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관심


현대인들은 타인에 삶에 깊게 관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복잡한 일에 휘말릴까봐’, ‘별 의미 없이 한 말에 골치 아픈 일이 생길까봐’, 이유가 다양한 듯하지만 사실은 하나다. 남의 일에 책임져야 할 것이 두려운 것이다. 책임의 무게는 그만큼 두렵고 또 예측하기가 힘들어서, 대상이 가족이나 아주 친한 사람이 아니라면 타인의 삶에 쉬이 간섭하기 힘들다.
얼마 전 밤, 학교에서 돌아와 물먹은 솜 같은 몸을 침대에 누이고 있는데 창 밖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내 귀에는 그것이 분명 겁에 질린 듯한 여자의 목소리로 들렸기에, 튕기듯 창가로 달려가 소리의 근원지를 살폈다. 행인들이 몇 지나가고 있었지만 여자는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린 듯한 비명소리는 그 한번을 마지막으로 더는 들리지 않았다.

나가서 확인을 해봐야하나 하고 잠시 갈등했지만, 그닥 용기가 나지 않았다. 화장도 다 지운데다 잠옷만을 대충 걸친 상태기도 했고, 이 밤에 혼자 나가봤자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슬몃 들었다. 가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린 대학생들이 저렇게 깜짝 놀랄 소리를 내며 장난을 치곤 하니까, 별일 아니겠지 하고 억지로 합리화를 했다. 비명이 한번뿐이었고, 나는 약간 찝찝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신고를 한다거나 하는 것도 너무 오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서 포근한 이불안에 몸을 밀어 넣었다. 잠들기 직전까지 나는 눈을 감고, 아까의 그 비명소리가 정말로 끔찍한 사건이었다면 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감은 눈을 스크린 삼아, 수많은 강력범죄와 그에 희생되는 어떤 내 또래의 여자 모습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그 소식을 접하는 나의 얼굴. 그 얼굴만큼은 달걀귀신처럼 이목구비가 비어진 상태였다. 내 표정을 도무지 그려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언젠지 모르게 나는 잠이 들었고, 잠들기 전에 그런 흉흉한 생각을 한 탓인지 밤새도록 악몽을 꾸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도 무슨 나쁜 소식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는 내 귀에 들리지 않고 있다. 하긴 요즘에 내가 상상했던 사건들 중 몇 가지 정도가 실제로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사건이 뉴스에서 다루어지는 일은 잘 없다. 아주 특이하거나 끔찍하지 않은 이상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날의 그 비명이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고 여길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그날의 나와, 아무 일 없는 듯 지나치던 행인들의, 무관심함과 비겁함, 끔찍한 자기합리화를 기억한다.

그들과 나는 비명소리를 들었고, 그 비명소리는 어떠한 비극을 담고 있었으며, 우리는 모두 어떤 행동을 취하는 대신에 그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하던 일을 태연하게 계속 했다. 그들은 잡담을 나누며 걸었고,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잠을 잤다.

마지막 장이 분실되어 버린 연작소설을 대하듯, 나는 이 비명을 머릿속으로 굴리고 변형하며 계속해서 그 완결이 어떤 모양인지 생각했다. 만약 그 비명의 주인이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분명 어마어마한 죄책감에 시달려야 할 테지. 그 비명소리의 주인이 나라면, 아무도 나의 비명소리에, 내가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그 상황에서 나는, 얼마나 절망스러울 것인가. 설령 그것이 진짜 철없는 여자애가 장난치다가 낸 소리라 하더라도, 내 귀에 만큼은 겁에 질린 듯한 소리로 들렸다면 나는 그를 확인하는 게 옳았는지도 모르겠다. 내 이웃에는 학교 사람들이 아주 많이 거주하고 있고, 마음만 굳게 먹었다면, 또래 남자애를 하나 불러 확인해 보는 것도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사실 마음속 깊이, 정말 내가 걱정하는 ‘그런 것’을 목격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비명의 진상보다 내 진짜 마음을 마주하는 게 두려워 이불 속으로 도망가 버린 건지도 모른다.

