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마술처럼, 그녀가 내 곁으로 왔다(24)







지난 3월과 4월은 내 개인적으로 단언컨대 지옥의 날들이었다. 그녀와의 동거 일 년, 아니 일 년 도 채 안 됐건만 그녀의 자리는 크고 넓고 무겁기만 했다.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어버린 그녀가 어머니의 곁으로 떠나야만 했던, 그래서 떠나던 그날 하늘은 푸르게 맑기만 했다. 비라도 왔으면 좋으련만, 비를 핑계로 눈물이나 실컷 흘려보게, 이런 감상적인 문장 위주의 일기를 쓰고 있던 어느 날 매화가 화봉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날마다, 그리고 또 날마다, 날마다 피어나는 매화를 들여다보았다. 쪼그리고 앉아서도 보고 우두커니 서서도 보고 걸으면서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상하다고, 희한하다고 날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홍매는 설중매라는 별칭도 있듯이 아직은 매섭게 추운 2월에 피는 꽃이었다. 그런 홍매가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도 안 돼 있는 상태에서 백매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청매가 꽃망울을 열었다. 그제야 어마 내 정신 좀 봐, 하는 듯이 홍매가 서둘러 피어났다.

이게 뭐냐. 왜 이렇게 뒤죽박죽 순서가 엉망이 돼버린 거야?
섬망증 환자처럼 잇달아 중얼거리면서도 나는 매화에 취해 들어갔다. 그 단아한 모양새와, 요란하지 않게 아련한 그 향기에 빠져 있노라면 내가 마치 고고한 무슨 현자라도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은 비현실적으로 흘러갔다. 마당에서는 가끔 뻐꾸기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뻐꾸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어,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매화나무에는 매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그토록 단아하게 화사한 색감으로 나를 위로해주던 매화꽃이 어느새 매실로 변해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녀가 돌아온 뒤에야 알았다. 그날 마당의 연못에서 목욕 중인 뻐꾸기 부부를 보았다.
“이것을 딸까? 그대로 둘까? 금년에는 아무 것도 하기 싫은데.”

매실을 따서 매실청을 담글까, 말까 하는 문제로 며칠이나 고민을 했다. 나무에 열린 채 그대로 두고 싶기도 하고, 따고 싶기도 하고, 내 마음을 나도 알 수가 없었다. 나의 그런 소심한 고민과는 달리, 그녀는 고민할 이유가 도대체 뭐냐는 투로 단호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따요. 따.”

그녀의 그 말을 듣고도 나는 선뜻 매화나무 앞으로 달려들지를 못했다. 어느 하루 밖에 나갔다 돌아오니 그녀가 혼자서 매실을 한 자루나 따놓고 있었다. 매실을 따다가 가시에 찔렸다고, 피가 이만큼이나 나왔다고, 가시에 찔린 자국을 보여주며 우는 소리를 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결국 마음을 굳혔다.
“그래, 따자.”

이렇게 해서 우리의 매실 따기는 시작되었다. 예년 같으면 한나절 만에 뚝딱 해치우고 말았겠지만, 금년에는 무려 사흘이 걸렸다. 한꺼번에 하려고 덤비지는 말자. 쉬엄쉬엄, 싸목싸목, 노동을 노동이 아니라 놀이로 여기고 즐길 수 있는 일을 하자, 해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었다.

확실히 그 일은 제법 즐거웠다. 간짓대를 휘두르면 매실 떨어지는 소리가 투둑투둑 제법 상쾌하게 들렸다. 열매 중에 돌처럼 단단한 것을 고르기로 하자면 아마 매실을 첫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단단한 녀석들이 가끔 머리통을 때리기도 하고, 이마를 때리기도 하는데 아얏, 소리를 내면서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녀는 떨어지는 매실에 입술을 얻어맞고 입술이 꽈리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아프다고 잉잉, 소리를 내면서도 절로 터지는 웃음을 감추지는 못하고 있었다.
열매는 멀쩡한 것이 거의 없었다. 세월호 참사 뒤로 유별나게 불어댄 강풍이 나무를 정신없이 흔들어댄 탓이었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나무에서 열매는 속속 떨어져 내렸다. 떨어지지 않고 남은 열매들은 매화나무 특유의 날카로운 가시에 긁히거나 찔려서 상처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자기 몸을 자기가 찔렀다기보다는, 자기 자식을 가시로 마구 찔러댄 형국이었다.

