은, 엄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검지로 무게를 실어 글씨를 쓸 수 있도록 만들어진 펜이었다. 나는 당장 내 것 하나, 오빠것 하나, 2개를 구매했다. 펜은 굉장히 신기한 디자인이었다. 일단 길이가 다른 펜들 보다 짧았고, Y자 모양의 외형이 귀엽기도 하고 독특했다. 처음에는 조금 낯선 느낌이 있었지만 몇 번 연습해서 없애고 나니 글씨를 쓰는데 불편함도 없었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그 펜의 필기감이었다. 펜을 잡고, 펜을 통해 글씨를 쓰는 게 아니라,  마치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래판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는 것처럼, 손가락 끝에서 검은 선이 나오는 것 같은 느낌. 조금 낯선 필기감에 적응하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분명히 적응하고 나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빠는 기존의 펜들에 익숙하지 않으니 나보다 훨씬 적응하기 수월했으리라.

오빠도 그 펜으로는 펜을 놓치지 않고 글씨를 쓸 수 있었다. 손 전체의 중력으로 펜에 무게를 실을 수 있기 때문에, 떨리는 오빠 손에서도 꽤 안정적인 선을 뽑아냈다. 오빠가 그 펜으로 공부할 때는 짜증도 덜했다. 그 디자인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모든 사람’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다른 펜들을 잡는 데에도 무리가 없는 나도, 손에 힘이 부족한 우리 오빠도, 모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 되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만약 그 펜이 오직 ‘장애인’을 만을 위해 디자인 되어 있었다면 크게 감흥이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일반 쇼핑몰에서, 모든 사람이 편리하게 쓸 수 있는 펜이라는 소개 밑에 일반 펜을 잡기 불편하신 분들에게도 좋다는 부가 설명이 붙어 있는 그 페이지는 어쩌면 나에게 자그만 감동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오빠는 ‘장애인’이나, 일반인과 구분되는 ‘특수한 사람’으로 분류되어왔다. 장애인의 반의어가 보통사람이라 표현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장애인도 감정이 있고 생각이 있는 보통의 사람이다. 단지 장애라는 특별함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보통’이 아닌 사람으로 구분해버리곤 한다. 오빠가 가지고 있는 특별함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특수 교육 같은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까지 오빠를 전체의 무리에서 분리해 내는 사람들의 시선은 조금 마음이 아프다. 오빠 역시 장애인이기 이전에 한명의 사람이다. 나와 오빠는 조금 다를지언정, 본질적으로는 같은 사람인 것이다. 봉사활동을 하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오빠 대신, 남들의 시선 앞에 상처 받은 적이 종종 있었다.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우리오빠를 굳이 그렇게 모두와 어울릴 수 없는 사람으로 구분 짓고, ‘특수’의 틀에 가두고, 그렇듯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었을까. ‘보통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장애인 시설’은 반대한다는 기사 따위를 읽거나 할 때도 새삼 이런 세상의 시선들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하고는 했다.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이기에 아주 사소한 이 펜의 디자인이 크게 와 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두를 위한 펜이라는 그 짧은 문구가, 마치 오빠도 당연히 ‘모두’에 들어가는 거 아니냐는 듯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연한 일인데도, 여태껏 당연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다정한 문구 앞에 조금은 멍해지고 말았다.

내 개인적인 굿 디자인 랭킹을 꼽자면, 나는 몇 년 전 구매했던 이 Y자 형태의 펜에게 1위의 영광을 주고 싶다. 단지 심미적으로 예쁘거나, 기능적으로 뛰어나다는 이유뿐만이 아니다. 그 작은 펜 안에 들어있는, ‘모두가 함께하는’,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결코 작지만은 않은 그 의식이, 세상을 바꿀 굳 디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 디자인은 앞으로의 우리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가야하는가 하는 의식을 담아내야 한다. 21세기의 현대 디자인이 나아갈 방향은, 사실 21세기의 복잡함만큼이나 하나로 정의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점점 고려할 부분도 많아지고, 디자인에 부여되는 부담도 늘어나고 있다. 심미적 기능적으로 훌륭해야 함은 기본덕목이거니와, 환경도 지킬 수 있어야하고, 더 나은 삶의 양식을 제공해야하고….

여기서 나는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앞서 얘기했듯 현대 사회는 그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있다. 디자인의 방향이 곧 삶의, 사회의 방향으로 연결되는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복잡해진 사회 속에서 다양한 이해관계가 대립되고 있다. 수많은 갈등들. 이런 복잡함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생각하는 현대사회의 개인주의는 또 다른 다양한 문제들을 야기한다. 조금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마음부터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청년이나 노인, 장애인이나 비장애인, 이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사회. 이러한 사회 속에서, 현대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는 다양한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 다양하고 복잡하게 이해관계를 형성한다. 이 모든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자 21세기의 현대 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이다. 나는 21세기의 다양한 갈등들을 해결하고,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열쇠로 유니버셜 디자인에 주목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령, 신체적 능력, 처한 상황 등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모든 제품을 디자인하고 그런 환경을 만드는 것. 바로 유니버셜 디자인의 개념이다.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다양하고 복잡한 사람들이 어울려 서로를 생각하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어느 한 쪽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 이 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보여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법학전문대학원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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