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 김수복 기자
  • 승인 2014.10.27 1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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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가을 갯벌은 다르다. 여름 갯벌이 짭짤한 소금이라면 가을 갯벌은 펄펄 뛰는 생선이다. 여름 한철 소금기에 푹 절여졌던 우리의 몸은 높아진 하늘을 머리에 인 채 펄떡펄떡 뛴다. 뛰는 가슴으로 잠시 구름의 모양을 감상하기도 하고, 바람이 가는 방향을 넋 놓고 쳐다보기도 하고, 때로는 작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건져다가 회를 뜨기도 한다.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평소에는 사양하던 사람도 술을 마셔야만 할 것 같은 무엇인가가 가을 갯벌에는 있다. 좋은 기분으로 마시는 한 잔의 술은 확실히 무엇인가 어디엔가 크게 도움을 주는 약이 될 것만 같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가을 갯벌에서는 모두가 시인이 된다.

부지런한 사람은 절대로 굶어죽지 않는다. 너무도 당연한 이 말 한 마디가 가을 갯벌에서는 그야말로 절절히 가슴에 와 닿는 순간이 있다. 일 원짜리 동전 한 닢 없어도 사람답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순간도 있다. 작은 돌멩이 하나만 있어도 달라붙어 무럭무럭 살을 찌우는 석화라든가 여기저기 도처에서 불불불 기어 다니는 칠게 같은 생물들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거리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내가 저 사람 같고 저 사람이 나 같은, 저 사람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한 나 또한 살아서 움직일 게 틀림없다는 믿음이 가을 갯벌에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생겨나 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너와 나의 구별조차도 없이 그냥 모두가 이미 시인이 돼 있어 버리는 것을.





하늘이 깊은 물처럼 파랗기만 하던 날 우리는 갯벌에서 소주를 마셨다. 하늘이 물처럼 파랗기만 해서는 재미없다는 듯 구름 몇 덩어리가 그림을 그리고 있던 날이었다. 운이 좋았다. 아니 어쩌면 운이 나빴다고 말해야 옳은지도 모르겠다. 둘 다 맞는 말이고, 또 틀린 말이기도 한 날이었다.

바지락 채취를 위해 갯벌로 들어가는 시간에는 주문량이 많았었다. 그런데 작업을 막 시작할 즈음 전화가 와서 주문량의 절반 이상이 취소돼 버렸다. 바지락 채취 현장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추가 주문이 들어와서 예정보다 피땀을 두세 배 이상 더 흘리기도 하지만, 주문이 돌연 취소돼서 그날 각오하고 있던 피땀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돌아오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다.

핸드폰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 집전화만 있을 때는 일단 주문이 들어오면 그날의 일은 결정되었다. 결정된 일은 고정불변이었다. 주문자가 주문량을 줄인다거나 취소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손해를 보든 이익을 보든 주문자 자신의 책임이었다. 추가주문도 마찬가지였다. 핸드폰이 보편화되면서부터 사정은 영 달라졌다. 언제 전화가 와서 주문량이 취소될지 모르고, 또한 언제 전화가 와서 추가주문이 들어올지 알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보니 생산자는 이제 무슨 계획을 세워볼 수가 없었다.

어쨌든 현장으로 전화가 와서 주문이 취소된 건 생산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운이 없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우울해 할까? 아니었다. 운 좋게도 그날 인근 어장에서 쳐놓은 그물에 고기가 많이 걸렸다. 고기잡이가 전문인 어부가 쳐놓은 그물은 아니었다. 역시 같은 바지락 양식업을 하는 이가 그리 비싸지도 않은 그물을 심심풀이 삼아서 쳐놓은 것일 뿐이었다. 가격은 2만 원대. 높이가 일 미터이고 길이가 삼십여 미터쯤 되는 이 그물은 꽃게 같은 집게발이 날카로운 녀석들이 자주 걸리는 까닭에 서너 차례 사용하고 나면 수리도 할 수 없어서 그만 버려야 하는 그야말로 일회용 그물이었다.





일회용 그물에 걸리는 물고기가 그리 많을 까닭이야 없는 일이었다. 그 바탕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간식으로 회를 뜨고 남은 것을 몇 마리 집으로 가져가는 정도였다. 그래도 가끔은, 아주 가끔은 입이 쩍 벌려질 정도로 걸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범게와 꽃게, 망둥어를 기본으로 서대며 장대며 병어에 도미까지 도대체 몇 마리나 되는지 헤아린다는 게 부질없다 싶을 정도로 걸렸다.

