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오래 벼르던 소풍을 다녀온 뒤



# 배맨바위


내가 살고 있는 해리에서 선운산 도솔암 쪽으로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아담한 오솔길이 열려 있다는 것은 고창 사람들에게 일종의 상식이었다. 고창 사람이 아니라도 선운산을 많이 다녀본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나 역시 그 길을 안다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내가 그 길을 직접 밟아본 적은 없었다. 누군가에게 들은 풍월로 그저 누군가가 물어보면 “아 거기 그쪽 길로 가면 삼사십 분이면 도솔암에 닿을 수 있어”, 하는 식으로 아는 체만 무던히도 해왔었다.

아는 체를 하는 순간까지도 자신만만하게 그런 말을 하지만, 그 말이 끝난 뒤에는 혼자 속으로 “아차, 나는 그 길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하면서 언제인가는 반드시 한 번 가 봐야지, 가 봐야지, 하면서도 가보지는 못하고 세월만 까먹고 있었다. 그 세월이 장장 이 년 모자라는 십 년이었다.

생각하면 참 뻔뻔도 했다. 알지도 못하는 길을 어찌 그리도 자신만만하게 십 년 가까이나 아는 체를 열심히 해 왔던 것인지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다 싶기도 하지만 뭐, 어쩔 것인가. 어쨌든 이번에 그 길을 드디어 가 보기로 했다. 낫으로 손가락을 베어버린 덕분이었다. 마당에 나무들이 너무 무성해서 가지를 치다가 손가락 마디를 찍었는데 피가 엄청 나왔다. 그 손으로 갯벌 일을 할 수가 없어 며칠 쉬기로 했다.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나를 보며 함께 사는 내여자 그녀가 “도솔암 가요, 도솔암 가요”, 소리를 하루에도 네다섯 번씩은 하고 있었다.

“그려, 가자, 가자, 이번에 한 번 가보자.”

그렇게 길을 나섰다. 그녀가 내 옆에 없었다면 이번에도 아마 그 길을 밟아볼 생각은 못해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도솔암에 무슨 특별한 연고가 있었던가? 아니었다. 그녀가 얼마 전 고향을 다녀왔는데 그때 고향의 선배언니가 “고창에 있다고? 그러면 도솔암 가봤겠네?”하더란다.




# 오솔길 초입



그녀의 고향 영남에서는 고창의 도솔암이 참 많이 알려져 있었다. 불교 신도가 많은 까닭이었고, 이른바 기도발이 좋은 곳을 찾는 사람 또한 많은 까닭이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선운산이나 선운사는 몰라도 선운사의 말사인 도솔암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정도였다. 도솔암의 기도발이 대구의 팔공산 갓바위에는 미치지 못한다 해도 그에 필적할 만은 하다는 소문 덕분이었다.

우리는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는 배맨바위를 바라보며 걸었다. 햇빛이 짱짱한 날이었다. 하늘 또한 높았다. 아직 단풍은 일러도, 가을 냄새는 도처에 물씬거리고 있었다. 산의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알밤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일명 쥐밤, 혹은 도토리밤이라 해서 크기는 아주 작지만 당도가 매우 높은 알밤을 각자 서너 개씩 주워들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우리의 눈에 새빨갛게 피어 있는 꽃무릇이 들어왔다.

“아따야, 언제 이것들도 여까지 옮겨 심어놨네 잉?”

울창한 나무 숲 그늘 속으로 피어 있는 꽃무릇의 색감이 유난히도 짙었다. 안 그래도 보면 그냥 뭔가가 슬퍼지는 꽃이었다. 색깔이 진하고 보니 그 슬픔이 배가돼서 뭔가 자꾸 엄숙해지는 느낌이었다. 생각 또한 많아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무 생각 안 했다고 해야만 할 정도로, 딱히 무슨 생각이랄 것조차도 없는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가 스러지고 또 일어나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내여자 그녀는 씩씩하게 통통 소리를 내며 올라가고 있었다. 경사가 삼십을 넘어 사십, 오십, 육십 도에 이를 정도로 강파른 바위턱을 그녀는 쓱쓱 잘도 넘었다. 처음에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식으로 이야기도 나누며 걸었지만, 경사가 심해질수록 그녀는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포수처럼 역동적이 돼가고 있었다. 그렇게 고무인형처럼 통통거리며 올라가고 있는 그녀의 뒤를 힐끔 한 번 보고 나니 문득 한 소리가 내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 배맨바위를 바로 밑에서 보면~



