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진의 문화 뒷마당> 영화 '캡틴 아메리카'



어린 시절, 그러니깐 5세 정도로 기억한다. 난 목 뒤에 긴 보자기를 두르고 장독대 위에서 펄쩍 뛰면 분명히 내 몸이 ‘휙’하고 바람을 가르며 날라 갈 것이라 굳게 믿었다. 정말로 그렇게 믿었기에 진짜로 실천을 해봤다. 당연히 마당 한 쪽 구석으로 곤두박질쳤고, 그 가느다란 팔 한 쪽이 ‘뚝’ 하고 부러졌다. 5세짜리가 뭘 알겠나. 그 당시엔 기브스를 한 것조차 ‘로봇’ 팔이라고 동네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고 다녔으니 말이다. 당시 일본 로봇 캐릭터 ‘스페이스 간담V’라며 석고 기브스 팔에다 미사일과 총 그림을 그리고 동네 골목대장을 노릇을 하는 내 모습을 지금도 상상해본다. 피식 헛웃음이 나오기만 한다.

뭐 필자 혼자만의 어린 시절 추억이겠나. 사내 녀석들이라면 영웅을 동경하는 동심의 상상력 속에서 혼자 슈퍼맨도 됐다가 철이(마징가Z 조종사)도 됐다가, 훈이(로보트 태권V 조종사)되는 등 그날의 테마를 정하며 동네 친구들과 ‘돌격!’ 한 번 외쳐보지 않은 지금의 30대는 없을 것이다.

사실 이런 기억이 추억이 될 수 있는 것은 나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만큼 동심은 지금의 시간을 버텨 낼 수 있는 하나의 원동력이자 밑거름이며 근간이 될 수도 있다. 20여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한 때는 저랬다고 저런 시절의 나는 어땠다는 추억 속에 잠시 잠기면 살기 각박하고 잔인한 이 세월의 흐름을 조금은 참고 견디며 잠시 씩하고 웃고 살 수 있는 작지만 크고 굳건한 힘을 낼 수 있지 않겠나.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캡틴 아메리카’란 이 미국산 원조 영웅은 기억의 흐름도 추억의 아련함도 별로 큰 의미는 없는 듯하다. 얼음 속에서 70여년을 잠들다 깨어났지만 그저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악을 처단하는 완전 무대포 국가주의를 똘똘 뭉친 극단적인 외골수 히어로 캐릭터이니 말이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가 국내 극장가를 초토화시키고 있다. 몇 년 전, 국내에서 ‘퍼스트 어벤져’란 이름으로 개봉한 작품의 속편이다. ‘어벤져스’ 멤버이자 리더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국내에서 인기가 높다는 마블코믹스의 원조 히어로이자 영웅들의 조상격이다.

사실 이 히어로의 탄생 배경을 보면 좀 그렇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 미국의 국가관을 고취시키기 위한 과정으로 탄생됐던 것이다. 입고 있는 옷만 봐도 전형적인 ‘미국산’이란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너무도 미국적이란 사실 때문에 1편 개봉 당시에는 한국과 중국 등 반미 정서가 강한 국가에선 영화의 부제인 ‘퍼스트 어벤져’가 제목으로 극장에 걸리는 촌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1편의 국내 성적은 참담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어벤져스’의 개봉과 함께 ‘캡틴 아메리카’ 캐릭터에 대한 인기는 급상승했다. 억만장자 출신의 토니 스타크가 주인공인 하이테크놀로지의 집합체 ‘아이언맨’, 인간이 아닌 신 캐릭터인 ‘토르’, 감마선 노출에 따른 돌연변이 ‘헐크’, 그리고 인간이지만 신급에 버금가는 전투력을 지닌 ‘블랙 위도우’, 호크 아이 등과 비교할 때 ‘캡틴 아메리카’는 어딘지 모르게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슈퍼 솔져’ 프로젝트(이 프로젝트의 진행자는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의 아버지 하워드 스타크다)로 탄생한 ‘멸치꽁다리’ 청년 스티븐 로저스가 엄청난 능력(일반인의 수십 배 정도라고 보면 된다)의 전투력을 갖춘 ‘괴물’이 된다. 초능력은 없다. 다만 파괴 불가능으로 알려진 가상의 금속 ‘비브라늄’ 재질의 방패가 유일한 무기다. 이 무기를 부메랑처럼 던지기도 하고 상대방의 공격을 막기도 하며 뭐 어쨌든 다양한 용도로 사용한다.

