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화해의 손짓, 남한은?



남북관계가 인천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변화의 바람을 타고 있다. 북한 대표단의 전격적인 폐회식 참석으로 정체되었던 남북관계에 숨통이 트일 전망이다. 북한의 군과 당 실세인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을 비롯 북측 고위급 인사들이 전격 방남했다. 한때 권력 2인자였던 최룡해 노동당 비서와 대남통인 김양건 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담당 비서까지 ‘북한 권력 핵심 3인방’이 한꺼번에 방남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들은 우리 정부가 제안한 2차 남북고위급 회담을 수용했다. 미국과 중국 등 주변국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제 관심은 10월말∼11월초 열리게 될 고위급 회담에 쏠리고 있다.







새로운 돌파구 기대     

북측 대표단은 지난 4일 류길재 장관 등과의 오찬에서 이달 말이나 다음 달 초쯤 우리가 지난 8월 제안한 제2차 고위급 회담을 수용키로 했다. 그동안 경색모드가 지속돼왔던 남북관계 개선에 청신호가 켜졌다는 분석이다.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재개, 개성공단 안정적 운용 등 현안이 산적해있는 상황에서 이번 합의를 통해 남북관계의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낳고 있다.

청와대는 박근혜 대통령이 수차례 제안한 2차 고위급 회담 수용과 대화정국이 복원됐다는 점에서 환영과 기대감을 나타냈다. 그러면서도 향후 실질적인 남북관계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선 갈 길이 멀다는 관측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북핵 불용과 북한 주민 인권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북측은 국방위원회 명의로 박 대통령의 실명을 직접 거론하면서 격렬하게 비난했다. ‘만고역적’, ‘현대판 사대 매국노’라는 거친 표현까지 썼다. 하지만 북측은 그 일주일 뒤 ‘최고위급 방남’이라는 ‘놀랄만한 카드’를 던졌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남북관계를 고리로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려는 전략적 판단이 깔렸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북한의 대남전략 내지는 전술에 중대하고 급박한 변화가 이뤄졌다는 점을 방증하고 있다고도 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한때 혈맹관계였던 중국과의 관계가 여전히 악화일로를 걷고 있고, 한·중간은 어느 때보다 가까워졌다. 외교적으로나 실리적으로나 중국 의존도가 높은 북한으로선 내심 불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일본과의 외교 정상화도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여전히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미국과의 관� 등을 감안할 때 경제·외교적으로 고립된 북한으로선 새로운 돌파구가 절박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게다가 북한 인권문제가 유엔에서 공식 의제로 다뤄지고 있고, 미국의 이슬람국가 공습 등 테러에 대한 전 세계적 파트너십이 강화되면서 북한으로선 남북관계에서 위기탈출의 해법을 모색하려고 하는 측면도 있다”고 진단했다.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되나 

정부와 청와대는 남북 대화모드가 재개됐다는 점에 의의를 둔다. 앞으로의 협의 과정 및 추이가 중요하겠지만 북한이 스스로 고위급 접촉을 수용함으로써 남북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면에서 향후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지난 2월 열린 제1차 남북 고위급 접촉에 이은 후속 고위급 접촉은 이르면 이달 말이나 다음 달 초쯤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사전 실무접촉도 조만간 이뤄질 예정이다.

