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진단> 군대 폭력, 그 심각한 실태-2회: 전역자 박모씨 사례


‘윤 일병 사망사건’의 충격이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국방부를 비롯한 군 당국은 사건을 은폐하려다 거센 후폭풍에 직면했다. 가해자 이모 병장 등 병사 4명은 가혹행위와 구타 등 상식을 초월한 괴롭힘으로 윤 일병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24시간 365일 폐쇄된 군대에서는 ‘국방의 의무’라는 신성한 이름으로 ‘인격 살인’이 자행되고 있다. 같은 인간임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범죄 행위가 병사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군내 가혹행위는 창군 이래 근절된 적이 없었다. 억울한 죽음은 ‘군대 부적응’이라는 핑계로 은폐됐다. 윤 일병 사망 사건 역시 군 당국은 평소처럼 사건을 감추려 했다. 하지만 윤 일병의 시신은 가혹행위를 은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고문을 당한 것처럼 온몸에 멍이 들고 흉터투성이였다. 문제는 이 같은 일들이 군 전체에 만연돼 있다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3일에 1명씩 군대에선 자살이나 사고사로 병사들이 목숨을 잃는다.
대한민국에서 군대는 성역이다. 외형상 군사독재가 무너졌지만 군대는 여전히 성역으로 남아있다. 아직도 타살을 자살 또는 사고사, 병사로 처리했던 사건을 바로 잡기 위해, 자살자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 결과 개인적인 문제 때문이었다고 발표된 자살 사례 대부분이 구타와 가혹 행위, 성추행, 과중한 업무 관리, 관리 소홀 등이 주원인이었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지금도 군 어디에선가는 또 다른 윤 일병이 도움을 청하고 있을지 모른다. 실제 윤 일병 사건이 터진 28사단에선 또 다시 2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위클리서울>은 과연 그들이 도대체 왜, 어떤 방법으로 후임들을 괴롭히는지 군인권센터가 수집한 사례와 수사 기록, 전역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이번엔 가혹행위와 구타에 시달린 전역자 박모 씨의 이야기를 일기 형식으로 엮어봤다. 박모 씨는 경상도 소재 한 탄약부대 출신이고, 이 부대는 최근까지도 구타 사건이 끊이지 않아 논란이 된 곳이다.







배는 때리지 마, 죽을 수도 있으니…

나는 2000년 9월에 전역했다. 당시 나는 조금은 특수한 케이스의 육군 상근예비역이었다. 26개월 근무 기간 중 12개월(훈련소, 이등병, 일병)은 군대에서, 나머지 14개월(상병, 병장)은 거주지 주민센터에서 출퇴근하는 근무 형태를 말한다. 군생활에서 가장 힘든 시기인 1년간은 정상적으로 군에 간 장병들과 마찬가지로 훈련병, 이등병, 일병 생활을 경험한 것이다.

훈련소를 마치고 나는 경북의 한 탄약부대에 배치됐다. 고된 훈련이 끝내고,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자대로 향했다. 힘든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말이다. 보급부대의 특성상 주로 초소나 보급창고에서 근무를 서는 일이 많아 훈련도 거의 없다는 점이 자대로 향하는 마음을 더욱 가볍게 했다.

그러나 부대 내무실에 들어오는 순간 모든 기대는 한 순간에 무너졌다. 동기는 5명이었고, 그 중 나와 다른 동기 1명은 상근예비역이었다. 상근예비역이라고 차별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다. 고참들은 가혹행위와 구타에서만큼은 평등했다. 내무실에선 항상 ‘각’을 잡고 앉아 있었다. 관등성명 등은 중대가 떠나갈 정도로, 절규하는 심정으로 복창해야 했다. 목소리가 작을 경우엔 기합이나 욕설, 구타에 시달려야 했다.

자대 배치 2주차. 2명의 상병 고참이 나를 포함 우리 동기 3명을 행정반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간부를 향해 “충성. 초소 근무 요령 가르치고 오겠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 부대엔 특이한 전통이 있었다. 자대 배치 2주차가 되면 각 초소를 돌며 소대 고참들에게 초소 근무 수칙 등을 배운다는 것이다. 초소는 세 곳이었고, 세 초소 모두 돌아도 걸어서 3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초소를 도는 데엔 무려 3시간이 걸렸다. 3시간 동안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흔히 ‘초소 돌기’라는 이 전통은 이등병에게 있어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각 초소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가혹행위와 구타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명분은 있었다. 명분이 있으니 간부도 알면서 모른 척, 이 ‘초소 돌기’를 허락해주는 것이다. ‘초소 근무 수칙을 제대로 못 외운다’, ‘간부 차량 번호를 못 외운다’, ‘목소리가 작다’ 등 여러 이유를 대며 주먹을 휘둘렀다. 2명의 상병은 그렇게 우리들을 군화신은 발로 밟기 시작했다.

“야, 배는 때리지마.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

주로 등이나 다리, 얼굴 등을 가격했다. 코피가 나거나 혀가 찢어진 동기도 있었다. 원산폭격을 하고 있는 가운데 두 고참은 두 발로 세 명의 등을 올라타 개울가를 바위 딛고 건너듯 이러저리 뛰어다녔다. 3시간 동안 우리 동기 셋은 거의 망신창이가 되었다.

