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진의 문화 뒷마당> 영화 '혹성탈출'


사실 논란이 됐을 때부터 쉽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언뜻 생각해보면 자기 스스로 약점을 까발리고 “내가 이렇게 못났다. 그러니 내 못난 점을 인정해 달라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나”란 창피함마저 들었다. 내가 이 정도이니 정작 그 바닥에 몸을 담고 있는 관계자들은 어느 정도일까. 영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혹성탈출2)이 개봉일을 16일에서 급하게 10일로 변경하면서 벌어진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의 ‘규탄 성명’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혹성탈출 2’ 같은 블록버스터가 개봉 일을 변경하면 비슷한 시기에 맞춰서 개봉일을 준비하고 마케팅을 펼쳐오던 ‘작은’ 한국영화들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속으로 좀 들어가 보면 전혀 그렇지도 않다. 지금까지 한국영화들도 전야 개봉 혹은 유료시시사회란 각종 ‘변칙’ 규정으로 그 보다 작은 영화들을 짓밟아 왔다. ‘변칙’ 혹은 ‘반칙’에 크기와 정도가 있다는 얘기가 된다. 쉽게 말하면 사람을 죽이는 ‘살인’은 유죄, 사람을 속이는 ‘사기’는 무죄란 주장이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반대급부로 얘기해보자. 할리우드 영화가 개봉 일을 변경하고 그에 따른 연쇄 부작용으로 한국 영화의 흥행 성적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정말 그럴까. 한국영화가 그 정도로 유약한 상황일까. 단적인 예를 들어주겠다. 최근 극장가에 개봉해 국내 박스오피스를 초토화 시킬 것으로 걱정한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 한 주 뒤 개봉한 ‘신의 한 수’에게 완벽하게 짓밟혔다. 박스오피스 순위에서도 ‘신의 한 수’가 한 계단 위다. 하루 평균 관객 동원 숫자도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제작비는? ‘트랜스포머’가 약 2000억, ‘신의 한 수’는 80억 수준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다윗’이 이겼다는 성서 속 얘기가 사실임이 입증된 셈이다.

한국 영화 시장은 전통적으로 ‘스토리’에 기반을 둔 블록버스터, 이른바 ‘스토리 버스터’가 큰 힘을 쓰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 히어로 무비의 걸작 ‘다크 나이트’ 시리즈다. 이 역시 전 세계 극장가를 융단 폭격하며 수억 달러의 흥행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유독 국내 시장에선 힘을 못 썼다. ‘배트맨 비긴즈’(98만) ‘다크 나이트’(408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640만) 세 편의 누적 관객 수가 ‘광해, 왕이 된 남자’ 단 한 편이 동원한 1231만 명보다 떨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럼 블록버스터에서 스토리가 아닌 스케일에 집중한다면 해답은 나올까. 그것도 아니다. 이번 ‘트랜스포머 4’가 가장 좋은 예가 됐다. 2000억이 넘는 제작비가 투입됐다. 영화 역사상 이 보다 더한 ‘비주얼 쇼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강요하듯 러닝타임 동안 관객들을 쉴 새 없이 몰아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블록버스터의 개념부터 들어가 보면 된다. 사전적 의미의 ‘블록버스터’를 보자. 영화에서 단기간에 큰 흥행을 올리기 위해 엄청나게 돈을 들여 만든 대작을 뜻하는 말이다. 사실 ‘블록버스터’(Blockbuster)란 단어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쓰던 폭탄의 이름이다. 그 만큼 파괴력에서 비교 불가의 능력을 발휘했음을 뜻한다. 영화적으로도 비슷하다. 대규모 자금의 투입될 수 있는 북미 지역 영화 시장에서 파생된 단어다. 막대한 흥행수입을 올린 영화, 특히 매표 매출액이 큰 영화를 일컫는 말이다. 보통 북미 지역(미국, 캐나다)의 경우, 연 1억 달러 이상의 매표 매출을 올린 영화, 혹은 올릴 것으로 예상되는 영화를 ‘블록 버스터’라고 부른다.

