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



# 비가 안 와서 걱정


1.
농사에는 예측 가능한 작물이 거의 없다. 수확량은 물론이고, 가격도 얼마가 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나마 쌀농사 하나가 가격이 이미 정해져 있는 등 대략적이나마 예측이 가능하지만, 요즈음 농촌에서 쌀농사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예전에는 쌀농사를 짓기 위해 밭을 논으로 바꾸느라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지금은 논을 밭으로 바꿔서 밭농사를 지으려고 새로운 흙을 덤프트럭으로 사다가 채운다. 이렇게 조성된 새로운 밭에다가 농부들은 특용작물이라 해서 복분자를 심기도 하고, 블루베리를 심기도 한다. 한 번 심은 것을 그대로 계속 유지하는 사람은 드물다. 십여 년 가까이 한 우물을 파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삼사 년을 못 가서 “야 이것도 안 되겠다”, 비명을 질러대며 다른 작물을 찾거나, 아니면 아예 인삼 경작자들에게 땅을 임대해 버리고 만다.

다른 작물을 찾는 농부들이 가장 쉽게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작물로는 고추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고창에서는 해풍고추라 해서 그 인지도가 제법 높은 편이다. 인지도가 높다 해서 가격이 보장된 것은 물론 아니다. 수확량에 대한 예측도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추 농사에 희망을 거는 까닭은 일손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하루도 안 놀고 계속 일을 한다는 것, 농부 자신의 일당을 제대로 온전히 빼먹지는 못한다 해도, 최소한 단돈 만 원씩이라도 건질 수 있다는 경험 때문에 그토록 힘든 고추 농사를 굳이 선택한다.





금년의 고추농사 만큼 농촌의 실상을 웅변적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준 경우도 아마 없을 것이다. 고추모종을 끝낸 직후에는 비가 너무 없었다. 장마철에조차 이슬비나  슬쩍 뿌리다가 멈춰버리는 마른장마만 계속됐다. 저수지는 말라가고, 지하수조차 고갈되기 시작했다. 잎이 쪼글쪼글 말라 들어가는 고추밭에 그나마 여유가 있는 사람은 새로운 지하수를 개발해서 물을 주기도 했지만, 여유가 없는 사람은 그저 바라만보고 있어야 했다.

이제 고추농사는 끝났다.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고개를 흔들어대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올해 고추 가격이 어디까지 오를까, 너무 많이 오른다 싶으면 중국산 고추가 왕창 들어오겠지? 하는 등의 미래를 저마다 예측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렸는데도 예년과는 달리 탄저병 같은 것이 안 왔다. 예년에는 비가 한 번 내렸다 하면 여기저기 도처에서 고추가 죽어갔지만, 금년에는 죽어간 고추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방향에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올해 꼬치는 새빠지게 일만 하고 끝나불게 생겼네.”

고추 농사를 직접 하지 않는 사람이 봐도 고추 가격은 폭락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걱정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초벌 고추가 다 마르고, 두 벌 고추도 다 마를 즈음부터 거래가 시작됐는데 그 가격이 근당 칠천오백 원이었다. 생산비를 제대로 건지자면 근당 일만 원은 돼야 한다고들 생각은 하지만, 칠천오백 원으로 출발한 시중 가격을 생산자들 자신이 어떻게 해볼 수는 없었다. 칠천오백 원에서 더 이상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들이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어매 으쩌까, 큰일났네. 장사들 말로는 오천 원까지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는디 으쩌까 잉?”





 
2.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마을로 이사를 들어올 당시 지금의 할머니는 할머니가 아니었다. 지금은 완전 꼬부랑 할머니가 되셨지만, 그때는 꼿꼿한 허리로 언덕배기를 통통 뛰다시피 오르내리며 논에 물을 대고 비료를 뿌리고 밭에 가서 퇴비를 넣고 비닐 멀칭을 하는 등 그야말로 무서운 것이 없어 보였다. 농사도 쌀농사에 고추를 기본으로 콩이며 팥이며 땅콩에 참깨 등등 그야말로 안 하는 것이 없어서 일 년 내내 한가할 틈이 없었다. 남편을 일찌감치 저 세상으로 보내고 자식들 또한 스무 살 이전에 하나같이 객지로 내보낸 뒤의 외로움을 그렇게 농사일로 달래는 것 같았다. 그게 겨우 구 년여 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구 년 세월이 지난 오늘날의 할머니는 명실상부한 할머니가 되셔서 허리는 완전히 구십 도로 구부러졌고 머리는 검은 것이 하나도 없는 올백발에 무릎은 관절염으로 수술을 몇 번이나 받았는데도 제대로 걷지를 못하신다. 농사도 그동안 쌀농사는 그만두고 밭농사만 짓다가 그것마저도 한 뙈기, 두 뙈기, 거지반 다 내려놓고 고추밭 한 뙈기만 남았다. 고추밭마저 포기하면 인생이 다 끝난 것 같아서 그것만은 포기할 수가 없으시단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일손이 많이 드는 고추 농사일까. 고추만큼 할머니를 만족시켜준 작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고추는 다 망했을 때도 할머니의 고추는 탱탱하게 살아서 십일 월 서리가 내릴 무렵까지도 수확을 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판로는 언제나 시원치가 않았다.

