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망하려고 저리도 무더기로 피어났나? 망초꽃!!
나라 망하려고 저리도 무더기로 피어났나? 망초꽃!!
  • 김수복 기자
  • 승인 2014.07.03 14: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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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지금 농촌의 풍경






아침 안개가 지나치게 자욱하면 그날은 불볕이 땅을 익히고 논밭의 작물은 타죽는다. 농촌 살림을 살다 보면 자연계의 변화와 그 조짐이 한눈에 보인다. 딱히 보고자 해서 보이는 것은 아니다. 무슨 엄청난 규모의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고개를 들고 눈을 뜨면, 기억의 수첩을 약간만 뒤적거리며 눈을 뜨고 좌우를 살피면 그냥 보인다.

이것이 있으면 어디엔가 저것이 있기 마련이고, 저것이 왔으니 조만만 그것이 올 것이다 하는 식의 어떤 직관 같은 것이 농촌 살림을 오래 살다 보면 저절로 생긴다고나 할까. 하긴 그래서 어른들은 “기상청을 믿느니 내 무릎을 믿는다”는 말씀을 그렇게도 자신만만하게 내놓으시는 걸 게다.

농촌에서 바라보는 금년의 특징을 들자면 아무래도 불안을 첫손에 꼽아야 할 것 같다. 그 기막힌 세월호 참사로 인한 감정상의 문제만은 아니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 달밤에 체조하듯 잠이 안 와서 밖으로 나오면 그냥 보이는 것이 있다.

여기를 가도 보이고, 저기를 가도 보이는 그것, 그 이름도 수상한 망초 꽃이 논두렁 밭두렁에도 가득 피었고, 무덤가에도 피었고, 사람이 떠나고 없는 빈 집 마당에도 한가득 피어 버렸다. 밤에 보면 무슨 소금이라도 확 뿌려놓은 것 같다. 그래서 <메밀꽃 필 무렵> 같은 소설이 엉뚱하게 생각나기도 하고, 조금은 낭만에 젖어볼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낮에 보는 그것은, 일언이 폐지하고 무섭다는 느낌이 든다. 너무도 빽빽하게 많이 피어 있어서, 다른 모든 식물을 잠식해버리는 것 같아서 일견 끔찍하다는 느낌조차 든다. 이렇게도 많은 망초 꽃이 여기저기 도처를 마치 점령군의 깃발처럼 피어난 시절이 예전에도 있었던가, 내 기억을 열심히 더듬어보지만 잡히지를 않고, 어른들도 생전 처음이라고 고개를 회회 젓는다.

“저것이 망할 놈의 꽃인디 말이여. 저것이 저렇게도 많이 피어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라고 잉? 그런 말이 있었잖여…”







사람들은 시장에서나 거리에서나 만나면 여기저기서 수군거린다. 역사를 아는 사람은 일제가 한국을 집어삼킬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1910년에 망초 꽃이 온 나라를 뒤덮듯이 피어났었다는 얘기를 전하기도 한다. 나라가 망한다. 나라가 망해? 계절이 봄을 지나 여름으로 본격 진입하면서 나라가 망한다는 이런 흉흉한 민심은 이제 상식이 되어버렸다.

이런 불안한 정서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어느 하루 문득 만연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사람의 삶에는 물이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고, 농촌의 살림이란 하나에서 열까지 온통 물과 직결이 되는 것인데 금년에는 매우 일찍부터 물이 없었다. 비가 없으니 목이 말랐고 길가에는 흙먼지가 자욱했다.

작년과 비교해서 확연하게 달라진 현상을 들자면 마른번개와 돌풍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6월 초에 거대한 돌풍이 지붕을 날려 버리고 천둥소리가 고막이라도 터뜨릴 듯이 요란했던 적이 예년에도 있었던가? 단언컨대 내 기억으로는 그런 사례가 없었다. 그런 희귀한 사례가 금년에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찾아왔다. 한 번은 밤 열두 시 즈음이었고, 또 한 번은 새벽 다섯 시 무렵이었다.

두 번 다 천둥소리에 놀라서 컴퓨터 전원을 차단하고, 허둥지둥 마당으로 뛰쳐나가 이것저것 살펴보는 등 비 단속을 했건만, 유감스럽게도 두 번 다 비는 쏟아지지 않았다. 무슨 거대한 소낙비라도 쏟아질 것처럼 투두둑거리는 빗방울 소리가 약 이 초 내지 삼 초쯤 들리다가 뚝, 끝나버린 뒤로 다시는 빗방울은커녕 비 냄새조차 풍기지 않았다.

