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담 걸쭉한 ‘익산떡’의 육자배기로 풀어내는 情
입담 걸쭉한 ‘익산떡’의 육자배기로 풀어내는 情
  • 정서룡 기자
  • 승인 2014.07.31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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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숭인동 길 레스토랑 그곳엔 ‘사람’이 있다






세 번째 이야기-막걸리

화자는 술을 좋아한다. 자주 마신다. 원래는 소주 건, 맥주 건, 막걸리 건, 때론 양주 건 가리지 않았다. 요즘은 가린다. 주종은 막걸리다. 추억이 많다. 처음 막걸리와의 조우는 상당히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자가 태어나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1학년 중반까지 살았던, 그리고 지금도 `고향`이라는 아련함으로 자주 찾는 전북 고창에서다. 정확히 말하면 전북 고창군 상하면 장호리 성동 산46번지다. 지금은 성동이란 집 몇 채 안되는 조그만 마을 지명은 어디론지 사라져버렸고 그저 장호로 불린다. 산46번지는 산에 있어서가 아니다. 장호나 성동엔 산이 없다. 단지 숲이 있을 뿐이다.

야야, 막걸리 좀 받아 오거라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를 일이나, 아마도 화자가 두 발로 걷기 시작할 무렵이 아니었겠나 싶다. 손에 힘이 좀 붙어서 두 되 짜리 찌그러진 양은 막걸리 주전자를 들 수 있는 나이 무렵이 아니었겠나 싶다. 산46번지 숲 속에 위치한 집에서 10여분 떨어진 점빵까지 걸어서 오갈 수 있는 나이 무렵이 아니었겠나 싶다. 점빵에서 "야?! 야?!" 하고 큰 목소리로 점빵 주인을 불러내고 "막걸리 두 되 주시오이!!"하고 말 할 수 있는 때쯤이 아니었겠나 싶다. 이마에 주름살이 잔뜩 접힌 할머니가 점빵 한쪽 귀퉁이에 큰 덩치로 자리하고 있는 막걸리 항아리 뚜껑을 연다. 그리고 술통 속에 빠져 있는 몇 년 됐을지 짐작조차 힘든 시커멓고 뺀질뺀질한 되빡(거기선 그렇게 불렀다)에 가득 막걸리를 담는다. 양은 주전자의 뚜껑이 열리고 한되빡이 먼저 쏟아부어진다. 그리고 두되빡이 부어진다. 양은 주전자의 배가 볼록해진다. 어라?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고창군 상하면 장호 점빵집 할머니 인심 좋다. 약 반되빡은 더 될 분량의 막걸리를 다시 퍼올리더니 주전자에 붓는다. 주전자 속 막걸리가 출렁출렁 금새라도 넘쳐 나올 듯 소요를 일으킨다. 시큼한 막걸리 냄새가 소년의 코를 찔러온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안에 침이 고인다.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묵직하다. 새마을운동으로 단정하게 정리된 골목. 빨간색,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 사이로 황금색의 초가지붕도 눈에 띈다. 가끔 지나가는 낯익은 동네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한다.

오냐잉, 막걸리 받아가냐잉!!

양은 주전자를 오른 손과 왼 손으로 번갈아 쥐기를 정확히 5번째, 동네 끝 부분에 당산이 있다. 500년도 넘은 커다란 소나무가 11그루 서 있다. 당산은 매년 정월 대보름에 제사를 지내는 나무가 있는 곳이다. 소년 또래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하고, 여름 한 철 농사일에 지친 어른들의 휴식처이기도 하다. 집을 가려면 당산을 지나고 모래 둔덕을 지나고 숲을 지나야 한다.

다행히 아무도 눈에 뜨이지 않는다. 양은 주전자에 눈길이 간다. 점빵 할머니가 덤으로 퍼부어주던 반되빡이 아까부터 계속 머릿속을 빙빙 맴돌고 있었다.

무거운 주전자를 두 손으로 입 근처까지 낑낑대며 끌어올린다. 아까의 시큼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코를 타고 전달된 의식이 뇌를 자극한다. 뇌의 명령이 이어진다.

입을 갖다 대…그리고 주전자를 5도 정도만 기울여…그럼 세상이 달라진다니까.

채 명령이 끝나기도 전에 주전자의 뾰족한 부리는 소년의 조그만 입안에 들어가 있다. 굳이 5도를 기울일 필요도 없다. 그 인심 좋은 점빵 할머니 덕분에 2도 정도 기울이자 차디찬 막걸리가 입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혀 끝에 일기 시작한 미세한 파장이 꿀꺽, 소리와 함께 엄청난 파문으로 이어진다. 식도가 시원하다. 박하사탕을 먹었을 때보다 더 시원하다.

입을 뗀다. 캬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면서 코끝이 찡, 하다. 소매로 입을 훔친다. 주위를 둘러본다. 여전히 아무도 없다. 주전자를 모래길 위에 내려놓는다. 뚜껑을 열어본다. 1cm 정도가 굴어 있다. 다시 미소가 번진다.

그렇게 주변의 눈치를 계속해 살피면서 두 번 세 번을 번복하다보니 어느새 입안에서 "꺼억"하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동시에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소년은 그래도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막걸리류는 경험을 해 본 터이다. 어머니가 밀주를 담갔을 때 `찌겅이`(찌꺼기)에 사카린을 타 마셔 본 경험이 있다. 이건 어머니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냄새는 나지만 조금만 있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다시 뚜껑을 열어본다. 3cm 정도는 더 굴어 있다. 이 정도면 됐다.

슬슬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발걸음이 가볍다. 집으로 향하는 숲길. 소나무가 빽빽하다. 작은 소나무로 다가간다. 솔잎을 딴다. 입에 넣고 질겅 질겅 씹는다. 막걸리 냄새를 가시게 하기 위함이다. 이제 끝!!

"어허, 막걸리가 많이 굴었네잉…!! 많이 흘려부렀구마잉."
"……"
"조심해서 좀 가져오지 그랬냐."

막걸리 주전자를 받아든 아버지는 이렇게 혼자 파악하시고 혼자 결론을 내리시고 만다. 시골에서 자란 이라면 누구나 경험해봤을, 그리고 한두번쯤 반추하면서 미소지을 그 사건들의 중심엔 물론 막걸리가 있다.

다음에 계속
정서룡 기자
sljung99@na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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