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모두가 말문이 막혀버린 시대의 자화상



아침 일곱 시, 그놈의 세월호 참사 문제가 내게 안겨준 스트레스로 만신창이가 돼버린 정신을 좀 세척도 해볼 겸 산으로 가서 고사리나 꺾어볼까, 생각 중인데 전화가 왔다. 곰소만 그 너른 하전갯벌에 바지락 종패를 이십 톤이나 뿌렸지만 걷어 들인 양은 일 톤도 채 안 되는 사람, 흔히 하는 말로 망해버린 사람, 그가 아마 땅부자로 소문난 처가에 가서 뭔가 일을 돕고 있는 모양이었다.

“형님, 오늘 뭐 일정 있으세요?”
“일정은 무슨, 그냥 편하게 오늘 뭐하느냐고 물으면 될 걸. 고사리나 꺾으러 갈 생각인데 왜?”
“아유 그럼 잘 됐네. 오늘 일 좀 하시게요.”
“뭔 일?”
“오늘 낙종하는 날인데 사람이 한 명 안 나와버렸네요.”

낙종이라는 말은 듣느니 처음이었다. 낙종이 뭐냐고 물었더니 못자리 뭐라고 우물쭈물 말끝을 흐려버린다. 농촌에 살면서도 농사에 무식하기는 그가 아마 나보다도 한 수 위일 것이다. 나는 그래도 이것저것 관심을 갖고 모르는 것은 열심히 묻기라도 하지만, 그는 그저 그놈의 갯벌만 열심히 드나들었을 뿐 농사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어쨌든 못자리 뭐라고 우물쭈물하는 그의 발언을 통해서 나는 낙종이란 것이 볍씨를 뿌리는 작업이란 것을 알았다.

그런데 왜 굳이 낙종이라고 그렇게 고상한 이름을 붙여서 쓰는 것일까. 예전에도 그랬었나?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선뜻 떠오르는 그림이 없다. 내가 어린 시절에도 못자리는 해마다 봄이면 했었다. 아무리 농사가 적은 사람이라도 못자리를 혼자서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언제나 시끌벅적한 곳, 그것이 못자리 현장이었던 것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내 손으로 직접 못자리를 만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열두 살 나이에 무단가출을 감행해 버린 내게는 사실 그런 기회가 원천적으로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낙종(못자리)현장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못자리를 한 번도 못해봤다는,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아마 선뜻 그의 요청을 수락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글쎄, 장담하긴 어렵지만 못해, 안 가, 바빠, 등등 수많은 거절의 언사 가운데 하나를 동원해서 단호하게 거절을 해버렸을 터이었다.

그가 나를 부른 것은 꼭 나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원래는 다른 사람이 오기로 했는데 그 사람이 안 와버렸다. 그래서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사람을 급히 수배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에게까지 전화가 왔다. 요컨대 대타, 그나마 첫 번째 대타도 아닌, 대타 중에서도 대타로 내가 선발된 셈이었다. 그것을 알아버린 내 기분이 썩 그렇게 좋을 까닭은 없는 것이고, 그러니 거절을 한다 해도 뭐 도덕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갔다. 호기심 때문에 갔다. 모내기 현장은 여러 번 가서 함께 했지만 못자리 현장은 정말이지 처음이서, 그래서 경험을 쌓겠다고 갔다. 그리고 놀랐다. 가자마자 놀라서 입이 떡 벌려졌다. 입을 떡 벌린 채로 생각했다. 야 이거 좋다, 신기하다, 내가 바야흐로 출세를 했구나, 응?

말이 좋아 못자리 현장이지, 그곳은 하나의 작은 공장이었다. 공장도 이동식 공장이었다. 답답하게 사방이 꽉 막힌 창고 같은 공장이 아니었다. 사방 도처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된 폐쇄형 공장도 아니었다. 마치 태고 적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하늘과 땅 사이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주 특이한 예술 같은 공장이었다.




# 못판을 모아서 이불을 덮어주고



거북이 등딱지처럼 쩍쩍 갈라진 논바닥에 컨베이어벨트가 장착된 못자리 전용 기계가 설치되어 있었고, 기계를 중심으로 사람이 하나, 둘, 셋, 다섯, 열, 열둘, 열세 명이나 배치되어 무엇이든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손놀림 하나하나, 발걸음 하나하나에는 초조함이나 쫓김 같은 강박관념과는 전혀 무관한 느림과 여유가 있어 보였다.