우리는 비를 기다렸다. 언제부터 비를 기다렸던가? 그것은 모르겠다. 너무도 오랜 시간 비가 없었다. 물론 비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양이 너무 인색했다. 먼지가 폴폴 날리는 밭두렁을 제대로 적셔본 적은 거의 없었다. 내리 사흘 동안을 비가 내린다고 내린 적도 있기는 했지만 이슬비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고, 그리하여 총량은 기껏 이십 밀리도 안 되었다.







기상청 예보를 보면 사흘 뒤에 비가 내리는 걸로 나왔다가 다음 날이면 다시 사흘 뒤로 밀려나고, 또 밀려나고, 그러다가 비는 없이 구름만 많이 끼는 걸로 나오기를 몇 번이나 했던가. 6월 들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5월에도 그랬고, 4월에도 그랬고, 3월에도 그랬다.

비다운 비가 내렸던 게 언제였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할 지경이 돼 버렸다. 많은 비가 예상된다는 기상청 예보에 마른 목을 축이면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노라면, 슬프게도 지리산 일대에 백팔십 밀리미터가 쏟아졌다느니, 제주도 한라산 주변에 폭우가 쏟아져서 많은 나무들이 뿌리를 드러내고 말았다는 등의 후일담만 들려올 뿐이었다.

정작 비가 필요한 호남의 평야 지대에 비는 거의 없었다. 무슨 빌어먹다가 죽지도 못하고 겨우 살아난 거지에게 적선이라도 하듯이 십 밀리나 혹은 이삼십 밀리 정도 살짝 뿌려주고 떠나는 비만 한 달에 두세 차례 정도 있었을 뿐이었다. 회고하건데 작년 7월 이후 지금까지 꼬박 일 년여 동안을 그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저수지의 수위는 계속 내려갔고, 많은 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양파조차도 물이 없어서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우리 동네에서는 양파를 그리 많지 심지도 않건만, 작년에 고추 농사를 대량으로 시작했다가 초기에 탄저병으로 죄다 망쳐버린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작년 가을에 대오각성을 했다고나 할까. 어쨌든 고추나 참깨 같은 전통식 품종만으론 안 되겠다 싶어 양파 농사를 결심하고 뛰어들었다.

그런데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을 때, 겨울 동안 움츠리고 있었던 양파가 부쩍부쩍 자라나는 계절에 봄 가뭄이 들고 말았다. 그는 열심히 모터를 돌려 지하수를 뿜어 올렸다. 세상에, 양파 밭에 물을 주는 진풍경이 며칠이나 벌어지고 있을 즈음 이번에는 복분자 밭에서 타는 목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일단 꽃이 피고 열매가 파랗게 맺혔다 하면 금방 붉은 빛을 띠면서 한 달 내에 성장을 끝내고 검붉게 익어서 수확까지 끝나버리는 복분자도 양파처럼 그리 많은 물을 요구하는 식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물이 없다고 생기를 잃고 시들어가데 어쩔 것인가. 하늘이 비를 내려주지 않는다면 지하의 물이라도 끌어올려서 뿌려 주어야지 어쩔 것인가 말이다.

그러면 이제 한숨 놓아도 되는가? 천만에 만만에 말씀이었다. 고추 모종을 했으니 고추 밭에도 물을 주어야 하고, 감자를 심었으니 감자 밭에도 물을 주어야 하고, 마늘도 물이 없어 알을 못 키우겠다고 아우성이니 마늘 밭에도 역시 지하수를 끌어올려 뿌려주어야 하고, 뽕나무 또한 오디 열매를 맺어놓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니 물을 대주어야만 한다.

그리고 논농사, 가장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주식 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운수 좋게 저수지 인근에 농지를 소유한 사람이야 물 걱정을 그리 크게 하지 않는다 해도, 마을 앞이나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농지는 대부분 하늘에 의존하는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이 물을 주지 않는다. 어쩔 것인가.

농촌 사람들은 그렇게 5월 한 달 동안을 완전히 물과의 전쟁으로 보냈다. 그렇게 해서라도 보람이 있다면 누가 뭐라 할 것인가. 하지만 보람은커녕 벌써부터 발등 찍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우리 고장 고창에서 가장 먼저 성패가 확정되는 게 복분자인데 이 복분자의 가격이 작년 대비 절반 가까이 폭락해 버렸다.

복분자 생과 일 킬로그램이 작년에 일만 이천 원까지 갔었다. 금년에는 복분자 농사가 잘 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수확량이 줄었는데도 팔천 원으로 내려앉더니 육천오백 원 얘기가 나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농사를 자기 손으로 할 수만 있다면야 가격이야 그까짓 널뛰기를 한다 해도 무슨 그리 큰 걱정을 할까마는, 요즈음 농촌에서 자기 농사를 자기 손으로 짓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저 멀리 광주에서 일손을 모집해 버스로 공급해주는 업자들에게 의존하는 방식의 농사를 지어온 지도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것조차도 작업 가능 일수가 보름 남짓밖에 안 되는 오디나 복분자 수확 시기에는 전라도 말로 ‘싸개가 나서’ 사람 한 명 구경하기조차 어렵다. 하는 수 없이 도시에 나가 있는 아들이며 딸이며 며느리에 손자까지 불러내려야만 한다.







