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제야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아버지, 이제야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 김범진 기자
  • 승인 2014.10.31 14: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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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진의 영화 리뷰> ‘나의 독재자’


아버지가 된지 올해로 만 6년째다. 많이 힘들다. 너무 무겁다. 박봉이란 말도 미안스러운 얇은 월급봉투 하나에 매달려 전쟁터보다 더 피가 튀고 치열한 사회 속에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사명감은 어느새 의무감으로 바뀌었다. 가족이란 단어가 사실은 족쇄란 느낌으로 오는 것도 있다. 사람이 솔직해져야 하는 게, 가족 때문에 삶의 원동력을 느끼고 가족 때문에 살아갈 힘을 느낀다고 하지 않나. 하지만 그들은 다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들의 사치스런 변명일 뿐이다. 하루를 살아가는 소시민 하층민들에게 어떻게든 가족은 삶의 힘듦을 더욱 가중시키는 무게감이다. 물론 반대로 해석하는 것도 맞다. 그 가족들로 인해 우리는 살아가고 포기하지 않고 또 내일을 꿈꾸며 기다리고 살아간다.

어릴 적 아버지가 정말 싫었다. 4남매 중에 막내인 내게 유독 엄하게만 대하시던 아버지가 정말 싫었다. 작은 잘못에도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을 내셨다. 막내인 내가 어리광이라도 피울라치면 고개를 돌리시고 외면하셨다. 어린 마음에 참 야속하기만 했다. 물론 무섭고 엄하고 야속하기만 했던 아버지는 아니었다. 가끔씩은 따뜻함으로 대해주기도 하셨다.

두발 자전거가 한창 붐을 일으키던 시기였다. 저녁을 먹은 뒤 아이들은 삼삼오오 자신의 자전거를 끌고 동네 중심으로 모였다. 그렇게 모여 든 아이들은 10여명 정도, 많게는 2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가운데 자전거가 없는 아이는 나뿐이었다. 그럼에도 난 항상 그들 틈에 끼어 있었다. 누군가의 배려로 뒷자리에 앉아 함께 놀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자전거를 타고 씽씽 달려가는 아이들을 따라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정도로 뛰어가기도 했다.



# 영화 `나의 독재자`


한 번은 아버지가 퇴근길에 그런 내 모습을 보셨나 보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아이들 틈에 끼어 두 바퀴가 아닌 두 발로 어울리던 내게 아버지는 밥상머리에서 “자전거 사러가자”고 했다. 게눈 감추듯 밥을 먹어 치운 나는 호기롭게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며 동네 자전거포로 향했다. 이후 자전거를 가진 아이들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을 것 같다. 그 시절 아버지들의 표현이 살가워봤자 얼마나 그랬겠나. 우리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그저 똑바르게 자라고 예의바르게 자라란 뜻으로 철부지 막내인 내게 그렇게 엄하게 대하셨을 것이다. 가끔씩 자전거처럼 큰 선물로 막내의 동심을 어루만져 주시는 아버지로서의 자상함과 푸근함도 주셨고. 지금에서야 알고 있고 편하게 말하는 거지만 그 당시 우리집은 엄청난 빗더미에 앉아 있었단다. 아빠 엄마 누나 큰형 작은형은 매끼니 두툼한 수제비를 먹었다. 쌀밥은 집에서 먹는 음식이 아닌 줄 알았다. 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말이다. 그 어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매끼니 새하얀 쌀밥에 달걀프라이, 장조림을 먹고 있었으니 말이다. 철부지 막내둥이의 재롱과 응석을 싫어할 아버지가 있었겠나. 누나와 형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막내를 더욱 다그치고 조심스럽게 키우셨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아버지가 돼보고 나서야 든 생각이다. 글로서는 감히 표현조차 힘든 아버지의 깊은 마음이 전해져 온다. 몇 글자 글로 표현하기에 아버지는 내게 정말 많은 기억들을 안겨주신 분이다. 슬프고 힘들고 아프고 즐겁고.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정말 싫었고 정말 좋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그런 기억과 추억을 가질 수 있었을까. 얼마 전 할머니의 제사가 있었다. 그토록 크고 무섭고 엄하고 강직했던 아버지가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린 채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를 보고 계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 영화 ‘나의 독재자’를 보고 극중 무명 연극배우 김성근(설경구)이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이 김일성이라고 주장하며 벌이는 얘기와 그런 아버지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다고 느끼는 아들(박해일)의 모습 속에서 얼핏 나의 아버지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도 그렇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가장 큰 벽이고 든든한 울타리며 가장 안전한 보금자리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지켜야 할 단 한 가지다. 자신이 살아가야 할 단 한 가지 이유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아버지는 남은 인생을 유령처럼 산다고 해도 불만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성근은 아들을 위해 위대한 연극의 중심으로 자신을 던진 것이다. 그렇게 ‘나의 독재자’는 시작이 됐다.

