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진의 문화 뒷마당> 영화 ‘역린’ 그 앞과 뒤



영화 담당 기자로 활동해온 지 대략 8년 정도 된 것 같다. 사실 영화 담당 기자들은 일반 대중보다 영화를 먼저 본 뒤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만 하면 된다. ‘이 영화는 이런 점이 재미있다’ 정도만 서술하고 나머지 판단은 오롯이 관객들에게 맡겨두면 그 뿐이다. 영화란 매체 자체가 정답이 없는 순수 창작물이기에 그 판단은 ‘흥행’이란 잣대로 평가하면 그뿐이다. 그렇다고 흥행에 실패한 영화가 ‘망작’이라고 부를 수도, 또 반대로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수작 혹은 걸작이라 부르는 것도 맞지는 않다. 영화는 참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했지만 결국 그 어려운 영화판을 떠나 글쟁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영화 한 편에 대해 좀 주절거려 볼까 한다. 이름만 대면 여성팬들이 괴성을 지르고 달려들 현빈 주연의 ‘역린’이다. 왜 현빈이 이렇게 인기가 높은지는 남성팬으로선 사실 인정하기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뭐 잘생겼다고 하는데 그 얼굴이 잘생겼다고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ㅎㅎ. 그보다 쬐금 덜생긴 남자의 시샘이니 이만 넘어가자. ‘역린’이 지난 달 30일 개봉 후 줄곧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언론 시사회 후 이 영화에는 문자 그대로 혹평을 넘어서 사실상 최악의 평가만이 쏟아졌다. 평가의 주된 내용은 대략 이렇다. ‘완성도가 떨어진다’, ‘현빈의 분량이 너무 적다’, ‘엉뚱한 인물들의 얘기가 많다’, ‘사족이 너무 많다’ 등등.







사실 ‘역린’에 대한 이런 평가는 개인적으론 착각에서 오는 오판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감시자들’을 보면 황반장(설경구)이 이런 말을 한다. ‘부주의 맹시,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라고. ‘역린’에 대한 평단(기자와 평론가)의 혹평은 일종의 ‘부주의 맹시’가 아닌가 싶다.

가장 큰 이유를 들어보자면 ‘역린’은 사극이다. 조선 27대 국왕 중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산 제22대 왕 정조가 실제로 겪은 ‘정유역변’이란 사건을 모티브로, ‘역변’이 일어나기 24시간 전부터 사건이 벌어진 순간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얘기를 그린다. 24시간이란 정해진 시간 속에서 정조를 죽이기 위해 벌어진 일들이 포인트다.

‘역린’은 태생적으로 두 가지 약점을 지니고 있다. ‘시간이 한정돼 있다’는 것은 사극엔 어울리지 않는 핸디캡이다. 사극은 장르적으로 서사의 구조가 어울린다. 대규모 물량 공세가 필수인 사극은 일종의 장황한 설명, 혹은 비주얼적 스케일이 뒤따라야 한다.(물론 1995년 개봉한 박종원 감독의 ‘영원한 제국’ 같은 수작도 있다) 시간이 한정돼있으면 필연적으로 등장인물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스토리가 퍼져나갈 시간적 공간이 제한돼있기에 그것을 소화시킬 인물이 늘어나야만 한다. 하지만 인물이 늘어나면 결국 스토리의 집중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역린’을 불편하게 보는 시각이 불편한 이유는 영화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인물이 너무 많다는 지적을 보자. 135분이란 결코 짧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십여명이 넘는 배역이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각 인물에 대한 포커스가 상당히 정교하게 배분돼있다. 우리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한 정조의 분량이 많지 않은 것도 흥미롭다. 오히려 상책(정재영)과 살수(조정석)에 대한 얘기가 더 많은 것으로 보일 정도다. 이유는 이렇게 설명해 보겠다. ‘역린’은 정조에 대한 얘기가 절대 아니다. 앞서 설명한 ‘정유역변’이 일어나기 전 24시간 동안 벌어진 일들을 보여 주기 위한 과정의 영화다. 개인적으로 영화는 두 가지 정도로 분류가 된다고 본다. 인물 위주로 흘러가는 ‘캐릭터 영화’, 상황이 사건을 만들어 내는 ‘과정의 영화’. ‘역린’은 정확하게 후자에 포커싱돼있다. 그 상황을 시간 별로 쪼갰다. 각각의 플롯이 하나의 스토리를 가진다는 의미다. 개별 플롯 자체가 하나의 스토리 묶음이기에 인물이 필연적으로 많아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이렇다. 정조의 목에 칼이 겨눠지기까지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결론(정조의 목에 칼이 겨눠지는)에 필요한 이유들을 하나씩 만들어간다. 그 이유들에는 이유를 만들어내는 인물들이 필요하다. 결국 그 인물들이 ‘역린’의 결론을 만들기 위한 과정을 하나씩 설명하게 되고, 그 설명이 모여서 ‘역린’의 결말이 구성되는 것이다. 글쎄 말이 좀 어려웠나. ‘역린’의 마지막 장면을 본 뒤 영화를 거꾸로 돌리면서 스토리를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럼 왜 ‘역린’에 수많은 등장인물이 필요했는지를 알게 된다. 만약 등장인물의 포커싱을 분산시키지 않고 정조에게 집중시켰다면 ‘역린’은 완벽한 픽션이 되고 만다. 당시 시대상과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개혁적 정책을 주도한 독선적인 군주를 끌어 내리기 위한 시대적 혁명으로 ‘정유역변’은 뒤바뀐다. 실제 실록에도 기록된 ‘정유역변’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이 ‘팩트’와 결합되기 위해선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는 말이다.

