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진의 문화 뒷마당> ‘하이힐’과 ‘우는 남자’ 흥행참패 그 뒤



내 기준점으로 보자면 의외였다. 아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올해 상반기 극장가에 개봉한 영화 가운데 흥행에 참패한 두 영화가 있다. 같은 장르다. 기본 플롯 자체는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장르가 같다 보니 뿌리가 같은 줄기에서 뻗어 나온 형제 관계로 보일 정도다. 구성도 나쁘지 않았다. 전작의 엄청난 흥행을 등에 업고 초특급 스타를 캐스팅해 야심차게 첫 발을 내딛은 한 쪽, 그리고 전통적인 흥행 재담꾼과 TV와 스크린을 넘나드는 흥행 보증수표의 만남. 이건 누가 봐도 ‘기본은 해야’ 정석인 포석이다. 그런데 패했다. 그것도 철저하게 박살이 났다. 얼마 전 비참한 결과로 막을 내린 대한민국 축구국가대표팀의 브라질 월드컵 알제리전 경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영화 ‘우는 남자’와 ‘하이힐’이 그것이다.

사실 부정하는 관객이나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두 영화의 흥행 가능성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수치가 그 가능성을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담겨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지난 6월 29일 기준 영진위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집계에 따르면 ‘하이힐’은 전국 관객 34만, ‘우는 남자’는 60만을 동원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손익분기점이란 게 있다. 제작비 투자 대비 회수율을 말하는 데, 두 작품 모두 200만 대 중 후반의 관객을 동원해야 이를 회수했다. 하지만 기록상의 팩트만 봐선 현장 스태프들의 급료조차 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참패’란 말도 아까운 수준이다.




# 일러스트 정다은 기자 panda157@naver.com



먼저 ‘우는 남자’를 보자. 완성된 결과만 놓고 보면 완벽하게 ‘호’에 대한 의견이 압도적이어야 옳은 작품이었다. 사실 그의 전작 ‘아저씨’의 굴레가 너무도 컸기에 ‘우는 남자’에 대한 기대치는 상상 이상이었다. 올해 개봉해 쓰디쓴 ‘혹평’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넘은 ‘역린’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는 남자’는 600만 관객을 동원한 ‘아저씨’의 이정범 감독이 상업영화 데뷔 이전부터 구상해온 얘기란다. 대한민국에선 결코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진 킬러 액션이다. 여기에 머리카락 한 올까지 ‘화보’라 불리는 장동건이 등장하고, 최근 연기 ‘포텐’이 터진 김민희가 상대역이다. ‘분노의 질주: 도쿄 드리프트’에 나온 한국계 할리우드 배우 브라이언 티도 출연한다. 이건 구성력만 보면 ‘아저씨’를 넘어서야 옳은 영화다. 그런데 장르적인 관점 그리고 스토리의 개연성 해석이 이 영화의 운명을 갈라놨다. ‘느와르’를 표방하고 나섰지만 ‘우는 남자’는 말 그대로 ‘억지 춘향’식의 ‘느와르’ 외피를 씌우는 데만 급급했다. 쉽게 말해 이런 식이다. 고등학교 졸업식장이다. 이제 턱 밑에 솜털이 보송하게 나온 고3 학생이 멋들어진 조폭 정장에 바바리코트를 입은 식이다.

‘우는 남자’의 미덕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영화의 수준을 뛰어 넘은 ‘총격 액션’이다. 여기서 잠깐, 총격 액션으로 인해 영화의 패착을 완성시킨 한국영화가 있다. 바로 소지섭 주연의 ‘회사원’이었다. ‘회사원’의 마지막 시퀀스에 등장한 대규모 총격 장면을 떠올려 보자. 그 넓은 극장 안에서 울려 퍼지는 ‘딱총’ 소리에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큭큭’거리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반면 ‘우는 남자’는 권총(피스톨 방식, 슬라이드 방식)의 종류에 따른 총격음, 자동소총 역시 종류에 따른 음향, 여기에 tit건과 폭탄까지 등장시키며 할리우드의 액션 수준을 구현해 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장동건의 동료 가운데 ‘콜롬비아 형제’로 출연하는 외국 배우가 있다. 이 가운데 ‘형’으로 등장하는 배우는 실제 이라크 전쟁을 비롯해 전 세계 다수의 전쟁터를 누벼온 군인이란다. 리얼리티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의 세밀한 탄창 교환 장면을 떠올려 보자. 가랑이 사이에 M16 자동소총을 끼고 한 손으로 탄창을 교환하는 묘기는 입이 벌어지는 데 손색이 없다.