그렇게 ‘초소 돌기’가 끝났고, 고참들은 수고했다며 PX에 데리고 가 과자와 음료수를 사먹였다. 과자와 음료수로 보상이 될 리 없었다.

“이곳은 지옥이구나.”

두려움과 공포에 떨어야 하는 날이 반복됐다. 훈련도 없고 구타도 없는 후방부대라고 여겼지만, 훈련이 없는 대신 구타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병들은 공개적으로 구타를 했고, 일병들은 몰래 가혹행위를 하거나 구타를 일삼았다. 일병들은 주로 새벽에 자고 있는 이들을 깨워 화장실 등으로 끌고 가 주먹을 휘둘렀다. 시간이 지나니 오히려 맞지 않는 게 불안했다. “하루라도 안 맞으면 몸에 가시가 돋는다”며 한숨을 쉬는 동기도 있었다.    


술 마시고 구타

그렇게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낯선 차 한 대가 중대 앞에 섰다. 사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기무사에서 나온 상사 계급의 하사관이었다. 부대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기무사에서 구타 소식을 알고 부대를 찾아온 것이다. 사건의 중심에 ‘초소 돌기’가 있었다. 가장 최근에 초소를 돌았던 우리 동기들이 조사 대상이었다. 동기 중 한 명이 ‘소원수리’를 통해 중대장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사실 소원수리를 작성한 동기는 ‘초소 돌기’에 참가한 동기가 아니다. 초소 근무를 서는 동안 나머지 동기들이 구타를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이후, ‘동기들을 위한다는 마음에서’ 소원수리를 작성했다. 그리고 중대장은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기무대로 연락, 조사를 요청했다.  

나를 비롯한 소대원 전원이 1명씩 조사실로 끌려갔다. 어차피 기무사의 타깃은 우리 소대였다. 고참들은 “맞은 적 없다고 하면 된다. 가끔씩 이런 일이 있다. 저 사람들(기무사)에겐 무조건 잡아떼면 아무 일 없다”며 소대원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나와 나의 동기들은 기무사 하사관에게 주눅이 들어 모든 것을 발설하기에 이른다.    

“다 알고 왔다. 누가 때린 지 다 적어! 제대로 안 적으면 네가 영창 간다!”

맞은 것도 죄였다. 맞은 것도 억울한데, 맞았으니 영창 간다는 협박과 회유가 이어졌다. 좀 어이가 없었던 건, 이 하사관은 내가 조사실에서 나오자마자 구타와 가혹행위에 중심에 있었던 고참들을 순서대로 조사실로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내무실로 들어오자 모든 고참들이 나의 얼굴만 쳐다봤다.

“너도 불었구나.”

고참 1명이 영창에 갔다. 가장 심하게 폭력을 일삼았던, ‘초소 돌기’의 주인공 상병 고참 둘은 조사 도중 갑자기 아프다는 핑계로 병원 신세를 졌다. 나와 나의 동기 입장에서 보면, 정말 병원이 아닌 영창을 가거나 구속돼야 할 고참은 그들이었는데 말이다.  

기무사 하사관이 부대를 한 번 다녀가니 부대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부대 내 군기교육대가 가동 돼 우리 소대는 유격훈련과 같은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후 나와 나의 동기들은 ‘배신자’로 낙인 찍혀, 2개월 가까이 ‘왕따’를 당해야 했다. 이른바 ‘기수 열외’였다. 때리지도, 기합을 주지도 않았다. 다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고, 동기들끼리도 말을 하지 못했다. 외로운 묵언수행이 2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차라리 맞을 때가 좋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2개월 정도가 지나자 구타와 가혹행위가 다시 활개쳤다. ‘왕따 해제’가 되면서 부터다. 기무사가 ‘언제 어떻게’ 다녀간 일이 있었는지도 무색해졌다. 일병 계급을 달아도 바뀌는 건 없었다. 야삽으로 맞아 머리가 찢어진 일병도 있었다. 한번은 소대장이 “너 머리가 왜 이러느냐”고 묻자, 그 일병은 “축구하다가 넘어졌다”고 말했다. 축구해서 나올 상처가 아니었다. 그러나 “축구 너무 열심히 하지 마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소대장은 왜 이마가 찢어졌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술 먹고 휘두르는 병장의 주먹에 맞아 이가 부러지거나 코가 내려앉은 이등병, 일병들도 있었다. 때론 상병도 거기에 끼어 희생양이 되곤 했다. 병장 계급에 오르기 전까지는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병장만이 ‘신’인 이 특수한 부대에서 다행히 나는 1999년 어느 여름, 일병 생활을 끝으로 ‘탈출’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병, 병장 생활을 고향인 부천의 한 주민센터에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 뉴스에서 내가 소속됐던 부대 소식을 접한다.

“10년이 넘었는데… 저 부대는 아직도 저러는구나.”

때론 쑥쑥 자라나는 아들 녀석을 보면서, 언젠가 능력만 되면 ‘반칙’을 통해 군 면제라는 선물을 안기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오진석 기자 ojs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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