사실 1편의 실패는 ‘캡틴 아메리카’의 전사(前史)에 집중한 고리타분한 올드함이 원인이었다고 보면 된다. 이 캐릭터 자체가 1940년대에 탄생했기에 그나마 ‘착한 놈’과 ‘나쁜 놈’의 대결도 고작 ‘딱총’ 싸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뭐 화염방사기에 올드 클래식 범주에 들어갈 만한 ‘나쁜 놈’들의 여러 괴상망측한 무기도 여럿 등장한다. 하지만 마블의 SF에 익숙해진 국내 관객들이 ‘와우’란 감탄사를 쏟아내기에는 너무도 모자란 구성력이었다. ‘와우’보단 ‘에이’에 가까운 한탄 섞인 비명이 ‘퍼스트 어벤져’의 결과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대한민국 영화팬들의 마블 사랑이야 전 세계를 아우르는 독보적인 충성심으로 설명이 가능하고, 마블 영화 시리즈의 이른바 ‘쿠키영상’(영화 끝난 뒤 나오는 숨은 영상)으로 마블의 ‘떡밥’ 소나기가 영화팬들의 호기심을 두들기니 그 올드함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것이다. 매번 개봉하는 마블 영화의 쿠키를 통해 이른바 공개되는 마블 유니버스(마블코믹스 캐릭터들이 공유하는 세계관)가 확장되고 그 안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캡틴 아메리카’의 인텔리적 마초리즘에 국내 남성 관객들은 점차 동화되어 갔으리라.

최근 개봉한 2편이 그 동화된 마음을 100분 이해하는 구성력으로 인텔리적 마초리즘의 깊은 곳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다. 마블코믹스의 영화는 대체로 허구성이 강하다. 미국의 양대 코믹스인 마블과 DC의 캐릭터들을 보면 확연한 특징이 있다. 마블은 어느 정도는 실현 가능할듯한 히어로물에 주력한다(실험에 따른 돌연변이). 반면 DC는 외계인 혹은 다른 생명체의 히어로 작화가 특징이다(배트맨을 제외한 모든 캐릭터, 슈퍼맨 원더우먼 등).

이미 미드를 통해 번외 편 드라마로까지 제작된 ‘쉴드’란 조직을 내세워 만든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는 ‘어벤져스’의 뉴욕사건 이후 쉴드 요원으로 편입된 ‘캡틴 아메리카’의 활약상을 그린다. ‘쉴드’ 내부의 적이 전 세계 임의의 적을 타깃으로 새로운 세계대전을 꿈꾸는 것을 저지하는 활약상이다. 당연히 엄청난 체력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막가파식의 전투력으로 적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가떨어진다. 뭐 가끔씩 수백 혹은 수 천 미터 상공에서 낙하산도 없이 비행기에서 점프하는 ‘캡틴’의 만화적 배짱에 리얼리티를 첫 번째 포인트를 삼는 관객들의 실소가 터져 나오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쩌랴. ‘캡틴 아메리카’의 태생이 만화인 것을.

하지만 이런 간간히 터지는 만화적인 구성에도 불구하고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이른바 정보전 혹은 버튼 전쟁의 양상으로 전환되는 국가 간 전면전의 가능성을 영화적으로나마 그리며 리얼함에 조금은 다가선 덕분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초거대 항공모함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전 세계 통신망에 대한 감청이 가능한 미국의 군사력이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인물들을 사전에 찾아내 미리 제거한다는 공포스러운 설정이 나오면서 이는 분명 지금의 전 세계 힘의 균형 논리와 맞아 떨어지는 모습과의 묘한 일치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국가에겐 처절한 응징을,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충성스런 개에게는 떡밥을 던져주는 그들의 ‘꼬라지’가 이런 만화적 캐릭터로 무언의 의식 속에 주입하고 있는 막연한 상상을 해봤다. 이건 ‘캡틴 아메리카’ 할아버지가 와도 아니 ‘어벤져스’ 전체가 몰려와도 이겨내지 못할 상황이다.

최근 ‘어벤져스2’가 대한민국에서 촬영을 마치고 돌아갔다. 전체 러닝타임 가운데 대한민국 촬영 분이 무려 20여분 정도나 포함될 예정이란다. 이 촬영을 위해 국내에서만 100억 원을 소비했다. 하지만 국내 촬영에 대한 영화계 유관 단체 및 국가 지원금으로 30%를 환급받게 된다.

‘어벤져스2’를 찍으면서 도저히 불가능한 장면들이 여럿 연출됐다. 주말 아침 강남대로를 전면 통제하고 찍은 것만 봐도 안다. 이 기간 ‘캡틴 아메리카’역의 크리스 에반스가 국내에 입국해 몇 장면을 찍고 출국했다. 그래서인지 더욱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같은 기간 저예산 한국 공포영화 ‘소녀무덤’이 아주 간단한(?) 지하철 촬영을 도시철도공사에 정식으로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단다. 아주 간단한 촬영이었단다. 그냥 차고지에 들어간 지하철에서 찍으면 된다는.

참 비교된다. 그런데 웃긴 건 나도 내 돈 주고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를 봤다는 것. ‘어벤져스2’도 개봉하면 즉시 볼 듯하다. 내 손모가지를 확 그냥.

<김범진 님은 언론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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