“여기 와서 처음 알았어요.”
“뭘?”
“전라도에서는 별별 것들을 다 효소로 만든다는 것을요.”
“아, 그래? 나도 처음 듣는 말인데?”
“우리 고향에서는 매실밖에 모르거든요. 다른 열매나 뿌리를 설탕에 절였다가 거르는 장면을 본 적이 없어요.”
고향이라는 단어 앞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잠겨들고 있었다. 하긴 그 단어 앞에서 마음이 축축해지지 않는 사람 몇이나 있으랴.
“우리 고향은 너무 슬퍼요.”
“슬프다니?”
“너무 슬퍼서, 어떤 때는 칵 때려주고 싶기도 해요.”







그녀는 이제 열두서너 살쯤의 소녀 같았다. 고향이 슬퍼서 때려주고 싶기도 하다는, 감상에 젖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아마 뭔가를 각오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흐느껴 울 수도 있다는, 그때 내가 해야 할 행동이나 혹은 위로의 말에 대해서, 구체적인 무슨 연구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해도, 최소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준비하는 자세를 취하고는 있었을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이 너무 많거든요. 그것도 하나같이 목을 매서.”

기어이 그 말이 나왔다. 인류 최대의 주제라고나 해야 할 자살. 바로 아래 막내 동생이 목을 매고 떠나버리는 바람에 막내가 되고 만 그녀의 자살을 언급하는 목소리에는 진한 애달픔이 묻어 있었다.
약을 먹는다거나, 물속으로 뛰어든다거나, 자해를 하는 등의 방식과는 달리, 목을 매는 방식의 자살은 굉장히 단호하고 일방적이어서 되돌림의 여지가 거의 없기 마련이었다. 자살을 결행한 본인도 최후의 일각에서 생각을 설령 고쳐먹었다 해도 취소할 방법이 없고, 살아 있는 사람 또한 삼사 분 내에 현장을 발견하지 않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 시신을 수습하는 것뿐이다. 그런 식의 단호한 자살을 감행하는 사람이 자기 고향에는 유난히 많다고, 그녀는 애달프게 잠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분석을 하자면 전국 평균보다 아마 훨씬 그 수치가 높을 걸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고, 그래서 답답하고 슬프다는 얘기를 그녀는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한 말하기를, 그녀 자신도 한때 자살의 유혹을 받은 적이 있었었다고 했다. 여고 시절의 어느 하루, 엄청나게 속상한 일이 있어서 깊은 밤에 혼자서 바닷가로 바람을 쐬러 나갔더란다.

그때 커다란 파도가 밀려오는데 그 모습이 흡사 여자의 하얀 속치마 같았다고, 여자가 속치마를 나풀, 나풀거리면서 이리 와, 이리 와, 하고 속삭이더라는 것이었다. 그 속삭임 앞에서 그녀는 “야, 나는 여자거든.” 그렇게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주고는 돌아서서 뛰었다고, 그렇게 자살의 유혹을 물리치고 서울로 갔었다고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울로 갔었던 그녀가 지금 전라도 촌구석에서 나와 함께 매실을 따고 있다. 단단한 매실에 입술을 얻어맞고 입술이 꽈리처럼 부풀어 올라서 아프다고 잉잉, 소리를 내면서도 얼굴은 웃고 있다. 이 감개무량한 사태 앞에서 나는 다만 가슴이 먹먹할 따름이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죽는 줄을 알면서도 사는 게 사람이라고 했던가. 저 아득한 시절 내 소년기의 어느 날 외할머니로부터 그 말씀을 들었을 때 나는 심히 어리둥절했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게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 것인지 하나도 몰랐던 그 시절에 외할머니의 그 말씀은 모순도 그런 모순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도 그렇게 심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없었다. 도대체가 죽는 줄을 알면서도 산다는 게 뭐란 말인가.

어린 마음에도 외할머니의 그 말씀은 아마 깊은 울림을 주면서 내 가슴에 도장을 찍듯이 아로새겨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 나이 십대를 지나고, 이십대를 지나서 삼십대도 다 건너고 있을 즈음의 어느 하루, 외할머니의 그 말씀이 의식의 지평 위로 시나브로 떠올라 왔다. 철부지 소년 시절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그래서 설익은 김치처럼 아무런 맛도 없이 잠복해 있었던 그 말씀이 삼십여 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숙성되고 발효되어 이것이 이것이다, 하고 외치며 고개를 쳐들어주었던 셈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외할머니의 그 말씀을 마치 내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이라도 되는 듯이 툭하면 입에 올리고 있었다. 그 무슨 답답하고 또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지경의 일을 당한 사람을 만났을 때거나 혹은 애달픈 일에 처한 사람을 만났을 때, 울고 싶어도 눈물조차 말라버린 사람을 만났을 때면 으레 죽는 줄을 알면서도 사는 게 사람이다, 죽는 줄을 알면서도 사는 게 사람이야, 하고 되뇌이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었다.

