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열린책들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움베르토 에코의 신작 ‘적을 만들다’가 출간됐다. 새 천년 이후 10년 동안 에코가 고전 모임, 문화 행사, 강연, 에세이, 학회, 정기 간행물, 신문 및 잡지 기고문 등을 통해 발표했던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총 열네 편의 글들은 한 저자의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각각 독립적인 주제와 내용, 접근 방식, 경험과 지식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열정적인 글쓰기를 하는 에코이기에 가능한 결과물로서, 글쟁이 에코가 독자들에게 선사하는 일종의 종합 선물 세트라고 할 수 있다.

에코는 분명히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고 숙제를 안기는 작가다. 또한 에코 스스로도 절대적인 지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지식은 그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더 혼란스러워진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에코는 이 책을 통해 경쾌한 목소리로 아낌없는 불만과 날카로운 지적을 내놓고 있고, 동시에 전작들에서처럼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에코 특유의 화법 또한 여전하다. 그의 학식, 재치, 열정이 한데 버무려진 이 칼럼 모음집은 에코의 저작 활동에 커다란 방점을 찍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도발적인 주제에 대한 일갈은 거침없고 쓴웃음의 맥락은 너무도 명확하고 전염성이 강하다.

이 책의 제목이자 첫 번째 칼럼인 ?적을 만들다?는 파키스탄 출신의 택시 운전기사로부터 받은 ‘당신의 적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에코는 자신의 조국 이탈리아가 과거 60년 동안 제대로 된 적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것이야 말로 이탈리아인들에게 불행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 적을 만든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이해돼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유대인과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 인접국에 대한 비난, 여성 비하, 마녀 재판과 같은 방식을 통해 인류는 오랜 기간 동안 적을 설정하고 그에 대응하며 살아 왔다. 에코는 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평화를 사랑하는 온순한 사람에게서조차 적의 필요성은 본능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작 ‘가재걸음’에서 가졌던 현 시대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이 가장 잘 계승된 ‘적을 만들다’ 외에도 이 책의 나머지 열세 편의 칼럼은 촌철살인 각각의 모습으로 책 전체를 지탱하고 있다. ‘절대와 상대’라는 골치 아픈 논리적 톱니바퀴를 어떻게 해쳐나가는지를, ‘불꽃’이라는 조금은 뻔한 주제로 에코가 어떤 글을 써낼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은 혀를 내두르게 될 것이다. 이 외에도 소설, 철학, 평론, 기호학, 언어학, 미학 등 종잡을 수 없는 주제들 속에 거침없이 자신을 뽐내는 에코 앞에서 독자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현 시대에 대한 세계적 석학의 관점을 엿보는 데 이만한 책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각기 다른 모습의 열네 편의 글을 관통하고 있는 에코만의 주제의식을 찾아보고 ‘장미의 이름’이나 ‘전날의 섬’, ‘궁극의 리스트’ 등 전작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에코의 애독자라면 가질 수 있는 지독한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정리 이주리 기자 juyu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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