컨베이어벨트는 대체로 인간의 노동력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게 하는 특징을 갖고 있고, 그래서 사람은 일단 컨베이어벨트 앞에 배치되면 해찰 한 번 할 틈이 없는, 그야말로 눈 코 뜰 새 없는 기계보다 더한 기계가 되어야만 하기에 악명이 아주 높은 것이었지만, 못자리 현장에서의 컨베이어벨트는 그 목적이 다르고, 개념도 다르기에 착취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작동되고 있었다.

예전의 모판은 손으로 볍씨를 뿌렸다. 손으로 뿌리다 보니 볍씨가 많이 떨어지기도 하고 적게 떨어지기도 했다. 그야말로 제멋대로여서, 모판 몇 개로 몇 마지기의 논에 모내기를 할 수 있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버려지는 볍씨의 양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컨베이어벨트식 기계로 모판을 짜면서부터 버려지는 볍씨의 양은 대폭 줄었고, 거의 완벽한 예측 또한 가능해졌다. 예측 가능한 미래가 도래했다고나 할까.

게다가 못자리 현장에서의 컨베이어벨트는 일하는 사람의 노동력을 극한까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느릿느릿, 쉬엄쉬엄 해야 제대로 된다는 메시지를 끝없이 주고 있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일하는 사람의 숫자를 줄이는 게 아니라 늘리는, 늘려야만 상황을 연출하는 관리자의 역할까지 컨베이어벨트는 수행하고 있다는 느낌이어서, 아 참 여기가 바로 상생의 현장이로구나, 하는 소리가 내 입에서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 완성된 못판은 한자리에



한 사람이 작년에 쓰고 보관해둔 모판의 묶음을 풀어서 옆 사람에게 전해주면, 옆 사람은 그것을 컨베이어벨트가 싣고 가기에 좋도록 정리해준다. 그러면 컨베이어벨트가 그것을 싣고 물처럼 흘러가면서 흙이 있는 곳에서는 흙을 받고, 물이 떨어지는 곳에서는 물을 받고, 볍씨가 흘러내리는 곳에서는 또한 볍씨를 받아서, 마지막으로 거름이 흘러내리는 곳에 이르러 거름을 받은 다음,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모판을 넘겨주는 것이다.

완성된 모판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것을 두 개씩 짝을 지어서 운반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에게 넘겨준다. 운반의 임무를 맡은 사람은 그것을 들고 백여 미터 저쪽까지 가서 가지런히 놓아야 하기 때문에, 한 사람으로는 안 되고 서너 명이 릴레이식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그 거리가 점차 좁혀지기 때문에, 나중에는 한 사람이 해도 충분할 정도가 되고,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여기서 잠깐, 저기서 잠깐 하는 식으로 다른 분야의 일을 돕기도 하고,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는 그런 여유만만한 상황이 연출되는 거였다.

우리의 대통령께서 그토록 강조하시는 창조경제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응용한다면 낭비요소도 줄이면서 일자리를 늘리기도 하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이중으로 이익일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내가 보기에 그날의 못자리 현장은 굳이 내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나를 불렀다. 왜? 사람을 일에 치여 허덕거리는 기계로 만들지는 말자는 주인의 배려가 없이는 아마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터이다.

그리하여 나는, 없어도 되는 일꾼으로서의 나는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오는 모판에 흙을 뿌려주는 자리에 배치되었다. 물론 손으로 직접 흙을 뿌리는 작업은 아니고, 기계가 알아서 적절하게 뿌려줄 수 있도록 삽으로 흙을 퍼서 통 안에 넣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흙이라는 것이 또한 나를 감동시켜 주는 것이어서, 나는 일을 하면서도 일을 하는 것 같지가 않은, 무슨 건강 관련 체험이거나 예술 작품 감상 현장에라도 와 있는 느낌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고창의 명물 황토



“야아, 이 흙 색깔 좀 봐라. 이게 어디 흙이냐, 보물이지.”

나도 모르게 터지는 이런 감탄사와 함께 손으로 가득 흙을 퍼서 들고 들여다보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왜 아니겠는가. 흙이 그냥 흙이 아니라 황토인 것을, 작은 스푼으로 한 개 떠올린 만큼의 양에도 수억 마리의 미생물이 있다고 하는, 색깔이 고와서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줄 뿐만 아니라 냄새마저 향긋하게 느껴지는 황토인 것을 말이다.