결정적으로 ‘블록버스터’는 사이즈의 문제에서 출발하게 된다. 제작비, 즉 자금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 영화는 모든 면에서 관객들에게 상품적인 면에서 셀링 포인트의 요소를 한 개가 아닌 두 개, 혹은 세 개 네 개 이상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게 되자면 태생적으로 비주얼에 집중하게 되고 비주얼에 집중하면 원천적으로 스토리의 결여가 따라올 수밖에 없다. 배급이란 극장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영화의 이상적인 러닝타임은 평균 120분 내외가 적당하다. 하루 상영 회차를 고려할 때 말이다. 물론 이를 타계하기 위해 2000년대부터 멀티플렉스가 도입됐지만 말이다. 하지만 대규모 자금 그리고 비주얼 쇼크, 여기에 영화적인 최소한의 스토리를 부여하자니 결론적으로 러닝타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시각적 충격이 자금적인 부분으로 충족됐다면 영화 본래의 이야기적 관심도를 높여야 하는 단계가 따라오게 된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앞서 배급문제나 또 셀링 포인트적인 면에서 영화의 가장 이상적인 러닝타임을 120분 내외라고 한 바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관객들이 돈을 지불하고 몰입도를 유지하는 최적의 시간이란 계산이다. 이 시간이 넘어가면 그 어떤 비주얼 쇼크나 스토리적 충격파가 다가와도 ‘지겹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트랜스포머 4’로 넘어가자. 무려 상영 시간이 2시간 44분이다. 거기에 상영 포맷 자체가 대부분이 3D다. 3시간 동안 안경을 쓰고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란한 비주얼에 정신을 놔야 관람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스토리는? 이미 포털사이트에 나온 기사를 조금만 검색해 봐도 알 수 있다. ‘이야기가 산을 넘어 바다를 건너 우주로 날라갔다’는 혹평이 쏟아진다.

지금까지 한국영화 시장에서 1000만 관객을 넘은 영화들을 보면 1등부터 11등까지가 ‘1000만’ 영화다. 이 가운데 1등이 ‘아바타’고, 11등이 ‘겨울왕국’이다. 2등부터 10등까지 9편이 한국영화다. 1등의 경우 2009년 본격적으로 도입된 3D의 ‘후광 효과’였단 점은 영화사적으로 이미 증명된 결과다. ‘아바타’를 기점으로 완벽하게 증명된 3D는 이제 영화계의 대세다. ‘겨울왕국’의 경우 정치적인 효과도 아주 약간(?)은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이들의 손이 이끌려 따라간 부모님들의 발길이 만들어 낸 특이한 케이스였다. 이후 9편이 모두 한국영화였고, 한국영화는 자본 즉 ‘규모의 산업’에서 완벽하게 밀릴 수밖에 없는 할리우드의 대항마로 스토리를 선택했다. 그것들이 9편의 ‘1000만 영화’들을 만들었고, 현재도 그 대세는 유지되고 있다.

잠시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스토리를 살펴보자. 1968년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SF영화의 기념비적인 걸작 ‘혹성탈출’에 기반을 둔 프리퀄(이전 이야기)의 3부작 시리즈 두 번째 얘기다. 유인원이 지배 종족이 되고 인간이 피지배계급이 된 미래 사회의 얘기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지를 알아보는 시리즈다. 과학자들에 의해 치매 치료제로 개발된 바이러스 ‘시미안 플루’가 변이를 일으켜 유인원들에게 ‘지적’ 능력을 선사했고, 반면 인간들은 멸종 시키는 괴바이러스란 설정에서 출발한다. 유인원들의 리더 ‘시저’는 인간들의 손에서 자랐고 현재는 유인원들을 이끌지만 아직도 인간과의 ‘공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반면 유인원들은 점차 무리에서 집단 그리고 사회 나아가 국가적인 개념의 틀을 갖춘 거대 계체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발전된 사회에선 결국 권력이란 보이지 않는 괴물이 출연하게 되고, 시저는 반인간파의 유인원들에게 축출되고 유인원들은 인간과의 마지막 전쟁을 선포한다.

억지 논리일 수도 있지만 공교롭게도 ‘혹성탈출2’의 스토리 전개가 지금의 할리우드와 충무로의 공생관계를 보는 듯하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공세에도 작품성 그리고 이야기의 구조에 반한 골수 한국영화 팬들은 항상 한국영화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수백억 아니 수천억짜리 블록버스터가 융단폭격을 가한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최근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대기업 계열 배급사에서 독립해 자립을 꿈꾸는 한국영화제작가협회가 발족시킨 독립 배급사 ‘리틀빅픽처스’의 첫 번째 배급영화 ‘소녀괴담’이란 공포영화가 ‘전야개봉’ 형식으로 극장에 내걸렸다. 이 단 하루의 ‘변칙’ 개봉으로 피눈물을 흘린 정말 작은 영화들의 곡소리는 이들에게 들리지 않는 것일까. 그저 자기 밥그릇에 눈길을 주는 것조차도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거부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뭘까.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이 오히려 엄청난 흥행을 거둬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줬으면 하는 반감이 드는 이유가 뭘까. ‘변칙’과 ‘반칙’을 논하기에 앞서 진짜 ‘상생’과 ‘공존’이 무엇인지를 좀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한국영화계여.


<김범진 님은 언론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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