고생은 고생대로 ‘직사하게’하고, 손에 쥔 것은 거의 없는 이런 농사는 비단 복분자나 오디뿐만이 아니었다. 고창에서 제법 많은 농가가 참여하고 있는 블루베리는 사정이 심각하다 못해 참혹할 지경이었다. 블루베리는 일단 수확량 자체가 크게 감소해 버렸다.

블루베리는 물을 좋아하면서 또한 물을 싫어하기도 하는 아주 까탈스런 식물이라서 원활한 배수가 최대 관건이었다. 고른 날씨 또한 배수 못지않게 중요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금년에는 세월호 참사를 전후해서 날씨가 완전 널뛰기를 해 버렸다. 밤에는 추워서 오들오들 떨어야 하고, 낮에는 더워서 찬물을 좍좍 끼얹어야만 했다. 극심한 일교차는 고랭지 채소에나 좋을 뿐으로, 블루베리 같은 민감한 식물들은 냉해를 입기 십상이었다.

그렇게 냉해를 입어서 수확량이 대폭 줄어버렸는데도 블루베리를 찾는 사람이 없다. 예년에는 수확량이 제법 많았는데도 주문량을 다 소화해내지 못해 죄송하다는 내용의 문자를 대량 발송해야 했었지만, 금년에는 수확량도 없고 주문량 또한 없으니 이걸 대체 무슨 말로 정리를 해야 할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망초 꽃이 흐드러져서 그런다고 애먼 식물 탓을 해보기도 하고, 대통령 탓을 해보기도 한다.

“저놈의 빌어먹을 망초 꽃만 허천나게 피어 있고, 대통령은 친일파들만 어디서 쏙쏙 빼다가 총리를 시키느니 뭐를 시키느니 해쌓고, 망하는 거여, 망해 가는 거여, 이 나라가 인제, 잉?”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하늘을 나는 새를 부러워해 보기도 한다. 새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왜 새가 못 되고 사람 따위가 됐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는 그 사람의 투정을 듣다 보면 아닌 게 아니라 새 팔자가 사람 팔자는 물론이고 개 팔자보다도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은 일 년 농사의 절반도 아직 끝내지 못했지만, 새들은 벌써 전에 알을 낳고 새끼를 까서 그 새끼까지도 이미 다 키워냈다. 그리하여 새들은 이제 아무 하는 일이 없이 관광만 다닌다. 6월에는 특히 뻐꾸기 부부의 관광 다니는 꼴이 볼 만하다. 저쪽에서 수컷이 뻐꾹, 하면 이쪽에서 암컷이 뻐뻐꾹 하는 식으로 대화를 하는데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가슴에서 질투란 놈이 무럭무럭 성장해서 금방 뛰쳐나올 것만 같아진다.

어쨌든 우리 동네 성씨 아저씨의 양파 수확도 시작되었다. 그렇게도 애면글면해서 키워냈건만, 양파는 지금 가격이랄 것조차도 없이 그냥 폭락해 있었다. 한 사람의 일당을 가령 현물로 계산하기로 한다면 그 사람은 아마 트럭이라도 몰고 와야지만 자기 일당만큼의 양파를 가져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굳이 놉을 네 명이나 얻어서 무려 닷새간이나 작업을 한 까닭은 기본 영농비라도 건지자는 것이 아니었다. 속상해서 그냥 내버려두고 싶지만, 내버려두고 있노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꼴을 봐야만 하고, 무엇보다 양파 썩는 냄새가 온 동네를 휘감아 돌 테니 그게 두려워서 수확이라는 명목의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슬픔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객지의 자식들에게 큰소리 칠 수 있는 기회가 오랜만에 왔으니 좋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얘들아, 얼른 와서 양파 좀 가져가거라. 마늘도 좀 가져가고, 감자도 가져가거라. 무엇보다 양파가 말이다. 금년에 겁나게 풍년이 들었어야. 너희들 친구들한테도 좀 나눠주고, 직장 상사나 부하들에게도 좀 나눠주고 잉? 그렇게 해서 객지의 자식들이 주말을 이용해 차를 몰고 내려왔다. 엄마 아빠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더불어 양파를 골라서 자루에 담아 차에 싣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비료자루 위에서 신들이 나 있었다.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미끄러져도 보고 넘어져도 보고, 나비도 잡아보고 벌레도 잡아보고, 도시에서는 여간 구경하기 어려운 놀이에 신이 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고즈넉한 동네 가득 메아리치고 있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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