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남보다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 다른 하나는 자신보다 남에게 엄격한 사람. 아니, 사실은 한 사람에게도 이러한 이중적 성질이 공존하고 있다. 어떤 성향이 더 두드러지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나는 아마, 대부분의 경우에 자신보다 남에게 엄격한 사람 쪽에 속한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 자신보다 남에게 엄격하다. 흔히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스스로는 쉬이 용서하는 반면, 타인의 실수에는 유독 깐깐한 비난의 잣대를 들이댄다.

난 줄곧 이러한 점에 대한 경계를 받아왔다. 간접적으로 타인의 행동을 통한 반면교사든, 타인의 입을 통해 듣는 직접적인 경고든, 자신에게 더 유한 잣대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 반성할만한 계기가 때때로 한 번씩 찾아온다. 그때마다 나는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마치 나는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엄격하다는 것은 어쩐지 결점 없이 완성된 자아인 듯 느껴졌다. 타인에게 유한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는 타이트하게 생활을 검열한다면 곧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보통 깐깐한 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 그다지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지 않는가. 이런 성격을 갖춘다면, 인망은 잃지 않되 자기발전에는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완벽하고 지향할만한 성향이라고 생각했다. 성인군자나 과거 위인들 모두 아마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혼자 그렇게 단정 짓곤 하였다. 하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나 자신에게만 유독 용서가 쉬운 만큼이나, 나 자신에게만 유독 엄격한 것 역시 독이 된다.







타인에게 엄격한 것은 자신에게 엄격한 일보다 훨씬 쉽다. 반성보다는 비난이 쉬운 것과 같은 이치다. 스스로 반성하고 자신을 고치는 일은 큰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반면 타인을 비난하는 일은 그저 강물에 돌멩이를 던지듯 그냥 던지기만 하면 된다. 상처를 입지도 않고, 그 파장을 감내할 필요도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방의 일이다. 게다가 내 허물보다는 타인의 허물이 눈에 더 잘 들어오는 법이다.
나의 경우는 전후 사정을 다 고려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반면 타인은 잘못 하나만 놓고 판단한다. 그러다 보니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상황이 종종 연출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은 나의 모습을 많이 돌아보게 한다.

나 역시 스스로에게 한없이 보드라운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난을 함부로 입 밖으로 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내가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순간 아주 쉽게 뭐 묻은 개의 상황을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입단속에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서, 내심에 있는 비난이 없었던 것이 되는 건 아니다. 비난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스스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타인들을 멋대로 한심해하고 몰래 낮추어본다.

내가 하나도 나을 것이 없고, 때로는 더 나쁘기까지 한데, 아무도 모르게 상냥한 낯 뒤로 타인을 깔아뭉개며 의기양양했던 것은 아닌가. 본질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만 엄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이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것은, 내가 생각한 만큼 좋은 일은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유한 만큼, 딱 그만큼 나쁜 일이었다. 내 친구 중 하나가 이 부류의 인간이다.

그녀는 나와 달리, 타인의 행동에는 그럴만한 이유를 어떻게든 찾아내는 반면, 자기 자신의 일은 덮어 놓고 비난하고 반성한다. 친한 친구로서, 그런 그녀를 바라볼 때면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그녀는 많은 경우에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보다 적은 것을 이룬다. 반성이 잦으니 쉬이 움츠러들고, 운신의 폭이 상대적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다.

내가 그런 그녀의 성향에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때가 있다. 거울 앞에 서서 군살을 이리저리 꼬집어 볼 때나, 얼굴의 못난 부분이 거슬리는 그런 때. 유독 내 스스로에게는 다 괜찮은 나지만, 아무래도 내 외모만큼은 타인의 외모만큼 아무래도 좋은 것일 수 없는 일이다. 막말로 남들이 몇 킬로 찌는 거야 내가 무슨 상관인가. 약간 살이 붙었다 정도인 것뿐이지만, 그게 내 일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른 여자가 60킬로가 넘는대도, 넌 키가 있으니까 괜찮다 얘기하지만, 막상 나는 키가 크더라도 그만큼 살쪄 있어선 안 된다.