당장 물리적 시한이 촉박한 이산가족상봉의 정례화 문제가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우선 해결 가능성이 높은 분야부터 순차적으로 풀어나가겠다는 방침이다. 정성장 세종문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5·24조치 해제를 비롯 인도적 지원, 개성공단의 안정적 운영 등에서도 비교적 남북 간 견해차가 적은데, 우선은 이산가족상봉 문제부터 푸는 게 헝클어진 남북관계의 해법을 찾기에 수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금강산 관광 재개나 북한 인권 문제 등은 기업 및 산업분야, 국제사회 등과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만큼 유의미한 해결을 보기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남북관계가 막힌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쉬운 것과 작은 것부터 신속하고 기동성 있게 풀어나가야 한다”며 “협력할 부분은 빨리 해나가는 것이 큰 틀에서 남북 갈등 구조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이번 방문이 남북 간 사전 조율이나 예고 없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북 내부통제용’ 또는 김정은 위원장 건강이상설 등 북한에 쏠려 있는 시선을 잠시 돌리기 위한 ‘시선회피용’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정성장 위원은 “이처럼 전례 없는 고위급 실세를 파견한 것은 극도로 경색된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특단의 카드를 내민 것”이라며 “김정은 위원장이 몸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고도의 정치적 결단을 내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과시하는 효과도 노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다만 이번 남북 고위급 접촉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박근혜정부 임기 내내 경색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번 북한 고위급 인사의 방한이 향후 3년 반의 남북관계를 좌우할 수 있는 결정적 순간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2월 박근혜 대통령도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앞으로 남북 이산가족이 자주 만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다만 북측은 금강산 관광 재개 등과 연계해 이 주제를 풀길 원하는 눈치다. 하지만 남측은 금강산 관광 재개 이전에, 관광객 피살 사건에 대한 북측의 인정과 사과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이어서 논의의 접점을 찾기 어려울 것으로 관측된다. 원론만 강조하는 가운데 자칫 대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대목이다.


실리적,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해야

이 때문에 실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조언이 나온다. 정성장 위원은 “이산가족 문제의 획기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매일 10~20 가족 정도의 이산가족상봉에 북한이 협조하면 우리 정부가 금강산 관광 재개를 수용하고, 북한이 이산가족의 생사 확인에 협조하면 5·24 조치를 해제하는 방식으로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 실용주의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양무진 교수는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쪽 최고지도자의 결단”이라며 “2차 고위급 접촉은 시기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북한은 당 창건일 등 10월 행사를 종료한 뒤 동계훈련에 들어가기 전이며, 우리도 호국훈련 전이라는 점 등 큰 부담이 없다. 이번 고위급 접촉에서는 중요한 포인트가 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이산가족 문제는 기본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이고 이어 현재 북한의 경제개발특구에 대한 남북 교류협력과 관련된 입장차를 조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 교수는 또 “남북간 정상적인 대화채널이 복원돼야 한다. 현재 남북 고위급 접촉은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는 역할에 한정하고 이제는 통-통(남측 통일부와 북측 통일전선부) 라인이 중심이 되어 상기 현안들을 협의해나가야 한다”며 “이행하기 쉬운 것부터 합의해 나가면서 신뢰를 쌓아 나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남북대화에서 본격 구현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상회담 가능성 열려

남북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이후 핵 문제 등 무거운 이슈도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5·24 조치 등을 일시에 전면 해제할 수는 없지만 단계적·점진적 조치를 취하면서 서로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나아가 보다 큰 틀의 논의를 이어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관측이다.

통일연구원 박영자 북한연구센터 연구위원은 “북한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비핵화 등 이슈를 꺼내기보다는 대화 의지를 확인하고 지속토록 할 필요가 있다”며 “교류협력 성숙을 통해 관계를 정상화하고 비핵화 문제 등은 6자회담 틀 속에서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북측 대표단이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갖고 오진 않았지만 ‘따뜻한 인사말’을 안부로 전해왔다. 박 대통령도 북측 대표단을 만날 용의가 있음을 사전에 알렸다는 점에서 비록 대표단의 박 대통령 예방은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남북정상회담과 관련된 협의 가능성도 열린 상황이다.

박 대통령이 여러 차례 남북 정상 간 만남 가능성을 열어왔다는 점에서 북측의 방남은 남북정상회담까지 이어질 수 있는 정치적 모멘텀을 확보했다는 평가다. 다만 우리 정부로선 북측이 과거 유화 제스처를 취하다가 미사일 도발 등 강경으로 돌아섰던 전례가 있는 만큼 향후 실무접촉 등을 통해 신중한 접근방식을 택할 것으로 알려졌다.

오진석 기자 ojs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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