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접설은 수운 선생 당시 우연히 생겨나와… 호남을 남접, 호중을 북접이라 칭해
남·북접설은 수운 선생 당시 우연히 생겨나와… 호남을 남접, 호중을 북접이라 칭해
  • 이주리 기자
  • 승인 2014.10.05 1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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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이 글은 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이신 조광환 선생님(전북 학산여중)이 들려주는 청소년을 위한 동학혁명이야기입니다.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고 그 의미를 상기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란 생각에서 연재했던 것을 독자님들의 적극적인 재 연재 요청에 의해 다시 한번 게재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그러나 비록 보은 금구집회는 외형적으로 볼 때 별 성과 없이 해산된 듯 보였지만 보은집회에서 보여진 동학교문 상층지도부의 한계를 통해 그와는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추진해야 한다는 현실인식을 해준 귀중한 경험이 되었답니다.

보은으로 내려온 어윤중은 4월 1일 최시형 손병희 등 북접계 지도부와 만나 해산을 종용하는 고종의 말을 전하였고 이에 북접계 지도부는 해산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북접계 지도부의 투항적 태도는 농민대중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답니다.

보은 집회가 이렇게 진행되어 갈 무렵 전라도 원평에서는 전봉준 등이 주도한 원평집회가 뜨거운 열기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은집회가 흐지부지 해산하게 되자 운동의 강력한 구심점을 원평집회에 두면서 보은집회의 열기를 끌어 모아 한양으로 진격하고자 했던 계획이 무산되어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당시 집회에서 척왜양의 기치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민중들이 처한 보다 현실적이고 근본적인 문제가 결국은 민족적 모순과도 맞물려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이라는 명분에서 외세배격이라는 보다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 저항의 질적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으며 이후의 저항운동의 구심체가 동학의 상층부인 북접에서 남접의 서장옥, 전봉준 등 사회변혁주체세력으로 이동해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동학의 조직 중 남접과 북접에 관하여 
 
동학의 단위조직에는 접(接)과 포(包)가 있습니다. 초기 동학의 단위조직은 접이었으나 1893년 3월 이후부터는 동학의 단위조직이 포로 바뀌게 됩니다. 포는 상급조직이고 접은 하급조직이며 포는 여러 개의 접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접의 책임자를 접주라고 불렀습니다.

초기의 포 이름은 큰접주의 성이나 이름을 따서 김 아무개 포, 이 아무개 포라 불렀다가 1893년 3월(癸巳)에 보은집회 때 공식적인 포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리고 큰접주라 하던 것을 대접주로 바꿔 불렀답니다.

그리고 북접과 남접이란 말이 있는데 오지영은 〈동학사〉에서 ‘남, 북접설은 수운 선생 당시에 우연히 생겨나온 말이며, 해월 선생이 사는 곳이 북쪽이 되어 북접이라 불렀다’고 했습니다. 또 「東京朝日新聞」 1895년 5월 11일자 기사에 의하면 서장옥을 최시형의 제자라 하였으며, 또 서장옥의 제자로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중 등이 있는데 이들은 최시형 보다 서장옥의 능력이 위에 있다고 믿고 따름으로서 마침내 南接이라 부르게 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최시형의 제자들이 최시형에게 권하여 北接이라고 부르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계기로 동학의 남접, 북접의 이름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전봉준도 공초(심문기록)에서 ‘호남을 남접이라 칭하고 호중을 북접이라 칭했다’고 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남, 북접은 동학조직 내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둘러 싼 노선차이로 생겨난 세력집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접은 전라도를 중심으로 북접은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세력집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또 남접은 농민봉기를 통해서 사회를 변혁하고자 했던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서장옥 등 강경세력이 중심이었던 것에 반하여 북접은 무장봉기에 반대하고 순수한 종교적 입장을 지키려는 최시형, 손병희, 김연국 등 온건세력이 중심이 되었답니다. 

동학농민혁명과 남, 북접 갈등설에 대하여

19세기 후반 봉건정부의 부패와 외세의 침략아래 신음하던 우리 농촌의 현실 속에서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은 동학교인들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염원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사회변혁을 위한 세력들이 성장하고 결합하는 토양이 되었습니다.

당시 지역적 한계를 넘어 일시에 수만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정부에 맞서는 시위를 전개한 조직은 동학뿐이었으며 동학의 상층부는 이러한 힘을 토대로 동학의 공인을 이루려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이를 통해 잘못된 사회 자체를 바꿔보려는 또 다른 입장을 지닌 서장옥과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에 의해 투쟁의 형태와 성격이 이원적으로 진행되어 갔으며, 이들은 교조신원운동 과정을 통해 서로 결합되면서 사회변혁의 주체세력을 형성해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변혁의 주체세력 중 갑오농민쟁의 주역인 전봉준 등은 이미 삼례집회 때부터 공식적으로 이름을 드러내고 일단의 세력을 형성하여갔으며, 또 이를 통해 교조신원과 동학의 종교적 자유, 동학교도에 대한 지방관의 탐학 금지 외에 보다 정치적 구호인 외세배격의 목소리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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