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가장 에로틱한 삶의 현장 갯벌에서(21)






금년에는 뜻밖의 일이 자주 생긴다. 충청도 서산의 천수만이 수문을 열어버리는 바람에 생각지도 못했던 종패 뿌릴 일이 잇달아 생기더니, 이번에는 부부싸움 때문에 뿌려놓은 종패를 도로 거둬들여야 할 일이 생겼다. 그래, 그것은 틀림없는 부부싸움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아니다 참, 단순히 그냥 부부싸움이라기보다 이혼의 후유증이라고나 해야 할까?

어쨌든 한 부부가 있었다. 백년해로, 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아니 그것도 과하다면 살아 있는 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는 부부가 되자고 굳게 다짐을 했었고, 실제로도 거의 그렇게 살았었다고 주위 사람들은 증언하고 있었다.

신혼살림은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남편이 갯가에서 태어난 까닭에 날마다 갯벌을 드나들었다. 아내 또한 갯가로 시집을 온 까닭에 날마다 갯벌을 드나들었다. 밤에도 일을 하고 낮에도 일을 하는 와중에도 부부는 무엇이든 맛있는 것을 발견하면 가져가서 나눠먹었고, 가끔씩이나마 좋은 구경거리가 생기면 손잡고 함께 다니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이가 태어나기 시작했고, 살림도 조금씩 불어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씩씩하게 자라났고, 살림은 아이들을 키우기에 서럽지 않을 정도로 불어나서 마침내는 바지락 양식업 면허를 취득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부부의 나이 오십 세를 넘어설 즈음에는 그토록 소망하던 집도 한 채 새로 근사하게 지었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근사하게 큰 집을 지은 뒤로 그들 부부에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생기기 시작했는가는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남편의 세계관이 변했던가. 아니면 아내의 세계관이 변했던 것인가. 과정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결과는 동네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나타나 있었다. 집을 지은 지 이 년이 채 안 돼서 부부는 이혼을 했다.







서류상 이혼이 완료되기 전에 아내가 집을 나갔고, 남편은 술독에 빠졌다. 집을 나간 아내는 아마 바지락 양식 따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술독에 빠진 남편 또한 바지락 양식 따위는 개나 물어가라는 듯이 술만 마셨다. 동네 사람들은 그들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어도, 팔천여 평에 이르는 거대한 면적의 바지락 양식장이 놀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충청도 서산 인근의 한 양식업자가 이 소식을 들었다. 고창의 하전 갯벌에서 바지락 양식업을 하는 친구를 둔 덕분이었다. 충청도 서산의 바지락 양식은 매년 여름이면 큰 피해를 보고 있었다. 여름 장마를 대비하느라 천수만 수문을 열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담수의 대량 유입으로 바지락이 폐사한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그저 당하기만 했지만, 원인이 밝혀진 뒤로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대비를 하고 있었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우기가 오고 있었고, 6월 말까지 갯벌의 모두 바지락을 채취하든가 이주를 시켜야만 했다.

고창의 친구로부터 하전 갯벌에 비어 있는 양식장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충청도의 양식업자는 그 땅을 활용하기로 결심하고 친구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고창의 친구는 술독에 빠져 있는 양식장 주인에게 의향을 타진했고, 양식장 주인은 내년 봄까지 양식장을 활용하는 조건으로 종패 십 톤을 요구했다. 종패 십 톤이면 그 가격도 상당했지만, 수백 톤의 바지락이 폐사 위기에 처해 있는 충청도의 양식업자로서는 그나마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충청도 서산의 바지락이 전라도 고창으로 이주하는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이런 경우에도 적합한지 다소 애매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한밤중에 바다로 나가서 뿌리는 작업은 고창의 친구가 진두지휘하기로 했다. 그 양이 이십 킬로그램짜리 망으로 일만여 개가 넘었고, 작업 일수는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하루 평균 삼십여 명씩 보름도 넘게 걸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천수만이 마침내 그 거대한 수문을 열면서 바지락 이주 작업을 더 이상 진행할 이유가 없어졌을 즈음, 그러니까 작업을 완료했을 즈음 한 통의 내용증명서가 고창의 친구에게 배달되었다. 이제는 이혼해서 남남이 되어버린, 술독에 빠져 있는 남편의 전 부인에게서 온 것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양식업 면허권자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양식장을 마음대로 유린했다는 것, 십 일 내에 원상 복귀시켜 놓지 않으면 소송을 하겠다는 것.