두 번째가 바로 ‘24시간’이란 시간적 제한이다. ‘정유역변’은 시대적 어그러짐에 대한 필연적 부산물이었다. 당시는 조선시대 500년 역사상 가장 당파 격론이 심했던 시기다. ‘정유역변’은 남인에서 분파된 노론과 소론의 당론 싸움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은 다시 시파와 벽파로 분리돼 엄청난 당리 싸움을 벌였고, 이는 곧 ‘역린’의 핵심인 ‘정유역변’이란 조선 500년 역사 초유의 사태로 불거졌다. 왕의 침전인 존현각에 칼을 든 자객이 침입한 이 사건을 계기로 ‘정조’의 개혁 정책은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또한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노론 세력이 일거에 제거된다. 당시 노론의 영수인 정순왕후 세력이 한 순간에 제거되고, 홍국영을 태두로 한 개혁파가 조선시대에선 힘든 여러 파격적인 정책을 쏟아냈다.

‘역린’은 사실 영화로 옮기기에는 앞뒤 맥락에 대한 서사가 너무 길다. 안방극장용 20부작 30부작 혹은 50부작 이상의 대하사극에나 어울릴 법한 소재다. 하지만 스크린으로 이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시간적 제한이 이뤄져야 했을 것이다. 앞뒤 서사에 대한 축약이 필수였다. 잘려나간 앞뒤 맥락은 관객들에게 맡겨둔 채 24시간이란 시간 속에서 벌어진 ‘이유’에만 집중했다. 결국 그 이유는 상황이 수반돼야 하고, 그 상황을 만들기 위해선 인물이 필요했으며, 왕을 암살하기 위한 복잡다단한 상황은 결과론적으로 수많은 등장인물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던 것이다.

‘역린’이 24시간이란 시간적 제한 속에서 정조의 인간적 고뇌와 ‘정유역변’을 막아 낸 기지가 높은 왕으로 그려내야 했다면 시작부터 어불성설인 영화가 됐어야 맞다. 지금의 결과물이 ‘역린’으로선 최선의 선택인 것이고, 정답이 되는 것이다.

가장 마지막 장면 정조가 정순왕후(한지민)의 손을 잡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쏟아내는 시퀀스가 있다. ‘역린’은 용의 턱밑에 거슬러 난 비늘이다. 다시 말해 이 비늘을 건드리면 용이 크게 노한다는 전설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분노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영화 속에서 정조의 친모인 혜경궁 홍씨가 말한다. “너희들은 내 아들을 모른다”고.
‘역린’, 역사적 배경과 사실 그리고 제목의 뜻을 되새기면서 음미해 볼 영화다. 그럼 이 영화의 진짜 숨은 맛을 아주 세밀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상반기 한국영화계를 장식할 분명한 수작이다.  

<김범진 님은 언론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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