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마술처럼, 그녀가 내 곁으로 왔다(22)








딸기 꽃이 피려고 봉오리를 맺을 무렵에 길을 나섰던 내여자 그녀가 돌아왔다. 두 달여 만에 돌아온 그녀를 바알갛게 익어가는 딸기가 맞이해 주었다고 한다면 감상일까. 감상이거나 말거나 그런 형국이 돼 있는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과일 중에서 특히 딸기를 좋아하는 그녀,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홀로 되어버린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서, 혹은 극도의 상실감에 빠진 어머니가 어느 한순간 무슨 안 좋은 생각을 하실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기 위해 버스를 타고 떠나던 날부터 나는 그 즈음 꽃을 마구 피워내는 딸기에게 사정을 하다시피 해 왔었다. 그녀가 오기 전에 익어버리지는 말라고, 나도 딸기를 안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녀가 온 뒤에나 익어달라고, 봄 가뭄에 아침마다 물을 주어 가면서 기도를 하다시피 해 온 나로서는 그녀가 돌아오기 직전 날부터 딸기가 익어가기 시작했으니, 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많이 지쳐 있었다. 의욕도 없어 보였다. 버스에서 내릴 때는 항상 토끼처럼 율동적으로 달려와서 팔짱을 끼곤 하던 그녀가 이제는 팔짱이고 뭐고 다 귀찮다는 투로 힐끗 한 번 내 얼굴이나 쳐다보고, 안간힘을 다해 미소나 한 번 살짝 지어보였을 뿐이었다. 걸을 때는 항상 두 다리에 무슨 엔진이라도 장착해 놓은 것처럼 통통거리는 느낌을 주던 걸음걸이도 이젠 힘이 쏙 빠져 있었다. 

하필 트럭에 치여 비명횡사를 당하신 아버지는 저기 어디 멀고도 먼 그곳에서 막내 딸내미의 힘이 쏙 빠져버린 슬픈 걸음걸이를 내려다보고 계실까. 만약에 그렇다면, 하룻밤 새에 남편을 잃어버린 아내의 깊은 슬픔 또한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다. 한 달을 사귄 연인 간에도 헤어질 때 이별의 인사 한 마디쯤은 주고받는 것이거늘, 적어도 사십 년 이상 육십 년 가까운 세월을 가족으로, 식구로 함께 살아온 관계에서 간다는 인사 한 마디도 없이 헤어지고 말았는데 어찌 쉽게 눈을 감을 수 있으랴. 

아버지를 잃어버린 막내 딸내미의 슬픔과, 남편을 빼앗겨버린 아내의 슬픔을 놓고 경중을 따져본다는 발상 자체가 무례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해량해 보기로 한다면, 아무래도 딸내미의 슬픔보다는 아내의 슬픔이 훨씬 크고 막막하게 비쳐질 것 같다. 딸내미는 미운정보다 고운정이 월등 많기도 하고, 그 햇수도 사십여 년이지만, 아내는 고운정에 미운정까지 정교하게 섞여진 데다가 그 햇수도 오십 년을 너머 육십여 년 가까이나 되고 보니 슬픔이란 단어조차도 거의 무의미한 어떤 경지에까지 도달해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그런 철없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문득 오래 전에 본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제목이 ‘사랑과 영혼’이었던가. 남자가 작별의 인사는커녕 일반적인 죽음의 과정도 없이 홀연 떠나버렸다. 죽고 싶어서 죽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인사도 없이 떠난 상황이 되어버린 남자는 여자의 안위가 궁금하고, 걱정되고, 애달파서 눈을 감을 수가 없다. 그래서 구천을 떠도는 혼백의 형식으로 여자를 지켜보는데, 사랑하는 남자를 졸지에 잃어버린 뒤의 아득한 슬픔으로 괴로워하는 여자는 남자가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른 채 그저 괴로워하기만 한다.