꼬부랑 허리를 간신히 지탱하며 위태위태하게 고추밭을 왕래하는 할머니의 고추를  내가 조금이라도 팔아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해마다 고추 철이면 그런 생각을 잠깐씩 하면서도 성사시켜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지랖도 없거니와 주변머리 또한 워낙 형편없는 탓이었다. 그런데 금년에는 생각도 해보기 전에 그런 기회가 왔다.



# 8월에는 이토록 무성했건만~


# 9월에 벌써 이지경이 돼버린 고추밭


저 멀리 경상도 영덕에서 고창의 해풍고추 오십 근을 사고자 한다. 앞뒤좌우 상황을 모두 제거하고 말하자면 이런 내용의 연락이 왔다. 초벌 고추여야 하고, 상품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가격은 시세대로 쳐서 칠천오백 원. 할머니의 고추는 아무래도 상품으로 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며칠 뒤에 고추밭으로 할머니를 찾아갔다. 다른 사람들 다 쓰는 파라솔도 없이 혼자서 땡볕에 고추밭 고랑을 타고 있던 할머니는 당연히 반색을 하신다. 

“오매, 참말로, 아따 참말로 고맙소, 고맙소 야?”

주름이 쪼글쪼글한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있는 할머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것을 본 내 가슴이 마구 뿌듯해지고 있었다. 

“시세가 칠천오백 원이라던데, 그렇게 하면 되죠?”
“칠천? 아니여. 나는 약도 안 쳤는디, 넘들은 다섯 번이나 약을 쳤지만 나는 초장에 딱 한 번 치고 농약은 구경도 안 헌 것이여.”

그래서 벌레가 먹는 등 버려야 할 것이 많고, 그래서 팔천 원은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할머니의 주장에 모순은 없었다. 농약은 치고 싶어도 장비가 없어서, 그리고 힘이 부쳐서 못 친다는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 요컨대 완전 무농약은 아니라도 최소한 그에 근접한 고추인 것이었다. 따라서 근당 팔천 원도 사실은 싼 셈이었다. 하지만 소비자를 설득시킬 만한 근거자료는 하나도 없었다. 

“그냥 칠천오백 원씩 쳐주던가.”



# 고추밭 옆의 억새



할머니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결론을 지어주셨다. 힘이 쏙 빠진 목소리의 그 말씀을 듣고 나니 이제는 정말로 칠천오백 원이 아니라 팔천 원씩 계산해 드려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소비자를 설득할 자신은 역시 없었다. 궁리 끝에 그냥 오백 원씩을 보태기로 했다. 고추 오십 근에 오백 원이면 오오 이십오, 이만오천 원이다. 이만오천 원 까짓 거 삼겹살 한 번 안 먹은 걸로 치고 내 돈으로 충당해 버리자. 그렇게도 무식하게 단순한 생각으로 그냥 이만오천 원을 보태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서로가 섭섭한 감정 없이 좋게좋게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입소문이 퍼졌다. 고창의 해풍고추를 칠천오백 원씩 샀는데 물건이 아주 좋더라, 하는 소문을 듣고 서울에서 고추를 사겠으니 중개를 해달라는 전화가 왔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거절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일단 가격부터 수정을 해야 했다. 칠천오백 원이 아니라 팔천이라고 했더니 뭔 소리냐고 하신다. 농약을 거의 안 친 최상품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유를 설명하니 그제야 그런가, 하신다. 그리하여 다시 할머니를 찾아갔다.

“서울서는 근에 만 원이던디 으째야 쓸까 모르겠네.”

