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바지락은 도대체 왜 다 사라져버린 것일까?
그 많던 바지락은 도대체 왜 다 사라져버린 것일까?
  • 김수복 기자
  • 승인 2014.07.23 1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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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가장 에로틱한 삶의 현장 갯벌에서 (19)





오랜만에 갯벌 일이 생겼다. 오래 전부터 예정돼 있었던 일은 아니다. 예정은커녕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충청도의 어떤 바지락 양식장에서 무엇인가 예상 밖의 사고가 발생한 모양이다. 그래서 갯벌에 심어둔 어린 바지락을 죄다 캐내서 이곳 고창의 하전 갯벌로 이주를 시킨단다.

그런데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다. 언제 끝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적게는 십사오 명에서, 많게는 사십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매일 밤마다 온 몸에 땀을 줄줄 쏟아내며 콧노래를 부른다.

살다 보니 참 별난 일도 다 있다. 어떻게 이런 기막히게 신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인지, 바지락을 캐내서 이쪽으로 옮겨야만 하는 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막히게 우울한 사업이 되겠지만, 끈 떨어진 두레박처럼 할 일이 없어서 날마다 텅 빈 갯벌만 바라보며 한숨을 삼켜온 갯사람들에게는 일단 이보다 더 좋은 게 또 있을까 싶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어쨌든 갯벌을 밟아본 지도 오랜만이다. 정말로 오랜만이다. 작년 11월에 이십 여일 정도 작업을 하다가 끝, 한 뒤로 금년 6월에 처음이니 벌써 7개월 이상이나 흘렀다. 힘들어서 못 하겠다거나, 하기 싫어서 안 한 것은 아니다. 고창의 바지락 태반이 폐사해 버리는 바람에, 하고 싶어도 할 일이 없었다.







바지락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일감이 떨어져버린 마당에, 나 같은 뜨내기가, 그것도 사오 년 정도 공부 삼아서 해보겠다는 사람에게 돌아올 일거리가 있을 까닭은 없었다. 그렇다면 바지락 농사를 생업으로 삼고 살아온 사람들은 그동안 무엇을 했을까.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반가우면서도 나는 일단 그것이 궁금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물어보았다.

“아이 참, 뭣 하긴 뭘 해요, 놀았지.”

키가 작고, 체격도 작아서 일을 할 때면 어찌나 빨라 보이는지 내가 임의로 ‘도토리아줌마’라고 별명을 지은 아주머니의 말씀으로는 그랬다. 그 말 뒤에 울음 같은 것이 묻어날 것 같았지만, 울음대신 웃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까지 갯벌에서 우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울어 마땅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갯벌의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왜 웃는가? 우는 소리를 내면 스스로가 청승맞게 느껴져서, 그래서 정말로 울어버려야 하니까, 일단 울었다 하면 계속 울어야 하니까, 그래서 웃는다. 지난 일 년여 동안 갯벌을 드나들면서 내가 느낀 바로는 그랬다. 갯벌의 사람들은 울지 않는다는 것, 우는 소리도 웃는 소리로 바꿔서 표현한다는 것.

물론 연륜이 짧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못 살겠다고, 죽겠다고, 직설적으로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바지락 농사가 돈이 된다는 소문만 믿고 뛰어든 이른바 ‘초짜’들이 대체로 그렇게 우는 소리를 직설적으로 쏟아놓는다. 하지만 연륜이 오래된 사람들은, 갯벌이 무엇이란 것을 알고 있고, 고운 정뿐만 아니라 미운 정까지 들어버린, 그래서 갯벌을 온몸으로 사랑하게 돼버린 사람들은 결코 그렇게 우는 소리를 함부로 내지 않는다.

“놀아요∼오.”







한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런 대답이 나왔다. 이번에는 남자였다. 삼 년인가, 사 년인가 갯벌 일을 해서 그 돈으로 트랙터 한 대를 재작년에 새로 구입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바지락 농사에서 트랙터는 이제 필수가 되었다. 양식장을 갖고 있는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고, 양식장이 없는 사람이라도 트랙터가 있으면 일하는 조건이 좋아지는 까닭에 트랙터를 애써 구입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재작년에 트랙터를 애써 구입했건만, 작년에는 바지락이 폐사해 버리는 바람에 거의 일을 하지 못했다. 금년에는 상황이 나아지려나, 기대를 했지만, 고창 곰소만의 하전 갯벌은 금년에도 바지락 태반이 폐사를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할 일이 없었다. 그러면 이제 뭘 해야 하는가. 아니 그동안 뭘 해 왔는가. 나의 질문에 그는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놀아요∼오.”

