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말목장터에서 고부농민봉기의 횃불이 

갑오년 정월 10일에 예동(禮洞)마을에 풍물패를 일으켜 사방으로부터 모인 군중의 대오를 정비하고 왕대나무로 죽창을 만들어 무장을 시킨 뒤 2개진으로 나누어 1진은 전봉준 장군과 정익서가 인솔하여 정읍시 영원면 운학동을 거쳐 고부 뒷모실 방죽으로 가고, 2진은 김도삼이 인솔하여 산매와 도계리를 거쳐 뒷모실 방죽끝에서 전봉준 장군과 합세하여 고부관아를 기습 습격하니 조병갑 군수는 어느새 줄행랑을 치고 말았습니다.

전해오는 말로는 이 때 조병갑의 방에서 보약 사발을 발견하고 손을 대보니 아직 식지 않아 도망친지 얼마 안되니 주위를 철저히 수색하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조병갑은 고부 입석리 진선마을에 살고 있던 정참봉 집으로 숨었다가 변장을 하고 그날 밤 정읍으로 나와 순창을 거쳐 전주 감영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조병갑의 학정에 분노하여 일어난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창고에 쌓인 곡식을 인근 빈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풀어준 후 말목장터로 나와 진을 쳤습니다.

이 때 고부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상당한 조직력과 군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봉기 직후인 11·12·13·14일에 가담한 촌락 수가 15개 마을이며 이를 통할하는 사람을 각 촌마다 5명씩을 두었고, 농민군 지휘부가 책임을 자신들에게만 한하지 않고 각각 마을의 동장·집강에게도 공동책임을 지우게 하였습니다. 또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징표로 왼손에 노끈을 매도록 하는 등의 사실은 고부농민봉기 당시부터 전봉준을 위시한 지도부는 상당한 조직적인 준비와 대응을 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 또한 고부농민봉기가 우발적인 단순 민란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실제로 전라감사 김문현은 말목장터로 전봉준 등을 암살하려고 정석진 이하 10여명의 군졸을 파견합니다. 정석진은 전봉준과 면담을 하여 해산을 종용했는데 때마침 파견된 군졸 10여 명이 담배장수로 위장하여 말목장터로 들어오는 것을 본 전봉준은 그들을 포박하도록 하고 봇짐을 확인해보니 담배 대신 병장기가 들어 있어 즉시 잡아들여 심문할 때 전봉준 장군이 그들의 포박을 풀게 하고 말하기를 “너희들은 전주감영에 있는 장교들이 아니냐? 이미 아는 바 있으니 숨기지 말아라. 우리는 결코 너희를 해치고자 하는 자가 아니다. 너희 또한 불쌍한 자들이라, 남의 노예의 생활로써 구구한 생명을 보전하는 자이니 너희가 무슨 죄 있겠느냐”하고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말목장터는 현재 정읍시 이평면 소재지의 부안, 태인, 정읍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갑오년 이전부터 농산물 거래 시장이 섰던 곳이랍니다. 현재 말목장터엔 장이 섰다는 흔적을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그 당시 전봉준 장군이 연설을 마치고 그 곳에 서있던 감나무에 기대어 앉자 감나무 가지가 보호하려는 듯이 내려앉았다는 얘기와 함께 180여 년 된 감나무만이 말없이 그 날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 감나무는 지방기념물 제 11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2003년 8월 25일 오후 3시 30분경 태풍 매미에 의해 밑동이 부러져 지금은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답니다. 하지만 그 원인이 자연재해만이 아니기에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몇 해 전 이 지역 유지들이 나서서 감나무 바로 옆에 삼강오륜의 덕을 밝히는 삼오정(三五亭)이라는 정자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양반 중심의 계급사회를 타파하고자 일어섰던 고부농민봉기의 현장인 감나무 옆에는 양반 문화의 상징인 삼오정
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에 따라 현재 위치인 이평 복지회관 앞으로 옮기면서 이름도 말목정으로 고쳤답니다.

그런데 처음 말목정을 세울 때 시멘트 기초공사를 한답시고 감나무로 가는 물길을 차단하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줄기·가지가 썩어왔고 게다가 계속 복토를 하는 바람에 결국 밑동 부분이 습기가 차면서 썩어 말라죽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태풍까지 더해 결국은 갑오년 고부농민봉기를 지켜보았던 유일한 증인(?)이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지요. 현재 부러진 감나무는 황토현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으로 옮겨져 보관하고 있답니다.

고부농민봉기에 대한 정부의 대응

고부를 점령한 농민군은 정월 17일에 말목장터로 나와 진을 치게됩니다. 이렇듯 고부농민봉기가 장기화되자 정부에서는 새로운 고부군수로 박원명을 새로 임명하는 한편 장흥부사였던 이용태를 고부군 안핵사(조선 후기 지방에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처리를 위해 파견한 임시 직책)로 임명하여 고부농민봉기를 조사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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