산다는 게 괴로움이 되어버린 여자를 지켜보던 남자는 손을 내밀어 어루만지고 쓰다듬기도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랑한다고 속삭여 보기도 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손길을 느끼지도 못하고, 그 말을 듣지도 못한 채 그저 괴로워하기만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남자의 고통은 배가 되고, 애달픔 또한 배가 된다. 상황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혼자서 외롭고 괴롭다고 해도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그러니 너무 외로워 말고 괴로워도 말라는 메시지가 함뿍 담겨 있는 이런 영화를 생각하고 있노라니 불현듯 또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음주 운전자의 차량에 비명횡사를 당하신 아버지께서 어쩌면 나를 지켜보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그리하여 이런 말씀을 하시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너는 이놈아. 너는 누구냐. 나한테 인사 한 번도 안 왔었고, 응? 내가 그다지도 사랑하는 내 막내딸과 더불어 지금 무엇 하는 것이냐. 그냥 동거하는 것이냐? 결혼식도 안올리고? 아이고, 이놈들이 정말로, 정말로.

두 달여 만에 돌아오는 그녀를 데리러 광주 버스 터미널에 마중을 나갔던 그날, 그녀는 거의 아무 말이 없었다. 예전에는 그렇게도 자주 보던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무연히,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는 표정으로 차창 밖이나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 마디 했다.

 “형부가 안부 전해달래요.”
 “응?”
 “형부가 그대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그리고 다시 침묵 모드로 들어간 그녀의 표정을 나는 훔쳐보고 있었다. 광주에서 고창까지 사십여 분 동안 우리가 나눈 대화다운 대화는 그것이 전부였다. 그 밖의 대화란 침묵이 너무 어색하게 무거워서 주마간산 격으로 그저 한 마디씩 별 뜻도 없이 내놓은 말들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에는 운전을 하면서도 내 얼굴이 자주 그녀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날은 간간이 훔쳐보고나 있을 뿐 거의 한 번도 얼굴이 그녀 쪽으로 돌아가지를 않았다. 눈을 함부로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은, 말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강력한 어떤 위엄 같은 것이 그녀에게 생겨 있었다.

집에 도착한 뒤로 그녀는 잠을 자기 시작했다. 자고, 또 잤다. 아침에도 자고, 저녁에도 자고, 낮에도 잤다. 사흘을 내리 그렇게 잠만 자던 그녀가 눈빛을 초롱하게 빛내며 주변 사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딸기 얘기를 듣고서였다.

 “딸기가 막 익어 가는데, 주인이 왔다고 반가워서 환영하는 것 같은데, 안 먹어볼래? 좀 먹어보지.”
 “응? 딸기? 정말?”

그날부터 그녀는 딸기를 따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그래봐야 하루 삼십여 분 남짓이기는 했다. 집에 있는 딸기가 기껏 오십여 포기 남짓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열매만 따기로 하자면 아마 오 분도 채 안 걸릴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익은 열매만 거둬들이는 게 아니었다. 앞으로 익어갈 열매의 자리를 잡아주는 일에 그녀는 이십 분 이상 시간을 쓰고 있었다. 익어가는 딸기 옆으로 개미들이 꼬이니까, 개미가 쉽게 넘보지 못하게끔 돌멩이나 이파리를 활용해서 열매가 햇빛을 정면으로 볼 수 있게 일종의 지지대를 만들어주는 것인데 그 모습이 그렇게도 집중적이고 몰입적일 수가 없었다.

무성한 수풀 사이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손을 천천히 놀리고 있는 그녀의 그런 모습은 뭐랄까, 지금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이것뿐이라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세상 어떤 사람이든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붙이면 그대로 쓰러져서 칵 죽어버릴 테니까 건들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온 몸을 통해 발산하는 것 같기도 하고, 멀리서 보고 있노라면 그냥 아슬아슬하기만 해서 내 숨이 컥컥 막히는 것이었다.







슬픔도 때로는 힘이 된다고 하지만, 그녀를 장악하고 있는 슬픔은 힘이 될 수도 있는 그런 평상의 슬픔이 아니었다. 슬픔이 너무 무겁거나, 억울하면 힘이 되기는커녕 무기력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그녀는 자신의 온 몸을 통해 증언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연로한 아버지가 정신 나간 음주 운전자의 차량에 치여 돌아가셨는데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슬픔만큼 지독한 슬픔이 또 있을까. 게다가 운전자는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피해 가족이 무조건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줘야지 안 그러면 자신이 감옥을 가는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식의 황당무계한 논리를 개발해서 여기저기 마구 뿌리고 다닌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궤변 앞에서 정신이 온전하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었다.