아마 내 친구도, 매사에 이런 마인드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녀는 정말 누가 봐도 예쁜, 인형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모자란 부분만을 바라본다. 코끝의 애기 손톱만한 흉이라든지. 표준체중인 내가 스스로의 뱃살을 코끼리 뱃살인 듯 바라보는 그런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스스로를 쉽게 비난하는 것 사이에는 깊은 관련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스스로에게 엄격하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것은 스스로를 너무 사랑해서일수도 있고, 추구하는 이상이 너무 높아서일 수도 있고,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만 계속해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다 보면, 스스로를 사랑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스스로에게 그런 비난을 퍼붓는 것이 스스로를 얼마나 힘들고 아프게 하는 일인지 미처 깨닫지 못한다. 무능하고 뚱뚱하고 못생긴 나 자신에게 무능하고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냥 현실을 직시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척은 있는 대로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냥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뿐이다.

내 친구에게, 너는 멋지고 예쁘다, 그런 흉터는 발견하기도 쉽지 않다, 아무리 얘기해 줘도 친구는 그 말을 ‘고맙게도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해주는 구나’ 하고 여긴다. 하도 답답하여, 친구에게 어디선가 들은 얘기를 해주었다. 그날은 아마, 취업 준비로 힘들어하던 작년의 겨울, 그러니까 한 일이월쯤의 일이었던 것 같다. 늦은 졸업후에도 취업 준비가 길어지고 있는 자신에게 또 비난을 퍼붓기에(심지어 나 역시 그러했는데, 나에게는 무슨 이유를 들며 자신과 달리 너는 괜찮다고 했다), 그렇게 비난할 만한 일은 아니라 하였지만 역시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너는 게으르고 안일해서 졸업도 늦고 취업도 늦어지고 있다고 하였지. 저기 네 앞에, 몇 년 전의 네가 앉아 있다고 생각해보렴. 대학에 갓 입학한 스무 살의 너. 혹은 더 어린 너일 수도 있겠지. 걔한테도 게으르고 안일하다고 말할 거니? 넌 매일 매일 그런 얘기를 스스로에게 해주고 있는 거야. 자기 자신을 괴롭히지 마.’

모든 좋은 것은 균형이다. 여기서의 균형은 미적지근한 그런 가운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남들에 대한 잣대와 자신에 대한 잣대를 완전히 평등하게 만들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저 가운데를 좇는 것일 뿐이다. 팔팔 끓는 물과, 얼어버릴 듯 차가운 물이 너무 극단적이라며 매사 미지근한 물을 쓰는 것과 같은 모양이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은 각 쓰임이 다르니, 그 적재적소에 알맞게 쓰면 되는 것이다. 지금껏 늘 뜨거웠다면, 차갑게 식혀서 미지근해질 것이 아니라, 언제 차가워야 할지를 알고, ‘필요한 때’에 그리하면 될 따름이다.

엄격함 역시 마찬가지다.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할 때가 있고, 스스로에게 유해야 할 때가 있다. 언제나 엄격하거나 언제나 유한 것이 문제가 되므로, 필요한 때에 맞게 스스로에게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잘 결정하는 것이 균형이다. 지난 일과 같은 잘못을 다신 하지 말아야겠다는 필요성이 느껴질 때는 어떤 잘못이 있었는지, 어떤 부분을 고쳐야 하는지를 스스로 엄격하게 짚어 반성하여야 한다. 이런 때마저 자기 자신에게 말랑말랑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발전 없이 정체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용기와 힘이 필요한 때는 마치 어린 나를 미래의 내가 응원하듯이, 그렇게 나의 나름의 이유와 장점, 멋진 점들을 발견해주고 기운을 북돋아줄 필요가 있다. 이런 때에 스스로의 모자란 점을 가혹하게 비난한다면 스스로가 자신의 날개를 꺾는 셈이 된다. 균형은 이런 것인 것 같다. 굳이 내 자신의 성향을 완전히 바꾸려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그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것. 치우침이 없이, 매몰됨이 없이. 그렇지만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것. 비록 아직 생각도 짧고 모자라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법학전문대학원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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