그제야 사람들은 아차, 하고 이마를 쳤다. 양식업 면허가 남편이 아닌 아내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으면서도 하필 중요한 시기에는 깜빡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발등에 불이 붙었다. 고창의 친구는 그날 밤 서산 친구에게 달려가서 대책을 숙의했다. 그리고 만취했다. 무슨 이런 빌어먹을 일이 다 있단 말인가.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책을 논의했다고 하지만 결론은 처음부터 나와 있었다. 남의 땅에 주인의 허락도 없이 바지락을 이주시켰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러니 주인의 요구대로 뿌려놓은 바지락을 도로 캐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달랑 열흘이라니. 뿌리는 데만도 보름이 걸린 바지락을 열흘 안에 캐내라니, 이것은 골탕을 단단히 먹이겠다는 얘기로밖에는 해석이 안 되었다.

사람들은 이혼한 부부 모두를 향해 저주의 화살을 날렸다. 이혼까지 한 주제에 자기 이름으로 된 것도 아니고 이제는 전처가 돼버린 여자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양식장을 자기 멋대로 빌려주고 종패 십 톤을 날로 먹으려 한 남편은 당연히 욕을 먹어야 했다. 아내도 역시 욕을 먹어 마땅했다. 바지락 농사를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잘 아는 사람이 일만 자루도 넘는 바지락을 열흘 안에 캐내라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말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년이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거여.”
“그럼, 그럼, 그것이제 머.”







미루어 짐작한다는 말도 있듯이, 동네 사람들은 추리를 하고 또 했다. 그 결과는 대부분 맞는 것으로 일단 밝혀졌다. 가용 가능한 인력을 최대한 동원해서 바지락을 캐내는 한편 물밑협상을 진행해 온 고창의 친구는 양식장 주인인 그녀로부터 현금 오천만 원을 요구받았다. 내년 봄까지 양식장을 사용하는 대가로 현금 오천만 원을 달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년이 미친 거여, 환장한 거여. 새가 빠지게 일을 해도 일 년에 오백 만원 벌기도 힘들어진 요새 같은 시절에 오천만 원이 뭐여, 오천 만원이. 허이구 참 내.”
“아니여, 미친 것이 아니여, 옆에 누가 있는 것이여.”
“맞어, 맞어, 내용증명이라는 것이 말이여, 그것이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잖어. 성경책이나 포도시 읽어온 그 여자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랑게. 아 그리고 말이야 바로 말해서 그 여자 그런 여자 아니었잖여. 잔정도 많고, 속정도 많고, 을매나 정이 많은 사람이었는디, 안 그려?”
“아이고 어쩌까, 그 여편네 혹시 사기꾼 사내를 만난 것이나 아닌지 몰러어?”
“아니긴 뭐시 아니여, 확실하당게.”

동네 사람들은 낮에도 모였다 하면 그 이야기를 했고, 밤에도 모였다 하면 그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뿌려놓은 종패 바지락을 도로 캐내기 위해 트랙터를 타고 갯벌을 달리면서도 그 이야기를 했고, 빗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고된 작업 중에도 틈만 나면 그 이야기를 했다.

작업은 서럽게 진행되었다. 해야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한다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이게 어느 누구의 입장에서 봐도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기 마련이어서, 흙탕물이 눈 속으로 들어가도 고통을 호소하기가 어려웠고, 비옷이 찢어져서 흙탕물이 속옷을 적셔도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그저 손발이나 부지런히 움직여대면서 가끔 하늘이나 한 번씩 쳐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어렵사리 서럽게 캐낸 바지락의 운명은 또 어떤가. 일 년여 뒤에 캐낼 생각으로 뿌렸던, 애당초 종패로 뿌렸던 것이 채 한 달도 안 돼서 다 자랐을 리는 없는 일이었다. 사람으로 치자면 이제 갓 청소년기에 접어든 녀석들을 캐내서 출하를 해야 하니 가격인들 제대로 나올 리 없었고, 그 축에도 못 드는 진짜 어린 녀석들은 따로 선별해서 다른 갯벌에 다시 뿌려야 하는데 그 생명의 건강성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바지락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미친 짓도 최고 등급의 미친 짓이었다. 어리둥절하게 강제 이주를 당해서 간신히 주변 환경에 적응돼 가고 있는 참에 또 강제 이주를 당한 것이니,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는 절망에 빠질 법도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가. 법이었다. 법이라는 글자 앞에서 갯마을 사람들은 언제나 허약했다.

