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진의 영화 리뷰> ‘애나벨’


꽤 오랜 시간 영화담당 기자로 일을 했지만 아직까지도 기피하는 장르가 있다. 공포 장르 가운데서도 관객들에게 가장 높은 체감 지수를 선사하는 ‘오컬트’ 무비다. 오컬트 무비는 악령 혹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신비한 영적 현상을 주제로 한 장르를 가리킨다. 대표적인 오컬트 무비가 ‘엑소시스트’ ‘오멘’ 등이다.

사실 어릴 적부터 일종의 강박증이 좀 있었다. 영화학도로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 졸업작품으로 이 강박증에 대한 단편 시나리오를 써 좋은 결과를 얻은 적도 있다. 당시 자문을 구했던 한 신경정신과 의사분에 따르면 현대인들에겐 강약만 다를 뿐 일종의 강박증은 누구나 다 갖고 있다고 했다. 그것이 클 경우 환영과 환청 등의 정신분열증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작을 경우 우리가 알고 있는 공포영화에 크게 겁을 먹는 정도로 풀어내면 될 것이다.





내가 느낀 강박증은 어두운 골목길을 걸을 때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느낌이 든다거나, 혼자 방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빼꼼히 열린 장롱 문틈으로 누군가 나를 쳐다본다는 느낌 정도였다. 물론 그 존재가 귀신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그래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무당과 그들이 믿는 신의 존재는 부정하지 않는 편이다. 뭐 무당 혹은 점을 맹신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이유 때문에 공포 영화, 특히 체감지수 최고봉의 오컬트 무비는 사실 내겐 고문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얼마 전 최고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몸이 좀 좋지 않아 병가를 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 무렵 시사회도 없었다. 게다가 마음을 사로잡은 영화의 문구,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 제목은 웃기게도 내가 꽤 좋아하는 외국인 여성 이름인 ‘애나벨’이다. 발음상도 그렇고, ‘건축학개론’ 속 납뜩이의 대사 중 나오는 “운율도 좋고 획수도 좋고”란 정의에 한 표를 줄 정도로 여러 외국인 여성 이름 가운데 이상스럽게 ‘애나벨’이란 이름이 좋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난 뒤부턴 공포의 대상이 돼버렸다.

‘애나벨’은 기분 나쁠 정도의 음산함과 악몽과도 같은 심리적 공포감을 선사한다. 절대 혹평이 아니다. 포괄적 느낌의 ‘공포’ 영화는 관객들에게 상쾌함을 전달하는 것보단 오히려 기분 나쁜 감정적 충돌을 일으키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애나벨’은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놀라운 점은 이 영화가 실화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지난해 국내에 개봉해 마니아층을 형성시킨 ‘컨저링’의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인형을 기억하는 팬들이 꽤 많을 것이다. 그 인형의 정식 이름이 바로 ‘애나벨’이다.

이 인형은 미국 내 심령술사로 활동 중인 워렌 부부가 소유하고 있는 코네티켓주의 초자연 박물관에 실제로 전시돼있다. 유리관 안에 봉인된 채 ‘절대로 열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붙어 있고, 한 달에 두 번 신부님이 방문해 기도로서 다스리고 있단다. 무엇을? 인형 속에 깃든 악령을 말이다.

‘컨저링’ 제작진은 영화 속에서 짧게 등장한 ‘애나벨’ 인형의 실제 사연에 주목하고 오컬트 무비에선 쉽게 나오기 힘든 스핀 오프(번외편)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실제 이 인형을 소재로 왜 인형 안에 악령이 깃들게 됐으며, 이 인형이 왜 그렇게 공포의 대상이 됐는지를 그리게 된다.

주인공은 ‘미아’란 이름의 여성이다. 임신을 한 이 여성은 인형을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있다. 외국 영화 속 인형, 아니 국내 영화 속 인형(특히 구체관절 인형)을 보면 사실 예쁘다는 느낌보단 기괴하고 음산하다는 느낌을 먼저 받는다. 이런 인형을 수집하는 이유를 필자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어찌됐든, ‘미아’는 남편으로부터 상당히 매력적이고 희귀한 인형 하나를 선물 받는다. 크기가 작은 아이만한 ‘애나벨’이다. 인형의 묘한 기운에 ‘미아’는 매료되고 자신의 수집 방에 인형을 가져다 놓는다.

이후 TV 화면에는 사이비 종교 집단의 광기가 낳은 끔찍한 사건을 보도하는 뉴스가 나온다.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연쇄살인마로 기록된 찰스 맨슨의 ‘맨슨 패밀리’를 떠올리게 한다. 이 사이비 종교 집단의 일원이 미아의 옆집 부부를 살해하고 그 현장을 목격한 ‘미아’는 이들에게 습격을 받는다. 다행히도 목숨은 구하게 되지만 그때 죽은 종교집단의 여성 영혼이 이 애나벨 인형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스크린에 펼쳐진다.

이후 ‘미아’와 남편 ‘존’ 그리고 미아의 뱃속에 있는 아기는 ‘애나벨’ 인형에 깃든 영혼에게 연이어 괴롭힘을 당한다. ‘미아’는 주변 인물들을 통해 악마를 숭배하는 집단이 영혼을 재물로 원하고 그 대상이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란 것을 알게 된다. ‘미아’는 공포에 사로잡히면서도 아이를 지키기 위해 필사의 사투를 벌인다.

스토리상으로는 큰 변곡점 없이 흘러가는 뻔한 오컬트 무비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다른 오컬트 무비와 차별화 되는 건 바로 시각적 충격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악령이 깃든 사람의 끔찍한 모습 혹은 악마의 실체를 공개하며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는 방법에서 벗어나 이른바 점멸 효과를 통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악령의 실체를 전한다. 이 방법은 관객들에게 가상을 실제로 인식시키는 묘한 중압감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다. 여기에 공포 장르의 가장 효과적 장치 중 하나인 음향을 적절히 배치해 체감지수를 높였다. 재봉틀 소리와 이층집의 쿵쾅거리는 소리, 고요한 정적 등은 상황에 따른 화면과 어울려 더욱 기분 나쁜 느낌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오컬트 장르의 최적화된 요소를 갖춘 것은 아파트란 한정된 공간만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일상성이 강조된 아파트에서의 악령과 비현실적인 현상은 “혹시 나한테도?”라는 상상과 함께 관객들의 오감을 곤두세우게 만든다. 사실 악령 자체는 실체가 없는 실체다. 때문에 관객이나 극중 ‘미아’ 모두에게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체감 호러 지수는 달라질 수 있다. 결국 ‘미아’에게도 관객들에게도 악령의 실체는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는다. ‘도달할 때 쯤 사라지는’ 반복성을 통해 호러와 공포지수를 점차 끌어 올리며 하이라이트까지 끌고 간다.

마지막 순간 등장하는 영화 속 ‘애나벨’의 표정은 이 영화가 왜 역사상 처음으로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란 타이틀을 갖게 됐는지를 여과 없이 느끼게 하는 신의 한수가 될 것이다. ‘애나벨’에 얽힌 실화를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 뒤 당신은 분명 인형 공포증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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