“뭐어? 아니 무슨 고따우 일이 다 있어?”
매실 따기를 다 끝내던 날 오후 늦게쯤 그녀가 전화기를 손에 든 채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고향의 둘째 언니와 통화 중이었다.
“진짜 창피해서 어떻게 살어? 내 고향이 거기라고 어떻게 말해?”

통화를 다 끝낸 뒤에 흥분한 목소리로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그녀의 얘기에 따르면 지난 번 지방선거 때 유권자 매수 행위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농촌이든 어촌이든 군 단위 작은 선거구는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까닭에 매수가 쉽고, 그래서 선거란 으레 이렇게 한다는 듯이 매번 발견되는 현상이었지만, 그런데 이게 단순한 유권자 매수가 아니라 내용이 좀 복잡했다.

전직 어촌 계장이면서 중형급 어선도 한 척 소유한 선주 한 사람이 군수 출마자로부터 현금 일백만원이 든 봉투를 받았더란다. 선주는 돈 봉투를 그대로 들고 경찰서로 달려가서 신고 절차를 마쳤다. 그런데 신고를 받은 경찰은 정식 수사에 착수하기 전에 먼저 돈 봉투를 건넨 군수 출마자에게 연락을 취했던 모양이었다.

작은 어촌 마을이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사건은 엉뚱하게도 진실게임 양상을 띠고 흘러갔다. 군수 출마자는 선주를 만나 악수를 나눈 것까지는 인정했다. 돈 봉투를 건넨 적은 없고, 선주를 만날 즈음쯤 현금 일백만원이 든 봉투 하나를 분실했다고 주장했다. 분실한 돈 봉투를 선주가 어떻게 주워 들고는 자기가 직접 받은 것이라고 모함한다는 주장이었다.







일반 유권자들은 군수 출마자의 주장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돈 봉투를 받았다고 신고한 선주는 ‘뱃놈’으로 날마다 술이나 마시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인 반면, 군수 출마자는 군수에 출마한 것 자체가 이미 훌륭한 사람이라는 증거이므로 믿어 마땅하다는 논리였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돈 봉투를 받았다고 신고한 선주의 장모님을 찾아가서 당신 사위 나쁜 사람이라고, 못된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고장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등의 폭언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군수 출마자는 군수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니까 무조건 훌륭한 사람이고, 선주는 뱃놈이라 술을 많이 마시니까 나쁜 사람이라는 이런 논리가 어떻게, 응? 어떻게.”

기가 막히고 코도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는 듯이 흥분해서 중얼거리는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우리 고장 고창에서 있었던 군수와 군의회 의장의 스무세 살 계약직 여직원에 대한 성희롱 의혹 사건이 생각났다. 그 사건은 피해자 가족이 비밀리에 현금 삼억을 받았다는 소문만 남긴 채로 유야무야 없었던 일처럼 덮어지고 말았지만, 초기에는 이게 대체 사람 사는 세상인가 싶을 정도로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피해자는 가해자를 무고죄로 고소하는 한편 피해자가 소속된 정당과 중앙 부처를 찾아다니며 진정을 하고, 가해자의 소속정당에서 그를 제명하려고 하자 가해자가 먼저 탈당선언을 하는 등등 그런 복잡한 와중에서 지역민들이 보여준 태도는 그야말로 괄목할 만했다. 피해 여성이 아비도 없이 홀어미 손에서 자랐다느니, 그 어미가 나중에 재혼을 했는데 양부 되는 자가 일정한 직업이 없으니 필경 돈을 뜯어낼 목적으로 군수를 모함하고 있다는 등의 뜬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심지어 어떤 여성단체의 임원은 피해자가 설령 강간을 당했다 해도 우리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기자 인터뷰까지 하고 있었다.

약한 자의 하소연은 그가 진실은 말한다 해도 사람들은 잘 믿어주지 않거나 시큰둥해 하지만, 권력을 가진 자의 말은 그가 설령 거짓말을 한다 해도 사람들은 가능한 한 믿어주려 하는 이런 경향을 필경 노예근성이라고 하는 것일 텐데, 그녀의 고향이나 내 고향이나 이런 문제의 근본 원인은 아무래도 인구가 너무 적고, 그나마도 젊은 사람은 너무너무 희귀하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도시에서 누군가 나들이라도 올라치면 그냥 붙잡고 내려와라, 내려와라, 내려와서 같이 살자, 하는 수밖에.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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