비겁한 나와 같이, 사람들은 타인의 일에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칫 어떤 흉흉하고 끔찍한 일에 말려들까봐 두려워한다. 극단적으로는, 자신 때문에 용기 내어준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이 있었다. 용감한 청년 하나가 나쁜 일을 당하고 있던 여성을 위해 가해자에게 덤벼들었다. 여성은 덕분에 그 가해자로부터 벗어났고, 가해자와 청년은 몸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의 일이었다가, 이제는 청년의 일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그 여자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도망가 버리고 만다. 유일한 증인인 그녀가 도망간 상황에서 청년은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하는데 곤란을 겪었다는 이야기다.

청년은 후에 이 사건을 인터넷에 올리면서 섣불리 사람을 돕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리고 그 글 밑으로는 나와 같이 비겁한 사람들이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동조하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 용감하게 나서준 청년을 두고 도망가 버린 그 여자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너무 무서워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요즘 같은 세상에, 자신을 위해 용기를 내준 청년을 두고 가버려서는 안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비겁해지는지 알기에, 그 청년이 얼마나 어려운 용기를 낸 것인지 느낄 수 있다. 폭행범으로 몰려 경찰서에 앉아 있는 그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까. 용기의 대가가 이런 것 인줄 알았더라면, 가해자에게 얻어맞은 부위보다 옳은 일을 하고도 후회로 가득한 마음이 더 아팠을지 모르겠다.

청년에게 감정이입해서 생각해보니 도망가 버린 그녀에 대해 화가 울컥 솟는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나는 정말로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가.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특별히 그 청년이 용감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타인의 삶에 기꺼이 관여하고, 그 타인을 위해 책임을 나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사실 아무런 고민 없이 쉽게 타인의 삶에 간섭한다. 사람들이 명절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다. 너는 성적이 어떻니, 대학은 어디 갔니, 사귀는 사람은 있니, 왜 이렇게 살쪘니, 연봉은 얼마나 되니, 결혼은 언제 할 거니, 노후준비는 하고 있니, 아이는 언제 가질거니, 승진은, 집은, 차는, 아이의 성적은….

이런 간섭들엔 자신의 책임이 완전히 배제되어있다. 그저 애정 어린 척 다그치는 것일 뿐이다. 간섭만 늘어놓으면서, 이것이 관심인 줄 착각하곤 한다. 진정한 관심은, 타인의 삶에 ‘나’를 공유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은 쏙 빼고, 그저 손가락만 꺼내들고 먼발치서 왜 그렇니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간섭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분은 기분이 나쁜 것들이다.

완전한 타인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쉽게 간섭한다. 그들의 삶이 어떤지, 그 삶을 대하는 가치관과 마음가짐이 어떤지 하나도 헤아리려 하지 않은 채, 동시에 스스로는 그 어떤 책임을 지는 것도 용납하지 않은 채, 아주 쉽게 피상적인 간섭으로 타인을 괴롭게 한다. 지나가는 여자를 향해, “뚱뚱하면 치마를 입지 말라” 수근 거리는 것도, 댓글 창에 익명을 빌어 충고인 척 “이렇게 할 거면 하지마라” 낄낄거리는 것도, 그냥 아무런 무게 없는 간섭에 불과하다. 나 자신을 드러내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을 떳떳하게 지는 것이 아닌 간섭은 단순한 ‘오지랖’에 불과하다.

오늘날은, ‘무슨 일입니까’ ‘지금 이 여자 분한테 뭐하시는 거죠?’ ‘새치기 하시면 안 됩니다’ ‘이 아저씨한테 욕하지 마세요’ 같은 ‘필요한 관심’은 없고, ‘왜 이렇게 살쪘니’ ‘공부 잘하니?’ ‘연봉 얼마니?’ 같은 ‘불필요한 오지랖’만이 가득하다.

타인의 삶에 어떤 교집합을 만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체를 잊어버린 것처럼, 사람들은 진정한 관심을 거두고, 단지 자격 없는 간섭만을 남발한다. 타인의 비난과 시선은 전보다 많이 신경 써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사회는 점점 더 척박해지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타인의 삶에 다가가는 것은 비난의 손가락만이 아니라 온전한 ‘나 자신’일 때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나서는 것에 오늘날처럼 용기가 많이 필요하지 않은 내일이 빨리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법학전문대학원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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