준비는 이미 다 돼 있었다. 바지락 양식장에 그물을 치는 사람은 대개 술을 좋아한다. 그리고 현장형이다. 생선회란 모름지기 건져낸 그 자리에서 바로 먹어야 한다는 철학이 있다. 그래서 그는 트랙터에 항상 초장을 커다란 통으로 싣고 다니고,  고창의 특산품 복분자주를 또한 일점 팔 리터짜리 플라스틱 병으로 몇 병씩이나 싣고 다닌다.

정말이지 하늘은 겁나게도 파랗기만 한 날이었다. 파란 바탕에 열심히 이런저런 모양의 재주를 부리는 구름은 이미 구름 같지가 않고 무슨 요술쟁이 같았다. 바람도 없이 고요한 날이었다. 물때도 길었다. 물때가 짧은 날은 한 시간 남짓밖에 작업을 할 수가 없지만, 긴 날은 4시간 이상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주문량이 취소되는 바람에 한 시간이 채 못 돼서 그날 할 일을 다 끝내 버렸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집으로 가서 대충 몸을 씻고 한숨 푹 자고 나면 피로가 싹 풀릴 것이다. 그런데 돌아가고 싶지가 않다. 저 푸르게 맑디맑은 하늘을 두고 어떻게 돌아간단 말인가. 모두가 말은 없어도 싱숭생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간식으로 가져온 빵과 음료를 내놓고 먹어보기도 했지만 허기가 채워지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지? 모두가 말은 없어도, 눈으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러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때 그것이 보였다. 저 멀리 트랙터 옆으로 웅성웅성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보였다. 그곳은 고기가 지나는 길목으로 알려져 있고, 그래서 항상 일회용 그물을 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펄떡펄떡 뛰는 물고기로 회를 뜨고 있다는 것 또한 그냥 알 수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서 저마다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면 그게 뭘 뜻하겠는가 말이다.

저 사람들은 좋겠다, 하고 부러워할 즈음 그쪽에서 손짓이 왔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표정이나 몸짓을 볼 수는 없어도 그들은 아마 우리의 허기진 마음을 알고 있었을 터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물이 들어오기 전에 죽기살기로 일을 해야만 하는 게 천직인 갯사람들이 갯벌에서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여기저기 사방을 둘러본다는 게 뭘 말하는지를 왜 모르겠는가 말이다.

일단 남자 두 명이 단거리 육상 선추처럼 뛰어갔다. 대략 일 킬로미터쯤의 거리를 그야말로 단숨에 뛰어가서 망둥어와 서대와 전어, 그리고 도미와 범게와 옵션으로 복분자주까지 한 병 얻어서 들고 돌아왔다. 무거워서 헐떡거려야만 할 정도로 많은 것을 얻어가지고 돌아온 남자 두 명은 이제 영웅이 되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흥겨울 때 입에 담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칭송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주머니 두 분이 무딘 칼로 회를 뜬다고 나섰고, 나머지 사람들은 바지락을 캘 때 쓰는 바구니를 탁탁 엎어놓고 물로 씻어내는 등 술상을 차렸다. 그때쯤 갈매기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한 마리가 오니 두 마리가 오고, 그 뒤를 따라 멀리서 속속 몰려드는 갈매기의 시끄러운 소리가 마치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뭐야, 이게 무슨 냄새야. 이 사람들이 일은 안 하고 지금 뭘 하는 거야, 응? 그거 먹을 거지? 우리에게도 좀 나눠줄 거지? 주려면 빨리 주라, 응?

당연한 일이었다. 갈매기에게 줄 것은 많았다. 내장도 있고 껍질도 있었다. 머리도 통째로 주면 못 먹지만 해체해서 던져주면 땅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낚아채는 기술이 갈매기들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사람은, 사람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펄떡펄떡 뛰던 물고기를 맛난 술안주로 만들어내는 기술이 있었다.

“와아따 참말로, 이런 맛으로 사는 것이제, 이런 맛으로 사는 것이여 잉? 이런 맛도 없다면 으찌게 살 것이여, 사람이, 잉?”

연치가 칠십을 넘었으니 할머니라고 불러야 마땅하지만 ‘아줌마’라 부르기로 암묵적인 합의가 돼있는 아주머니 한 분의 훌륭한 감탄사 한 마디가 우리의 심금을 울렸던 것인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은 한 마디도 없이 묵념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잠시 하늘을 보았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면 우리는 아마 킥킥거리며 뭐라고 한 마디씩 후렴이나 붙여주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주인공이고 보니 절로 그냥 숙연해지고 있었다.