과거형으로 말해서 놀았어도 아니고 현재형으로 놀아요. 그뿐이었다. 다른 아무 설명도 없었다. 놀아도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놀아요∼오’. 우는 소리도 아니고, 웃는 소리도 아닌, ‘놀아요∼오.’ 그가 말하는 이 ‘놀아요∼오’는 사실 의미가 매우 심장하다. 사람이 보통 논다고 말할 때의 그런 놂이 아니다. 할 일이 없어서 놀기 때문에 살기 어렵다거나 배가 고프다는 그런 말도 아니다.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논다고 말하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지적 능력이 약간 떨어진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그를 나는 재작년 가을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지켜봐 오고 있었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 말투 하나하나를 유심히 봐 오고 있었다. 이것도 아마 병이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언행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한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 그것은 무례일 수도 있고, 최대한의 예의일 수도 있다. 나는 예를 다 갖춘다는 마음으로 그를 관찰해 왔지만, 그는 혹시 나를 기분 나쁘게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동안 지켜봐 온 내 눈에 따르면, 그는 트랙터를 자기 몸에 걸치는 옷이나 양말 혹은 속옷 이상으로 아끼고 있었다. 갯벌을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누구나 다 트랙터의 염기를 물로 씻어내지만, 그의 트랙터 세차하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내 입에서 아,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정성도 그런 정성이 있을까. 진실성도 그런 진실성이 없었다.

어떤 때 보면 그는 트랙터를 세차하는 재미 하나로 살아가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어떤 때 보면 그는 트랙터 세차하는 재미를 만끽하기 위해 갯일을 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사실 바다에서의 일이 끝나는 즉시 돌아가는 사람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날 일을 끝내고 나면 모여서서 내일 일을 설계하기도 하고, 그날 일하던 도중에 있었던 이런저런 일로 잠시나마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그는 그런 일로 시간을 보내는 법이 없었다.

그날 해야 할 일을 끝냈다 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트랙터를 몰고 떠나버리는 그는 대체 무슨 할 일이 그리도 많은 것일까. 그를 잘 몰랐을 때 나는 겨우 그런 의문이나 갖고 있었더랬다. 일이 끝나면 모두들 모여서서 즐기는 간식 먹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빵 한 개 손에 들고 슬그머니 일행을 빠져나와서 트랙터에 올라타고 있는, 잠시 뒤에 다시 보면 벌써 저만치 달려가고 있는 그는 아닌 게 아니라 한 몸으로 최소한 서너 종류의 일을 하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웬걸, 그가 갯벌을 빠져나가고도 삼십여 분, 혹은 한 시간여가 지난 뒤에 갯벌을 빠져나와서 보면 그는 그때까지도 개울가에서 트랙터 세차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트랙터란 기본적으로 쇠붙이로 구성되어 있고, 쇠붙이는 염분에 약하니까, 그래서 가능한 한 일 분이라도, 아니 일 초라도 빨리 바다를 빠져나와서 트랙터를 부식시키는 소금기를 털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그렇게 부지런을 떨고 있는 것이었다.







트랙터의 외양뿐만 아니라, 볼트너트 하나하나, 연결 부위의 틈새 하나하나에까지 물을 뿌리고 또 뿌리고, 심지어는 작은 막대기로 타이어 사이에 박힌 흙 같은 것을 후벼 파는 식으로, 단 한 방울의 소금기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정성에 정성을 다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의 소와 할아버지가 떠올라오곤 했다.
자기를 이롭게 해주는 대상에게 바치는 기본적인 예의라든가 경배의 차원을 넘어서는 무엇이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에게는 있었다. 오랜 시간 트랙터를 세차하고 있는 갯벌의 남자에게서 나는 할아버지가 보여주는 그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무엇에 대해 굳이 이름을 붙이기로 하자면 사랑을 능가하는 단어가 없겠지만, 그러나, 어쩐지, ‘사랑’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는 핍진성 내지 곡진성 같은 것이 두 남자에게는 있다.

만약에 <워낭소리>의 할아버지가 할 일이 없어서 소를 계속 놀리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면, 할아버지는 아마도 굉장히 황망해 하셨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는 이미 노동이나 생산성 같은 단어들을 훌쩍 뛰어넘는 저 높은 곳에 있었던 까닭으로, 할아버지는 일이 없다고 탄식하거나 우울해 하는 대신 극도의 미안함과 부끄러움으로 소를 끌어안고 하루 종일 “미안하다, 미안하다”하고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지 않았을까.