면밀히 들여다보면 갯마을 사람들의 행위 중에 불법 아닌 것은 거의 없었다. 법이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도 않거니와, 만들어져 있다 해도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며 코걸이가 되는 식이었다. 마치 도시의 노점상을 단속하듯이, 과속차량을 단속하듯이 해경의 눈에 띄면 불법이요 눈에 안 띄면 합법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벌금이든 과태료든 해양경찰의 뒷주머니든 새빠지게 일해서 번 돈을 억울하게 ‘뜯겨’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법이라는 이름은 이제 갯마을 사람들에게 있어 호환마마보다 지독한 무엇으로 인식돼 있었다. 오죽하면 이런 소리를 다 할까.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뒤에 해양경찰 없앤다는 말을 했을 때 얼매나 반갑고 고맙던지, 야아 진짜 이제부터는 살 것 같다 싶더만.”

해경을 없앤다 해서 그 속성까지 없어질까마는, 갯마을 사람들은 해경을 없앤다는 발표 하나에서 희망을 품어야 할 정도로 법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런 와중에 내용증명이 배달되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소송을 하겠다는 것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던가. 소송이라는 게 얼마나 지루하게 사람의 피눈물을 빼버리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터이었다.

어쩔 것인가. 일단은 갯벌에 뿌려놓은 바지락을 땅 주인의 요구대로 캐내면서 협상을 해보는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십여 일쯤 지났을 때, 협상은 드디어 완료되었다. 그것은 사실 협상이랄 것조차도 없는, 더불어 살아야만 하게 되어 있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주고받는 상식과 품성에 관한 문제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양식장 일 년 사용료로 현금 오천만 원을 요구한 그녀는 정말로 현금 오천만 원이 욕심나서 그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열흘 이내에 바지락을 죄다 캐내지 않으면 소송을 걸겠다는 내용증명을 보낸 것 또한 정말로 열흘 이내에 바지락을 캐내지 않으면 법으로 해결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런 것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현금 오천만 원은커녕 단돈 오천 원도 필요 없이, 그냥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양식장을 비워준다는 조건 아닌 조건의 합의를 보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인가. 그제야 사람들은 이혼한 여자의 입장에서 해석을 해보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께 나라도 그렇게밖에는 못 했을 것 같더만. 아 옛날의 서방놈이 자기한테는 말 한 마디 없이 자기 재산을 빌려줘 버리고 종패를 십 톤이나 받아 처먹는다는디 눈 안 뒤집어질 여자가 어느 세상천지에 있겠냔 말이제.”
“그러고 보면 남편의 입장도 이해를 해줘야 써. 아 막말로 삼십 년도 넘게 부부로 살아 왔는디 말이여. 그동안 뭔 일이 있었는가는 모르지만 하여튼 마누라가 느닷없이 사라져버린 것이잖여. 응? 안 그려? 인생 최대의 사업이라는 결혼이 패망해 버렸는디 말이여. 그런 판에 뭔 사리분별이 제대로 됐겠는가 이 말이제.”
“그러면 뭐여. 누가 잘못을 한 것이여?”
“아 시방 그것을 따져서 믓할 것이여?”
“그것 참, 허헛 참.”

사람들은 한숨 놓았다는 심사로 하늘을 보며 허허, 웃는 것밖에는 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결론이 그렇게 정리가 되고 보니, 피해자 아닌 사람이 없었고, 가해자 아닌 사람 또한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일단은 하늘을 보며 바람 빠지는 소리의 웃음이라도 웃어보는 수밖에.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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