앞뒤좌우 분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뒤죽박죽 섞여버린 우리 사회의 도덕적 현주소는 도대체 어디인가. 어떤 사람은 한나라당이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면서 빨간 옷을 선택했을 때, 그때 이미 다 함께 죽거나 혹은 망하자는 묵계가 형성되었다고, 그래서 거짓말도 잘하고 도둑질도 잘하는 사람은 착하고, 그것도 못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기록되는 새로운 사회가 열렸다는 식의 우스개를 진지하게 늘어놓기도 하지만, 그런 자학적인 얘기 말고 희망의 씨앗을 찾아볼 수는 없는 것인가.

세월호 참사로 촉발된 케이비에스 사태와 안대희 현상을 보고 있노라면 절망과 희망의 뿌리를 동시에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 우리 사회의 부패를 이른바 발본색원해 보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의기양양하게 나섰다가 사흘도 안 돼 꼬리를 내린 안대희씨는 자기 자신이 바로 그 척결의 대상이었음을 처음부터 모르고 있었을까? 아니면 대통령의 낙점을 받았으니까 국민 따위야 적당한 잔머리 굴리기로 속여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을까? 그리하여 우리는 그에게 ‘잔머리 굴리기의 대왕’이라는 별칭이나 하나 붙여주는 선에서 끝내야 하는 것일까?

 “어머, 케이비에스 새노조 말고 기성노조도 파업찬성이 팔십 퍼센트를 넘었네?”
그녀는 갑자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 손석희씨가 진행하는 아홉시 뉴스라인을 인터넷으로 호출해서 보던 중이었다. 이 또한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우리가 언제 종편 채널을 굳이 인터넷으로 호출해서까지 시청해준 일이 있었던가.

그랬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손석희의 방송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저녁 아홉 시 즈음이면 컴퓨터를 켜고 앉아 침을 삼키는 습관이 생겨 있었다. 작년에는 그렇게도 신나게 좋아했던 고사리 꺾기 산행에도 금년에는 관심이 없다고, 싫다고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그녀가 손석희의 뉴스라인 시간만 되면 컴퓨터를 켜놓고 나를 불렀다.
 “시간 됐어요.”







확실히 손석희 뉴스에는 새로운 어떤 것이 있었다. 과거 MBC 시절에도 볼 수 없었던 어떤 것이 손석희의 표정에 새로 생겨 있었다. 세월호 참사가 그에게 새로운 어떤 길을 제시해준 것인지 여부는 단언할 수 없지만, 그가 온 몸으로 보여주는 진실성과 진정성을 보고 있노라면 그 어떤 거짓말쟁이도, 그 어떤 살인강도도, 그 어떤 파렴치한도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항복, 항복, 소리를 토해낼 것만 같은 소박한 위엄이 손석희 뉴스에는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생각하면 슬프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제도와 관행의 뒤받침이 없는, 손석희라는 인명 하나가 브랜드가 되어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이것이 희망이다, 그나마 희망이야, 하고 중얼거리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으니, 아,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도대체 이 사람의 목숨은 왜 이렇게도 중요한 거지?”
어느 하루 내여자 그녀는 손석희 뉴스를 보다 말고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국내 최고의 부자라고 알려진, 자신의 부를 아들에게 교묘한 방식으로 넘겨준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 노조를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악명이 자자하기도 한 대기업 회장의 의식불명에 관한 뉴스를 보던 중이었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서 중얼거리는 그녀의 표정을 나는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대기업 회장, 그의 목숨이 중요하다기보다 그의 생사 여부가 수많은 기업인과 그 부속 인물들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시간 단위로 보도를 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얘기를 내 입으로 굳이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또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이 세상 그 어떤 사람과 마찬가지로 일인분의 목숨을 갖고 태어났지만, 현재 진행 상태로 보자면 그의 목숨은 일인분이 아니라 천인분 아니 만인분 쯤의 것은 되겠다는 생각.

어쨌든 손석희 뉴스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손석희 뉴스가 있기에 분노는 분노에 머물지 않고 슬픔과 함께 일어나는 위로의 차원으로 승화된다. 그래도 아직은 살아볼 만하다는, 살아볼 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면 먼지 한 톨 만큼의 힘이라도 보태겠다는 생각을, 하다못해 투표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투표 하나라도 제대로 하자는 얘기를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마구 떠들어대고 싶다는 생각을, 의욕을 손석희는 불러일으킨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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