삼십 년도 훨씬 넘었다고 했다. 바닷물에 남편을 잃고 혼자서 아이들 다섯을 건사해 온 지가, 삼십 년이 넘었다는 것은 알아도 정확한 햇수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은 아주머니 자신도 “몰라, 삼십 년인가, 사십 년인가”.하는 식으로 헷갈려  하신다. 아니 어쩌면 실제로 헷갈리는 게 아니라 헷갈리고 싶어 하시는 건지도 모른다. 





“이런 맛을 몰랐다면 내가 폴새 어딘가로 가 버렸을 텐디 말이여, 잉?”

복분자주 한 잔을 쭉 들이켜고 나서, 카, 소리와 함께 전어회 한 점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한 마디 덧붙이는 아주머니의 얼굴에서 수줍음이 뚝뚝 묻어난다. 아, 그것이 있었다. 이 양반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얼굴에서 수줍음이 마치 꽃처럼 피어난다. 표정만 그런 것이 아니다. 눈이 마주치면 당황해서 시선을 잠시 아래로 깔았다가 다시 마주보며 깜빡깜빡, 하시는데 영낙없는 소녀의 그것이다.

흔해빠진 표현을 빌리자면 미인형의 얼굴이었다. 혈색도 좋았다.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은 잘해야 오십대 초반으로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는 역시 속일 수 없는가 보았다. 이삼 년 전부터 맨 정신으로는 일을 할 수가 없어서 막걸리 병을 옆구리에 차고 다니신다. 갯일이란 게 일하는 시간은 비록 짧다 해도 워낙 정신 못 차리게 몰아치다 보니 젊은 사람도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간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에너지 소비가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막심하다. 그래서 아주머니는 막걸리라도 틈틈이 한 모금씩 마셔줘야만 한단다.

“에이그, 인제 쬐끔은 후회도 되제라우?” 

“후회는 안 하제만, 그래도 가끔은, 그때 시집이나 가 버렸으면 어쨌을까, 하는 때가 있기는 있제. 딱 거기까지 뿐이여, 그 이상은 뭐, 생각을 안 하고 싶은게.”





남자나 여자나 일단 술판이 벌어졌다 하면 지난 얘기가 불쑥 한 마디씩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과거를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는 암호문 같아서 정확한 그림을 그리기는 어려워도 아하, 하는 느낌은 있기 마련이었다. 아주머니들끼리 주마간산 격으로 주고받는 지난 얘기에 따르면 남편을 잃은 뒤에 아마 중매가 꽤 들어왔던 모양이다. 그 중에는 성사 직전까지 간 것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뿌리치고 말았다.

자식이 다섯만 아니었어도, 하나만, 아니 둘만 있었어도 새로운 삶의 여정에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지금과는 영 다른 삶을 누리고 있을까? 지금의 삶이 억울하다거나 슬퍼서 못살 지경의 것은 아니라 해도, 그렇다 해도 고단한 것은 고단한 것이어서, 밤이면 혼자서 이런저런 과거지사를 되짚어 보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살래살래 저어대곤 한다는 것이다.

“새끼들 대학 보낸다고 빚을 한 번 지고 나니 계속 빚쟁이가 돼버려서는 그냥, 오늘날까지도 저 모양 저 꼴이지 뭐겠소.”
정확한 실상은 당연히 알 수 없지만, 소문은 일단 그렇게 나 있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경작을 했던 논이며 밭이면 온갖 재산이 자식들의 학비로 들어갔다. 나중에는 이웃과의 신용을 바탕으로 빚을 내 쓰기 시작했는데 그 빚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어미가 그렇게 자식들을 건사했으면, 어미가 늙어서 아이와 같이 되었을 때 자식들이 어미를 건사하겠다고 나설 법도 하건만, 그런데 희한하게도 자식들은 아직도 늙은 어미가 전세방 보증금이라도 보태지 않으면 서울의 뒷골목 거리로 나앉을지도 모른단다. 이것은 실로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한 일이다. 자식들이 모두 대학을 다녔으니 그 돈만 해도 아마 집을 사면 열 채는 살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말이다. 

굳이 면밀하게 따져 보기로 하자면 그 돈이란 말할 것도 없이 더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에게로 흘러갔겠지만,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아주머니는 복분자주 한 잔에 취흥이 도도해져서는 그냥 이렇게 한 마디 우리의 심금이나 울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사는 것이 뭐, 별 것인간디, 이것이 사는 것이여, 이것이 잉?”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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