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이 글은 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이신 조광환 선생님(전북 학산여중)이 들려주는 청소년을 위한 동학혁명이야기입니다.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고 그 의미를 상기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란 생각에서 연재했던 것을 독자님들의 적극적인 재 연재 요청에 의해 다시 한번 게재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그 어떤 다른 지역보다도 호남지역이 더욱 심했답니다. 그때의 상황을 당시 선비였던 매천 황현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감사와 유수는 매년 한 번씩 교체하였고 매달 대여섯 차례씩 전형관을 불러 인사행정을 열었는데, 미리 전국에서 부자를 뽑아 억지로 참봉(參奉), 도사(都事), 감역(監役), 등 초년 벼슬을 주었다. 매년 응제과(應製科)를 십여 차례나 열었으며 아울러 대소과도 함께 뽑았다. 처음에는 관직을 사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팔았으나 나중에는 이 또한 억지로 떠 안겼다.

매번 격년으로 증광과(增廣科)를 열었고, 매 식년(式年) 마다 소과를 실시하여 방을 붙였는데, 그 원인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매번 수령을 교체할 때는 임시 직함을 어느 정도 판 다음, 실제 직함을 팔았다. 감사와 유수자리는 엽전 백만 꾸러미에서 40~50만 꾸러미요, 초사(初仕)는 5천 꾸러미에서 만 꾸러미였다. 대과는 5만 꾸러미에서 10만꾸러미이고, 생원시 같은 소과의 경우 2~3만 꾸러미로 등급에 따라 가격이 달랐다. 차함(借啣) 또한 2~3만 꾸러미를 호가하였고, 증직(贈職)과 정려(旌閭)는 불과 수천 꾸러미를 호가하였다.

이렇게 되자 시골의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이 줄을 지어 서울로 들어와 그들의 원한을 갚기 위해 벼슬을 사고 과거를 샀다. 수령의 봉급은 모두 지방의 토산물을 진상하는 복정(伏呈)과 어거지로 떠안기는 연보(捐補) 및 탄신일에 내는 축하금으로 모두 들어가, 벼슬을 사기 위해 들였던 원가를 보상받을 수 없었다.

이에 고기잡고 사냥하는 평민들까지 매질하고 족쇄를 채워 빨아먹었으므로 부자들까지 가난하게 되었다. 이湧� 이름은 ‘관장(官匠)’일 뿐 사실은 강도들이었다. 구실아치들은 여기에 빌붙어 간교를 부리며 거두어가는 것이 날마다 늘어나니 위 아래 수천 리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생산하는 모든 산업이 파괴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백성들은 더 이상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여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났는데, 이를 ‘민란(民亂)’ 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최근에는 욕심을 채우는 더러운 일들이 날로 늘어났는데, 호남은 재물이 풍부하여 그 욕심을 채워줄 만하였다. 무릇 이곳에서 벼슬을 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양이나 돼지처럼 여기면서 마음대로 묶고 빼앗았으며, 일생동안 종과 북을 치면서 사방에서 빼앗았다.

이리하여 서울에서는 ‘아들을 낳아 호남에서 벼슬을 살게 하는 것이 소원이다’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이에 관리는 도척(盜尺)이 되고, 아전은 창귀(脹鬼)가 되어 살을 깎고 뼈를 바르며 거두었고, 그 부정한 축재물을 나누어 가지는 데 참여하였다.』

척양척왜와 세계화 

요즘 ‘세계화’란 말이 유행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화’란 자본, 노동, 상품, 서비스, 기술, 정보 등이 주권과 국경의 경계를 넘어서 조직, 교환, 조정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세계화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세계화가 평등한 국가 대우, 동등한 기회 부여, 자유로운 경제활동, 경제활동의 공동 참여, 민주화 세계의 전개 등을 초래시키며 이는 대륙의 기류나 해양의 조류와 같은 것이어서 저지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일종의 자연적 현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세계화’의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은 이러한 시장 자유화를 동반한 세계화는 전적으로 선진국에게 유리한 것이며, 후진국의 경제발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며, 선진국 경제에 후진국이 종속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세계화는 이익을 보는 계층과 손해를 보는 계층을 극명하게 나눠 놓으므로써 분쟁과 갈등을 증대시키는 면도 있겠지요.

예를 들면 최근의 농산물시장의 개방에 따른 우리나라 농민들의 피해, 자본의 대량유입과 대량유출에 따른 외환 위기의 위험성 등 개발도상국을 비롯한 중진국이나 후진국이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는 부담이 상당해요. 아직도 이들간의 논쟁은 마무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를 거울로 삼아 그 해법을 찾을 수 있다면 이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겠지요.

역사적으로 볼 때 조선은 이미 1870년대~80년 대 ‘세계화’의 체제에 그것도 불평등하게 편입되었다. 19세기 후반 안으로는 조선사회 내부의 모순이 표출되고 밖으로는 자본주의를 앞세운 서양열강의 침략이 노골화되어 ‘세계적 제국주의 체제’라는 강풍을 만난 가랑잎배와 같은 신세였답니다. 당시 조선정부는 외세의 개항요구에 세계정세에 대한 지식도 대응 방안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지요.

결국 조선은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문호를 개방했기 때문에 불리한 조건 속에서 세계체제로 편입되었지요. 강화도 조약으로 대표되는 불평등조약 체제는 결국 식민지화의 시초였답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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