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 지음/ 문학동네






김정기 시인의 신작 시집 ‘빗소리를 듣는 나무’가 출간되었다. 1975년 첫 시집 ‘당신의 군복’으로 문단과 독자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반응을 이끌어냈던 시인은 1979년,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고, 시간이 흘러 시인의 이름이 거의 완전히 잊힌 뒤에야 그는 오랜 세월 가슴속에 묵혀두었던 시편들을 조금씩 꺼내어 선보여왔다.

시인으로서,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가장 빛나야 했던 시절, 왜 그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금-여기에서 사라져야 했던 것일까. 삼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보면, 시인의 남편이 뉴욕 UN 한국본부에 외교관으로 재임중이던 1979년, 10.26이 터졌고, 시인의 남편은 하루아침에 외교관에서 ‘국가원수를 살해한 대역죄인의 측근 제1호’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시인과 가족들은 뉴욕에서 불법체류자가 되어 이국땅에 표류하게 되었다. 고통스러운 시간도 어느새 삼십오 년이나 흘러 냉혹한 낙인의 굴레는 벗었지만, 시인에게는 ‘고국으로부터 잊힌 존재’가 되었다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안온했던 흙에서 뽑혀 뿌리 잘린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낯설고 거친 땅에 새로이 파고들어야만 했던 시인. 시인의 눈에 아른거리던 고국의 모습은 그를 배신하듯 완전히 변해버렸지만, 그럼에도 그곳과 연결되어 있고자 김정기는 모국어로 시를 쓰는 일을 계속해왔다. 시에 대한 열망 하나로 지구 반대편 멀고 먼 뉴욕에서 문인 양성에 힘을 쏟아온 시인의 삶에 깊은 인상을 받은 소설가 신경숙은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모티프로 소설을 쓰기도 했다.

‘꽃들은 말한다’이후 다시 십 년, 시인이 굴곡진 지난 삶의 한을 가슴에 묻고 먼 곳에서 날려보낸 새로운 시편들은 오히려 이곳-고국의 우리를 어르고 달랜다. 그의 시는 고통 속에서 끌어내 더욱 빛나는 깨달음을 물, 나무, 꽃 등 부드럽지만 강인한 자연의 이미지로 전달한다. 이 86편의 시들은 타국에서 고독과 그리움으로만 삼십여 년을 살아낸 시인의, 그럼에도 계속해서 세상을 마주하고 모국의 언어로 시를 쓰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담고 있다.

정리 이주리 기자 juyu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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