할머니는 영 곤혹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깜짝 놀랐다. 두 말이 필요 없는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사정을 설명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다시 전화가 왔다. 서울에서 고추 한 근이 만 원인 까닭은 다듬어서 씨 빼고 빻아서 주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그 이야기를 들고 다시 할머니를 찾아갔다. 설명을 다 듣고 난 할머니는 “으응, 그려?” 하시면서 빙그레 웃는다. 그렇게 해서 고추는 팔천 원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다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시중 가격 칠천오백 원짜리를 왜 팔천 원에 구입하라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였다. 그 바람에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오백 원 차이를 놓고 벌이는 설명과 설득과 반박이 오가기를 몇 번이나 했던가. 그리고 며칠이나 걸렸던가. 커피 한 잔 가격이 일만 원을 바라보는 서울 살림에서 오백 원의 가치가 이렇게도 큰 것인가 싶어 짜증도 나고, 은근히 화도 났지만 그렇다고 그만두어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바람에 들어간 발품이 얼마인지, 전화를 하느라 들어간 비용은 또 얼마인지, 고추를 포장하는데 쓰는 비닐봉지며 마대자루 가격은 또 얼마인지, 심지어는 택배비까지, 도대체 들어간 비용이 얼마인지 계산조차 해볼 수 없는 채로 일단 거래는 끝났다. 그랬다. 서울 손님께서는 그 모든 비용이 생산자에게서 자동으로 나오는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다른 데서 발생하고 있었다.





3.
고추를 택배로 보낸 다음 날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마철에도 안 오던 비가 하루 이틀, 사흘, 무려 일주일 가까이나 쏟아졌다. 햇빛도 거의 안 비쳤다. 비가 내리지 않는 날에도 태양을 보기는 어려웠다. 식물이 태양과의 광합성을 이루지 못하면 병에 걸리기 마련이었다. 여름도 다 가고 가을이 코앞인 상황에서 벌어진 이런 뜻밖의 현상 앞에서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고추가 죽어가지 않지만 이제 곧 죽어가기 시작할 것이라고, 그러면 고추 가격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십여 일만에 비로소 태양이 나왔다. 그 열이 대단했다. 단계적으로 천천히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나와서 마치 찍어 누르듯이 내리쬐는 태양빛에 식물들은 힘을 잃고 축축 늘어져 갔다. 고추가 죽어가는 이제 시간 문제였다. 아직 푸른빛을 내고 있다 해도 그 푸름은 이미 활기를 잃고 있었다.

그 시기에 고창의 해풍축제가 열렸다. 판매부스가 차려지고, 이 동네 저 동네 온 동네에서 트럭으로 고추를 가져다가 쌓아놓았다. 조직위원회 측에서 내놓은 고추 가격은 상품으로 근당 구천오백 원이었다. 하지만 실제 거래가격은 일만일천 원이었다. 그런데도 한나절도 채 안 돼서 다 팔려 버렸다. 예년에는 축제가 끝난 뒤에 남은 고추를 철수시키는 작업으로 부산했지만 금년에는 고추가 없어서 못 팔았다. 축제는 이틀이었다. 판매부스에 고추가 하나도 없는 축제를 하루 하고도 한나절 동안이나 치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때문에 나중에 온 사람은 “뭐여, 뭐여, 저 빈 자리들은?”하고 어리둥절해야만 했다.

그 뒤로도 고추 가격은 계속 오르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고추밭은 대부분 쑥대밭으로 변해 갔다. 할머니의 고추밭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년만 해도 할머니는 10월 말까지 고추 수확을 했었다. 그랬던 것이 금년에는 9월도 끝나기 전에 고추대가 모두 말라버렸다.

어쨌든 나는 할머니에게 큰 손해를 입히고 말았다. 딴에는 뭔가 도움을 드리고자 했지만 결과가 이렇게 되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 그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내심 당혹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할머니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손해를 봤다고 타박하기는커녕 지금 시중 가격이 얼마라는 식의 우회적인 언급조차도 없었다. 그저 배시시 웃는 얼굴을 이런 말씀을 하고 있었다.

“오십 근짜리 두 푸대가 아직도 있는디, 이것도 어디 팔아줄 데가 있는지 좀 알아봐 줘 잉?”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알았다. 할머니에게 중요한 것은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갈 수 있는 무엇, 이를테면 말 한 마디 눈빛 하나만으로도 통할 수 있는 정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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