나도 한때는 산을 다람쥐처럼 타고 놀았더니라,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게 다 쓸데없는 자만이더라, 산이란 모름지기 천천히 음미하면서 올라야 한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차마 그녀에게 그 말을 하지는 못하고 땀이나 삐질삐질 흘리고 있던 순간의 나는 아무래도 열등감의 포로가 돼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었다. 나이 차가 이십 년이나 된다는 데서 오는 심각한 그 무엇, 그 무엇을 가슴에 안고 헉헉거리며 커다란 바위중턱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렇게도 시원하게 탁 트여 보일 수가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를 비롯해서 해리면 전체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연노랗게 익어가는 벼이삭의 물결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드디어 배멘바위 앞에 닿았다. 멀리서 보면 거북이를 닮아 있는 배맨바위 바로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니 이건 뭐 완전히 거북이 머리 형상이다. 산 정상의 그 거대한 바위 꼭대기에, 그러니까 거북이 머리 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 푸르게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물을 길어 올리는 소나무의 노고에 대해 우리는 한참을 주거니 받거니 소곤거리다가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잠시 뒤부터 그것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좌우 양쪽으로 간간이 눈에 띄는 새하얀 그것, 화장지, 보고 싶지 않아도 그냥 눈에 보이는 그것과 더불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코를 자극하는 그 냄새, 구릿한 그것, 있어야 할 자리에만 있어야 할 그것과 그 냄새가 무시로 우리를 불쾌하게 하고 있었다.



# 배맨바위쪽에서 본 해리면



“사람들이 말야. 양심이 없어. 쌌으면 가져가야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걸 어떻게 가져 가냐.”
“왜 못 가져가요. 비닐에 넣어 가면 돼지.”
“비닐에? 그걸 배낭에 넣어서 짊어지고 간다? 히힛, 돌겠네.”
“쌌으면 가져가야죠. 가져갈 자신 없으면 멀리 가서 하든가. 뭐야 이거, 자기네 마당이라면 이런 짓 하래도 안 할 걸요?”

나는 킬킬대고 있었지만, 그녀는 웃지도 않고,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바락바락 화를 내고 있었다. 펄쩍펄쩍 뛰다시피 화를 내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문득 민주주의란 스스로 지켜야지 안 그러면 규제를 당하게 된다는 어느 사회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다시 알 수 없는 어떤 생각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아주 어렴풋한 그 무엇이 나를 두드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설렘 같지만 설렘은 아니었다. 기억의 아주 작은 파편 하나가 내 안에서 밖으로 나오려 하지만 출구를 못 찾아서 헤매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무엇일까. 이게 대체 무엇이지?




# 아이고 무서워라



바다가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 낙조대를 지나고 천마봉을 지나 도솔암이 가까워지면서 구릿한 냄새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고무인형처럼 통통거리는 걸음을 걷고 있었고, 자주 뭐라고 내게 말을 붙이고 있었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그녀의 역동성에 호응하기가 어려웠다. 뭐라고 설명할 수도 없는 혼자만의 감상에 잡힌 채로 고개나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용문굴이라는 이정표를 발견한 순간 내 안에서 불꽃 하나가 번쩍 일어났다.