트랙터를 세차하는 남자가 “놀아요∼오” 했을 때 내가 느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미안함. 부끄러움. 할 일을 만들어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원망이나 탄식이 아니라, 이유야 어떻든 놀아야만 하는, 역할을 배정받지 못해서 우두커니 서 있어야만 하는 트랙터와 자기 자신에 대한 미안함, 부끄러움.

현실적으로도 그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논다고 말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충청도 갯벌에서 고창으로 내려 보내는 물량은 일정하지가 않았다. 어떤 날은 십오륙 명이 필요한 물량이 내려오고, 또 어떤 날은 사십여 명을 동원해야할 물량이 내려오기도 한다. 사십여 명이 필요한 날에 그와 그의 트랙터는 부름을 받고 달려가지만, 십오륙 명만 필요할 때 그와 그의 트랙터는 놀아야만 한다. 그러니 일을 하면서도 논다고, 그의 입장에서는 “놀아요∼오”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나는 며칠이 지난 뒤에서야 깨달았다.







그나마도 그는 나은 편이었다. 곰소만 너른 갯벌에 바지락 양식 면허를 소유한 사람만도 이백 명이 넘었다. 이백여 개의 양식장에 밥줄을 대고 있는 사람이 정확하게 몇 명인지 알 수는 없지만, 대충 잡아도 오륙백 명은 넘는다. 그 중에 겨우 십오륙 명이, 많아봐야 사십여 명을 넘지 않을 정도의 인원만이 뜻밖으로 생긴 일거리에 즐거운 땀을 흘리고 있는 셈이었다.

바지락 폐사의 정확한 원인은 역학조사를 실시한 지 이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밝혀내지 못한 게 아니라 발표를 못하고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영광 원자력 발전소에서 방출하는 온배수가 주범인데 그 사실을 그대로 발표하면 엄청난 액수의 보상금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래서 발표를 무한정 미루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새만금 방조제를 주범으로 꼽기도 한다. 거대한 인공 둑을 만들어버린 까닭에 바닷물의 들고 낢에 심각한 이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바닷물이란 기본적으로 썰물 때 멀리 난바다까지 나가서 목욕을 하고 밀물 시간에 돌아와야 하는데 새만금 방조제 때문에 멀리까지 나가지를 못하고 인근에서만 맴돌다 보니 유해한 각종 미생물이 발생해서 바지락을 폐사시키고 있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갑자기 내려온 젊은 양식업자들의 과도한 욕심을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기도 했다. 바지락 양식 1세대와 1.5세대까지는 온 몸으로 부딪혀가며 양식업을 공부하고 연구한 까닭에 갯벌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지극하지만, 부모로부터 양식업 면허를 손쉽게 세습 받아서 어느 날 갑자기 뛰어든 젊은이들은 바다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돈만 사랑하는 까닭에 지난 몇 년 동안 집중적으로 바다를 오염시켜 왔다는 주장이었다.







도시의 경제가 불황을 계속 기록하면서 할 일이 없어진 젊은 사람들이 다수 내려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부모 세대와는 달리 양식업을 꽤나 과학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로봇 같은 기계를 자체 제작해서 사람의 손이 필요 없이 기계가 땅속의 바지락을 캐내서 선별까지 하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그 기계는 막대한 제작비를 들였다는 소문과 함께 두어 차례 선을 보이기는 했었지만 무슨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았다.

젊은 양식업자들은 또한 종패를 수입하는 데 있어서도 경제원칙에 입각한 과학적인 방식을 도입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중국 현지의 종패 공급 업자와 직접 계약을 체결하고 값싸게 들여오는 방식이었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의 그런 방식이 바로 문제라는 주장이었다. 요컨대 값싼 종패가 달리 값이 싼 게 아니라는 얘기였다.

진공청소기의 원리를 응용한 흡입기라는 것이 있단다.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흡입기를 바다에 넣고 종패를 빨아들이니까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덜 들고, 그래서 값이 싸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린 종패가 기계 안에서 돌고 또 돌다 보면 반죽음 상태가 되는데 그것이 한국으로 오는 과정에서 절반 이상은 완전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추론이었다. 그렇게 이미 죽은 것을 갯벌에 뿌려대니 양식장 전체가 오염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얘기였다.

어패류는 수천수만 마리 중에서 단 한 마리만 죽어 있어도 마치 전체가 다 죽은 것처럼 악취가 코를 찌르기 마련이었다. 이런 원리에 의해서 하전 갯벌의 바지락이 폐사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고는 있지만, 그러나 근거를 찾아낼 방법은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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