1970년대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일성의 대역이 존재했었다는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된 ‘나의 독재자’는 자칫 시대상을 중심에 둔 권력의 모순성에 기댄 사회파 영화로 그려질 가능성이 컸던 소재다. 하지만 감독은 김일성의 대역을 맡았던 인물을 연극배우로 설정하고 그 인물을 중심으로 그의 가족이 느꼈을 기쁨과 슬픔 그리고 아픔을 그리는 데 주력했다. 아버지로 변신한 설경구는 매번 작품 속에서 자신을 지우고 캐릭터로서만 존재하는 대표적인 충무로 배우다. 그의 연기는 한때 폭발성과 함께 강한 휘발성을 갖고 있었다. 그의 전작들이 주는 강렬함은 익히 알려져 온 캐릭터들이다. 하지만 반면 그 캐릭터들은 영화팬들의 가슴에서 이미 지워진 상태다. 그렇게 설경구란 배우는 폭발성과 휘발성을 동시에 내제한 배우였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 그는 광기에 사로잡힌, 배역에 집어 먹힌 아버지의 모습을 만들어 내면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연기를 선보였다. 아들로 등장한 박해일은 어떤가. 한때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그의 이미지 분석 충무로에 새로운 남자 배우의 전형성을 완성해 낸 바 있다. ‘살인의 추억’ 속 용의자와 ‘연애의 목적’ 속 날라리 선생님이 같은 인물이라고 누가 인정하겠나. 영화 ‘은교’에서 70대 국민시인 ‘이적요’가 박해일이라고 하면 믿겠나. 이들이 한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라면 믿겠나. 이런 두 배우가 만들어 내는 父子 케미(조화)는 ‘나의 독재자’가 만들어 질 수밖에 없는 충분한 이유를 전한다.

영화 속에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사실로 존재했던 여러 사건들이 단편적으로 등장한다. 남산의 중앙정보부 고문실, 개발 전 분당의 허허벌판, 다단계 판매 회사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던 1990년대 초중반,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정부가 아닌 단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정부의 존재가치 등 여러 불안감이 등장한다. 그 시대를 살아가려면 사실 김성근처럼 정신이 나간 그런 모습, 연극을 위해 살아가는 미친 광인의 모습이 제격이었을지 모른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그래왔고, 그렇게 살아왔고 그래서 지금 모든 것을 놓은 아버지의 어깨가 힘없이 축 처져 있는지 모를 일이다.

영화 마지막 김성근을 통해 드러나는 반전의 묘미와 그가 아들을 위해 아들에게만은 꼭 보여 주고 싶었던 그 한 서린 ‘리어왕’의 독백은 어쩌면 아버지도,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가족을 위해 아들을 위해 딸을 위해 포기하고 자신을 지운 채 살아온 세월에 대한 한탄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마지막을 아들에게만은 보여주고 싶었던 성근의 바람과 아버지의 그런 진심을 느낀 아들의 교차 대비는 이 영화가 말하는 주제의 중심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고 개발이 시작된 허허벌판에 홀로 덩그러니 남은 폐허가 된 집에서 아버지의 진심을 찾아낸 아들이 흘리는 눈물 속에서 이 시대의 아버지의 진심이 담겨 있음을 감독은 말하고 있었다.

“당신들은 위대한 배우입니다. 아버지, 당신의 삶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이제야 당신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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