용문굴, 용문굴이라. 이것이었나? 이것이었던 거야? 아 그래, 그렇구나. 그런 일이 있었지. 용문굴, 용문굴 앞에서 혼자 눈을 깜빡거리던 소년이었던 시절이 내게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오래 전, 아주 오래 전 초등학교 4학년 가을 학기에 선운사로 수학여행을 갔었다. 지금은 폐교로 사라져버린 도산국민학교에서 선운사까지 약 6킬로미터 거리를 대절버스를 타고 갔다. 그것이 내가 생후 처음 타본 버스였다. 여행도 그날의 수학여행이 처음이었고, 동백여관이란 간판이 붙은 여관방에서 잠을 자본 것도 당연히 그날이 처음이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서 어리둥절하고, 어리둥절하면서도 그저 신기하고 즐겁기만 해서 으아, 으아, 감탄사만 남발하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어렴풋한 의문은 하나 있었다.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 천마봉



인솔 교사와 안내 스님의 열정적인 설명을 들으면서 대웅전 뒤편 동백나무 숲을 보고, 진흥왕과 공주가 머물렀다는 진흥굴을 지나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봐도 희한하게 생긴 장사송을 보고, 도솔암 뒤편 내원궁을 아슬아슬하게 올라갔다 내려와서 배꼽 근처에 세상을 구원하는 비결을 감춰뒀었다는 마애불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용이 꼬리를 치면서 하늘로 올라갈 때 생겼다는 용문굴에 이르렀을 때, 용문굴에 얽힌 전설을 듣고 나서 이제 여행 끝났다고, 내려가야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다.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랬다. 용문굴이 끝이었다. 용문굴을 지나서도 사람이 다닌 흔적은 있었다. 그러나 인솔 교사와 안내 스님은 아무 말씀이 없었다. 그저 용문굴을 끝으로 선운사 구경은 끝났다고, 이제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용문굴 뒤쪽의 사람이 다닌 흔적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지만, 궁금해 하면서도 누구에게 그것을 물어볼 생각은 감히 해보지도 못했다. 심지어는 옆의 다른 아이에게도 그런 얘기를 꺼내볼 생각은 글쎄, 못 했다기보다는 아마 해볼 틈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었다. 웃고 떠들어대기도 바쁜 판에 용문굴 너머에 뭐가 있을까 따위는 아마 나 자신도 그리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날의 어렴풋한 의문은 그렇게 내 안에서 사그라져 갔다. 그리고 잊었다. 그런 의문을 가졌었다는 사실마저도 아마 잊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맹세컨대 그 뒤로 나는 한 번도 용문굴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세상을 살면서 선운사를 더러 찾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동백꽃이나 보고 술을 마시는 게 고작이었고, 감정이 넉넉해져서 깊이 들어간다 해도 도솔암 앞마당에 우뚝 서서 건너편 산자락을 물들이고 있는 연두색 새싹들의 이미지를 감미로운 기분으로 응시하다가 돌아오는 정도였다.




# 용문굴



그렇게 흐르는 세월 속에서 나는 쓸데도 없는 나이나 꾸역꾸역 챙겨 먹고 있었고, 그리고 서울이 싫다고, 못 살겠다고 보따리를 싸서 고창으로 내려왔다. 고향으로 왔지만 고향은 이미 옛 고향이 아니었다. 고인돌 공원이 조성되면서 고향 마을은 흔적만 겨우 남긴 채로 사라졌다.

우여곡절이라는 말이 딱 맞을 정도로, 내 몸뚱이 하나 거처할 만한 곳을 찾아서 삼 년 남짓을 헤매던 끝에 발견한 곳이 지금의 해리면 상송 마을이었다. 상송 마을에서 고개를 길게 빼고 바라보면 거북이 형상의 배맨바위가 보였다. 그곳에 이르는 오솔길이 있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고, 오면서 가면서 이정표도 여러 번 보았지만 직접 들어가 본 적은 그동안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내여자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직접 들어가고 보니 내가 초등학교 4학년 수학여행 당시에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의아해 했던 그곳이 나온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는 나는 지금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궁금해 했던 바로 그곳으로 이사를 와 있는 것이었다.

이걸 대체 뭐라고 해석을 해야 하는 걸까. 아니,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아닌 세상의 하고많은 우연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그렇게 간단히 치부하고 말아야 하는 것일까? 어쨌든 나로서는 신기하고, 뭔가 대단한 것을 손에 쥐었다는 느낌인데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게 동기부여를 해준 그녀에게 감사하는 한편 이 느낌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기를 바라는 속없는 욕심조차도 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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