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사람마다 추구하는 행복이 다르겠지만,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좇아 삶을 살아간다. 현재의 삶에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나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끊임없이 행복한 삶을 갈망하고 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 다만 현실의 삶을 지속하고 싶은가,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불행한 삶이라는 것은 때로 개인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냉정하고 가혹한 운명적 불운으로 인한 것일 때가 있다. 연민이 느껴질 만큼 상황이 풀리지 않는 사람들, 태어나는 순간부터 좋지 못한 환경을 물려받아야 했던 사람들, 노력으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핸디캡들.

운명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그런 커다란 힘 앞에, 어떤 사람들은 굴복하고, 어떤 사람들은 발악하듯 행복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 이어간다. 운명이 너무나 가혹하여 가엽게도 그에 굴복해 버린 사람들을 볼 때면, 그 굴복에 대해 내가 감히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곤 한다. 내가 겪어본 적 없는 장애를 극복하는데 실패한 사람에 대해 내가 그들에게 조금만 더 힘을 내보지, 하고 감히 쉬이 말할 자격이 있는가. 단지 나는 그들에 대해 안타까워 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그 운명의 무게가 어떨지, 나였다면 그 무게를 어깨로 견뎌낼 수 있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자신이 없다.

얄팍하게도 나는 그런 타인의 좌절을 보며, 나는 그렇지 않아 다행이다 하는 못된 안도감이나 느끼곤 한다. 내가 그와 같은 상황에서 운명에 제대로 맞서서 행복을 씩씩하게 추구할 자신이 없기 때문인지 반대로 나는 그렇게도 어려운 운명에 맞서 자신의 행복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어떤 위대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실화든 아니든, 희망적이든 아니든, 그런 억척스러운 투쟁들은 상대적으로 수월한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어떤 식으로든 나의 삶을 고무시킨다. 사람들이 그런 스토리들을 좋아하는 것은 아마 비슷한 이유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이야기들은 내 행복을 찾는 여정에도 어떤 활력을 불어넣는다.





# 일러스트 정다은 기자 panda157@naver.com



돌아보면, 나는 어찌 감당해볼 수 없는 ‘가혹한 운명’에 맞서야만 할 만큼 열악한 상황에 처해진 적은 딱히 없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나는 부모님이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정석의 교육 코스를 밟으며, 내 나이대의 많은 사람들이 하는 고민을 함께 하면서, 남달리 큰 불안감도 위기감도 없이 지금껏 살아왔다. 대부분은 나와 비슷하게 살아간다. 개인적으로 한 명 한 명 뜯어보면 사정없는 사람이 더 드물겠지만, 그래도 운명과 투쟁하는 사람보단 그런 사람을 돌아보며 안타까워하고 얄팍하게나마 상대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안도하고 위안을 얻는 모습이 좀 더 일반적이고 흔한 대다수의 모습이다. 그래, 우리의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특별히 남보다 더 불행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특별히 불행한 사람들을 보며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상대적으로 보다 행복할 법한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우리는 모두, 행복하지만은 않은 걸까. 얼핏 생각해보면 평범한 사람들은 보다 열악하고 가혹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비해 더 수월하게 행복해 질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실상 그렇지도 않은 것이 사실이다. 마치 어느 정도의 불행조차 평범함의 요건 같은 느낌이다. 지하철에는 행복한 얼굴보다 지치고 피곤한 얼굴이 더 흔하고, 학생, 직장인들은 자신의 일에서 행복을 느끼기 보다는 일요일 밤에 월요일에 대한 악몽으로 시달리는 일이 더 잦다.

모두가 유별나게 불행하진 않아도, 전반적으로 어느 정도의 불행함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왜 우리는 이에 투쟁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가진 불행함은 유별나고 굉장히 가혹한 편은 아니다. 대개 평범한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정말 가혹한 운명을 타고 난 사람들은 자신의 최소한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혹은 얻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투쟁한다. 헌데 어째서 우리는 평범한 수준의 불행에도 굴복하고 마는가. 어째서 그런 불행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가는가. 상대적으로 우리는 보다 수월하게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우리가 당연하게 수인해버리는 불행들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포장된다. 그것들은 실제로도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고, 사실은 어쩔 수 있는 일인 경우도 있다.