고창은 명물이 많기도 하지만 특히 황토를 빼놓을 수 없다. 내가 보기엔 황토를 능가하는 고창의 명물 혹은 명품은 글쎄, 뭐를 손에 꼽아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선운사의 동백? 풍천장어? 복분자? 청보리밭? 고인돌? 단언컨대 이 모든 것들을 합해도 황토만은 못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밭갈이를 해놓은 뒤의 황토색 들판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아, 소리가 터진다. 자동차를 타고 그 옆을 지날 때는 멈춰서 한참을 서 있게 되기도 한다. 서 있다 보면 내려서 한 움큼 가득 쥐어보고 싶어진다. 실제로 한 움큼 쥐어보고 난 뒤에는 아무 생각도 없이 코로 가져가서 심호흡을 하게 되고, 심호흡을 하고 난 뒤에는 뭔가 알 수는 없어도 살아 있다는 느낌은 팍팍 드는 냄새에 취해서 그만 혀를 내밀고 마치 설탕이라도 먹어 보듯이 맛을 보게 되는 것, 그것이 황토의 매력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런 매력만점의 황토를 굳이 퍼다가 못자리를 만들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못자리를 지금과는 달리 논바닥에 직접 하던 내 어렸던 시절에도 못자리 현장에 황토는 늘 있었다. 논바닥은 황토가 아닌 진흙인 까닭에, 쟁기질과 삽질 그리고 나무판으로 밀어서 곱게 정리를 한 모종판에 볍씨를 뿌린 다음 그 위에 황토를 솔솔 뿌리곤 했었다.



# 황토는 이렇게 콧판으로 흘러가고



요즘은 사람 손이 아닌 기계로 모내기를 하는 까닭에 모판이 따로 있어야 하는데 그 모판을 채우는 흙이 모두 황토다. 물론 떡가루처럼 곱게 빻아서 채로 친 것이라야 한다. 그래서 모판용 황토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이 계절에는 아마 제일로 바쁠 것이다.

“아이고, 오늘은 또 몇 놈이나 죽어서 나왔을꼬.”

모판을 정리해서 가지런하게 컨베이어벨트에 올려놓는 임무를 맡은 아주머니께서 갑자기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 옆에서 흙을 퍼 올리고 있던 중인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매력 만점인 황토 냄새에 취해서 이것도 저것도 아무것도 의식을 못하고 있었던 까닭에 놀라움은 저 깊은 영혼에까지 스며들었다는 느낌이었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아주머니의 그 탄식은 뭐랄까, 어제 밤에나 오늘 이른 아침쯤에 집안의 누군가가 유명을 달리한 것 같은 느낌을 내게 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의 못자리 현장은 그지없이 조용했다. 사람이 열다섯 명이나 한 자리에 모여 있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저마다 각자 맡은 바 임무나 천천히, 싸목싸목 수행하고 있을 뿐 누구 한 사람 자발스레 떠들어대는 사람이 없었고, 말을 한다 해도 한두 마디로 끝나버릴 뿐 사람이 열다섯 명이나 모인 자리에서 능히 있음직한 시끌벅적함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심지어는 주인마저도 무엇에 정신을 빼앗겨버렸는지 막걸리 한 잔 준비를 못해놓고 있었고, 점심때가 다 돼서야 “어매 큰일났네, 내 정신 좀 보소, 먹을 것이 한 개도 없었네 잉?”하고 있었다.







보름 가까이나 그놈의 뉴스를 보고, 또 보고 하면서 절로 터지는 탄식을 내뿜고, 또 내뿜고 하는 동안 심신이 온통 두려움에 절어버렸다고나 할까. 그래서 이제는 얘기를 하고 싶지도 않고, 침묵으로, 오직 침묵으로만 이웃 사람들의 눈을 보며 “당신도 그 생각을 하고 있구나, 나도 그래” 하는 정도의 대화만을 나누는 참으로 가슴 터지는 문화가 어느새 형성돼 가고 있었다.

사람을 이토록 거대한 공황 속으로 몰아넣은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서 빨리 세월호라는 단어 자체를 지워 없애고 싶어 하겠지만, 이 나라 대한민국 국민의 특징이라고 하는 이른바 냄비 기질이 어서 빨리 발동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소리가 우렁차게 터질 수 있기를 바라는 한편 그렇게 되도록 하는 무엇인가 공작을 벌써부터 열심히 꾸미고 있겠지만, 그렇지만 이 구덩이는 너무 크고 너무 깊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해야만 한다. 지옥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놈들이라고.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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