하지만 이게 문제였다. 이 화려한 액션이 ‘우는 남자’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온라인 영화 게시판에는 ‘우는 남자’의 맥락 없는 스토리 전개를 꼬집었다. 개연성 자체가 산을 넘어 바다를 지나 대륙을 넘어 우주로 흘러갔다는 점이다. 장동건의 죄책감이 자신의 동료들에게 총을 겨눌 정도의 트라우마가 되는 것인지, 김민희는 도대체 왜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묻는 글들이다.

한 중견 영화제작사 관계자는 ‘우는 남자’의 패착을 팬들과 비슷한 곳에서 찾았다. 그는 필자와의 만남에서 “한국 영화 시장의 흥행 코드는 아주 단순하다”면서 “일부 제작사나 감독들이 착각을 한다. 화려한 액션이나 노출? 절대 아니다. 스토리의 개연성이다. 한국 영화팬들의 수준을 절대 무시하면 안 된다. 1000만 흥행작을 하나하나 곱씹어보라”고 했다.

그의 의견을 보면 정반대의 의미에서 ‘하이힐’은 더욱 처참한 패배를 맛봤다. ‘하이힐’ 역시 같은 ‘느와르’ 장르다. 여기서 ‘느와르’ 장르의 개념은 ‘범죄와 폭력세계의 삶을 다룬 영화’라고 한 포털사이트 검색은 대답한다. 사실 ‘느와르’란 개념에서 보자면 대중들에겐 갱스터 무비로 알려진 ‘대부’가 가장 ‘느와르’에 맞닿아 있는 영화다. 그러나 1980년대 중 후반 충무로를 점령한 ‘홍콩 느와르’가 그 개념을 바꿔 놨다. 김보성이 그렇게도 외치는 ‘남자들의 의리’가 ‘느와르’의 다른 말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하이힐’은 엉뚱하게도 성적 소수자인 ‘트랜스젠더’를 끌고 들어왔다. ‘쌩뚱맞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지 분위기 자체를 산으로 끌고 갔다. 반대로 ‘하이힐’은 ‘우는 남자’와는 달리 스토리의 개연성이 너무도 넘쳐흘렀다. 주인공이 왜 그렇게 잔인할 정도로 범죄에 단죄를 하는지, 그 배경에 숨은 비밀이 무엇인지, 그 비밀을 알게 된 검은 세력의 복수가 어떻게 진행되는 지를 여과 없이 그려냈다. 폭력적 수위만 놓고 보자면 ‘우는 남자’를 넘어설 정도로 그 강도가 잔인하다. 하지만 최고의 패착이 바로 ‘하이힐’ 자체가 최고의 히든카드로 내세운 ‘트랜스젠더’란 점이다.

잠시 비껴나서 설명을 붙인다. 성적소수자에 대한 국내의 시각은 아직도 편협하다. 2000년 방송인 홍석천의 커밍아웃, 이듬해 ‘트랜스젠더’ 하리수의 등장, 다채널 시대에 접어든 현재 일부 케이블방송에서 공식적으로 전파를 쏘고 있는 ‘성전환 수술쇼’ 등은 ‘성적 소수자’에 대한 대중화에 일조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수자’ 앞에 붙은 ‘성적’이란 단어는 국내에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양성애자’ 등을 단순하게 ‘변태’ 굴레 속에 가둬버리는 선입견으로 작용된다.

‘하이힐’은 대중 영화고, 느와르를 표방한 장르 영화였다. 남성 관객, 그 중에서도 느와르의 기억을 갖고 있는 30~40대 관객들을 흡수할 타깃용 킬러 요소가 분명 존재했어야 한다. 그것이 영화 속 오프닝과 엔딩 부분에 배치된 배우 차승원의 액션 시퀀스라면 너무 허울 좋은 변명이 되고 만다. 애초에 합일점을 찾을 수도 찾아서도 안 되는 ‘느와르’와 ‘성적소수자’란 두 가지의 ‘이종교배’를 시도한 것 자체가 넌센스였던 것이다.

결국 영화는 주인공 윤지욱(차승원)의 과거에 초점을 맞춘 채 연출을 맡은 장진 감독 특유의 유머 코드가 버무려지면서 결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새로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2000년 당시 홍석천이 “나는 게이다”고 선언한 ‘커밍아웃’의 이질감을 넘어서는 느낌이다.

글쎄 14년이 흐른 뒤 ‘하이힐’이 재평가 될까. 그것은 절대 아닐 듯하다. 색다른 시도를 가리기 위해 넘치는 얘기로 인물 간 배치의 공간을 메우려 한 시도는 스토리의 과잉으로 이어졌다.

‘우는 남자’그리고 ‘하이힐’, 최근 국내 극장가를 초토화 시키고 있는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의 호흡법을 따라갔다면 어땠을까. “난 트랜스포머잖아. 대체 더 이상 뭐가 필요해?”

<김범진 님은 언론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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