내 지인 중에는, 또래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일반적인 취업난을 겪고, 평범하게 몇 번 낙방한 후, 크게 튀지 않고 적당한 회사에 취직한 친구가 있다. 딱히, 크게 어려운 것은 없다고 했다. 취업이 아주 쉽지는 않았고, 그렇게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려고 한다지만 어째서인지 영 삶이 행복하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며 지금껏 꾹 참고 살아왔다. 때로 자신이 가진 불행을 술로 달래며, 이 불행이 평범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참고, 안도해왔다. 일이 심각하게 적성에 맞지 않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과 사이가 심하게 틀어져서 스트레스 받는 것도 아니다. 보수가 지나치게 흡족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 그저 그냥 일을 하기 싫은 것인가 싶을 만큼 대수롭지 않게, 그 불행을 받아들여 왔다고 한다. 그래 요즘 이만큼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할 때 부터였다.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너무 힘이 든다는 것을 반증하듯 스트레스성 탈모는 자신에게 어떤 경고를 보내왔다. 빠진 머리카락이 주는 경고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았더니, 지난 일 년, 본인은 ‘어쩔 수 없다’며 불행하게만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게 아니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일들에 맞서는 사람에 비하면, 자신은 단지 용기가 없었던 것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친구는 찬찬히 자신을 돌아보았다.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아직은 정확하게 아는 바가 없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지금 하는 일은 나를 불행하게 하고 있고, 현재 내 몸은 한계를 알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단이 서지 않아서였을까, 친구는 병원에서 스트레스성 탈모를 치료하면서 한동안 일을 계속했다. 근본적 원인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약물치료는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빠지는 머리카락 수는 줄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불행했다.

내 친구와 같은 사람들은, 도처에 널려있다. 내 친구는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정도의 불행은 평범한 축에 들어간다. 친구가 조금 달랐던 점은, 그 불행을 더는 수인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점이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불행한 쪽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더는 외면하지 않기로 그렇게 결정했다.

그렇게 내 친구는 ‘튀는 짓’을 시작했다. 어렵게 취직한 회사를 그만두었다. 주변 취준생들이 아깝다고, 조금만 참지, 하고 말했지만, 그녀는 생각했다. 이 일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없는데, 더는 불행하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그녀는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 겪어보지 않았기에 그 곳에 행복에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은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고 한다. 언젠가 정말 행복한 일을 찾았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행복한 일을 찾는 여정으로도 스스로의 삶이 더는 정체되어 불행에 침식되지 않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고 했다. 신경 쓸 일은 예전에 하던 일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진 않지만, 머리카락이 더는 빠지지 않는다고. 그런 그녀를 보면 불행함을 알고 그 곳을 떠날 힘도 있으면서도, 단지 의지가 없어 그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 사람들 말대로, 다른 곳에도 내가 있는 이곳처럼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 삶을 이대로 이 불행한 곳에서 영원히 방치해도 괜찮은 것일까. 적어도 발버둥은 쳐 보아야 하지 않나. 아주 가혹한 운명이 ‘이 곳이 아니면 살 수 없게’ 만든 것도 아닌데 말이다. 공부를 하는 것이 죽을 만큼 싫으면, 대한민국의 학생이라도 다른 일을 찾아볼 수 있다. 고등학생이 대학을 안 간다고 죽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다고 불행한 삶을 사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삶을 살 수도 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면, 우리도 운명에 맞설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들에 대해, 두려움을 버리고, 정말 내 것이 아닌 기대와 바람도 버리고, 찬찬히 다시 돌아보면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 것들이 상당히 많다. 한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인이다.” 자유인으로 생각해보면, 결단을 위한 용기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불행을 계속 할 필요가 있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도 말고, 불행을 그만 두어도 좋지 않을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은 삶을, 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법학전문대학원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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