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이 글은 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이신 조광환 선생님(전북 학산여중)이 들려주는 청소년을 위한 동학혁명이야기입니다.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고 그 의미를 상기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란 생각에서 연재했던 것을 독자님들의 적극적인 재 연재 요청에 의해 다시 한번 게재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 말목장터


앞에서 살펴본 대로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1894년 봉건정부에 체포되어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흘리는 망령된 설을 퍼뜨렸으며 평상시에 난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무리를 모았다”는 죄명으로 대구에서 처형당하였습니다. 물론 동학은 일체 금지되어 탄압을 받았고 이를 빌미로 백성들에 대한 지방 수령들의 수탈은 더욱 심해졌지요.

이러한 수탈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동학의 교세가 더욱 확장하게 되자 동학 교도들은 정부에 동학의 합법성을 요구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교조 신원운동입니다. 여기서 교조(敎祖)란 동학교의 시조란 뜻으로 최제우를 일컫는 말이며 신원(伸寃)이란 억울한 누명을 벗기자는 뜻으로 한마디로 말하자면 민심을 현혹시킨다는 죄로 억울하게 죽은 동학교조 최제우의 죄를 사면시키고 동학의 자유를 인정하라는 운동이 되겠습니다.

1892년 서인주(徐仁周)는 서병학(徐丙鶴)과 함께 최시형을 만나 소장을 지어 궁궐 앞에서 최제우의 신원을 호소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최시형은 동학의 최고 지도자로서 신중을 기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10월 17일 발표한 입의통문(立義通文)을 통하여 교조 신원은 동학교도들의 의무임을 지적하고 교조 신원의 방법을 보다 적극적으로 모색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결국 1892년 10월 서병학·서인주 등이 동학교도를 모아 공주에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여기서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에게 각도동학유생의송단자(各道東學儒生議送單子)라는 글을 올렸는데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동학은 유교와 불교, 도교를 합한 것으로 이단이 아니라는 점. 둘째 서학(천주교를 비롯한 서양 문물)이 들어와 그 해독이 엄청나며 일본인들이 통상을 통해 경제적 이익독점과 화적행위로 인한 조선백성의 어려움. 셋째 동학교도들이 각 읍에서 이단으로 몰려 옥에 갇혔으니 이들을 풀어달라는 것. 넷째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조정에 계달(啓達)해 달라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충청감사 조병식은 동학의 인정 여부는 자기 권한 밖이라고 거절하고 맙니다. 그 후 공주집회가 별 소득 없이 해산되자 다시 1892년 11월 3일 전라도 삼례에 수천 명의 민중들이 모여 10여 일간 농성집회가 계속되었습니다.

삼례집회에서 전라감사에게 민중의 요구를 담은 글이 서병학에 의해 작성되기는 했으나, 이 글을 감사에게 전할 마땅한 사람이 없던 차에 자원해서 나선 인물이 바로 전봉준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전봉준은 민중들 사이에 대범한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지요.

한편 이러한 동학교도들의 요구에 전라감사 이경직의 “동학의 인정여부는 권한 밖이며 동학을 빌미로 한 관할 지방수령들의 수탈을 금하겠다”는 답신을 받고 집회를 해산하게 됩니다. 이는 원래의 목표였던 교조 신원운동의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당시 백성 대하기를 벌레 취급하던 종래의 오만했던 관리의 태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민중들이 주체로 일어선 집회를 통해 획득된 값진 결과물이었습니다.

1892년 12월 초 민중의 재집회 요구에 충청도 보은 장내리에 수 천명이 모여들었습니다. 이에 당황한 동학의 북접 상층부는 하층농민 대중의 집단력을 피하고 소수인의 대표에 의한 상소의 방법을 제시하여 1893년 2월 8일 40여 명의 대표단이 광화문 앞에서 3일 밤낮으로 엎드려 상소하였습니다. 이것을 복합상소라 하지요.

그러자 고종은 “너희들은 각각 집에 돌아가 생업에 힘쓰고 있어라, 그러면 이에 소원에 따라 시행하리라”는 답신을 내렸답니다. 이에 북접쪽에서는 복합상소를 중지하고 곧장 해산해 버렸답니다. 한편 복합상소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이미 한양에서는 남접계 농민들이 상경하여 외국 공사관 및 교회에 강경한 내용으로 외세배격의 벽보를 붙이고 다녔습니다.

1893년 3월 11일 전라, 경상, 충청, 경기, 강원 등 각지에서 끝도 없이 군중의 대열이 충청도 보은으로 몰려 들었습니다. 수만 명이 모인 이 집회에서는 ‘척왜양창의’라는 외세배격의 정치적 구호가 등장하였습니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어윤중을 양호선무사로 임명하여 토벌하고자 하였답니다.

보은으로 내려온 어윤중은 4월 1일 최시형 손병희 등 북접계 지도부와 만나 해산을 종용하는 고종의 말을 전하였고 이에 북접계 지도부는 해산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북접계 지도부의 투항적 태도는 농민대중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답니다.

보은 집회가 이렇게 진행되어 갈 무렵 전라도 원평에서는 전봉준 등이 주도한 원평집회가 뜨거운 열기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보은집회가 흐지부지 해산하게 되자 운동의 강력한 구심점을 원평집회에 두면서 보은집회의 열기를 끌어 모아 한양으로 진격하고자 했던 계획이 무산되어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어집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