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새만금에서 4대강을 보다



# 전체주의 국가의 병사들 같은...



사람이 세상을 살다 보면 쓸데없는 안부 걱정에 잠이 안 올 때도 있는 법이다. 그 대상은 때로 사람이기도 하지만 한 마리의 사슴이거나 물고기, 혹은 한 그루의 나무일 수도 있고 거대한 산이거나 아기자기한 계곡일 수도 있다. 심지어는 무너진 건물의 뒤끝이 벼락처럼 궁금해질 때도 있고, 산골짜기에 처박힌 냉장고나 세탁기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던 게 십 년도 넘었건만 갑자기 그 골짜기의 안부가 궁금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길을 나서야 한다. 참는 게 미덕이 아니라 병이 돼버릴 수도 있는 게 인생이란 이름의 오묘함이 아니던가. 그리운 것은 그리워하자고 했듯이, 보고 싶은 것은 보면서 살자, 안부가 궁금하면 달려가서 확인하는 여유 정도는 갖고 살자 등등 뭐 그런 생각을 구체적으로 했던 것은 아니지만. 오직 그런 기분 하나만을 안고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냥 그렇게 길을 나섰다.

전날에 갑자기 새만금이 생각났었고, 그리고 당장 가보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기분에 빠졌더랬다. 무엇이 왜 궁금했는가는 그날 그 시간에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혹시 모르겠다. 며칠 전 어떤 뉴스에서 새만금이란 단어를 접하고 내심 충격을 받았던 것인지도. 어쨌든 우리는 갑자기 길을 나섰다. 무엇인가에 쫓기듯이, 마실 물 한 병 챙길 생각도 못한 채 그저 신발 신고 옷만 입고 차를 몰고 나섰다.

가는 길에 목이 말라 사과를 샀는데 그것이 희한했다. 사과와 단감을 그야말로 산처럼 길 위에 쏟아부어놓고 팔고 있었다. 그 장면이 무슨 그림처럼 눈에 확 띄었다.  운전을 멈추고 잠시 구경을 하다가 달려가서 “사과 좀 삽시다” 했는데 사과 파는 남자가 사과 한 알을 무작위로 집어 들더니 소리도 경쾌하게 쪼개서 내민다. 받아서 한 입 베었는데 아삭, 하는 감각이 아 참, 일품이었다.



# 산을 깎아다가 이것을 채워야 한다.


고르고 말 것도 없이 그냥 “만원어치만 주세요” 했더니 비닐봉지에 미리 담아 놓은 것 중에 하나를 번쩍 들어서 건네준다. 그것을 받아서 차에 싣고 달리다가 또 다시 목이 말라 사과 한 알을 꺼냈다. 그런데 이상했다. 사과 파는 남자가 소리도 경쾌하게 쪼개서 건넨 사과와는 감촉부터가 달랐다. 이거 왜 이러지? 다른 하나를 꺼내서 보니 쭈글쭈글하다. 사과 특유의 상쾌한 감각과는 영 거리가 멀다. 이거 정말 왜 이래? 좀 더 안쪽에서 한 알을 꺼내 보았다.

이번에는 한쪽이 상했다. 사과를 따다가 생긴 생채기가 아니다. 과일이 오래 됐을 때 생기는, 일종의 부스럼딱지 같은, 요컨대 썩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가을이 깊었으니 사과의 계절이라 할만도 한데 오래 전부터 썩어 들어가는 사과가 있다? 아니다. 아무리 봐도, 보고 또 봐도 이건 최근에 딴 과일이 아니다. 며칠 전에 딴 사과가 쭈글쭈글한 주름을 달고 썩어 들어갈 수는 없는 거다.

그렇다면 미처 다 팔지 못해서 저온창고에 처박아 두었던 작년의 사과를 금년의 사과와 섞어놓고, 혹은 감춰놓고 있다가 나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사과 만원어치 주세요”하는 손님이 있을 경우 그것을 건네주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요새 유행하는 단어 뭐냐 그 호갱이 된 거다. 지랄 같다. 기분이 참 지랄 같다. 당장 되돌아가서 따귀라도 한 대 올려붙여줄까 했지만, 오죽하면 이렇게도 금방 들통이 날 서투른 속임수를 쓰고 있을까 싶어 그냥 참기로 했다.

그날 내가 느닷없이 새만금을 향해 달리고 있던 중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사과 장사의 얄팍한 속임수를 그저 참고 넘기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른다. 참는다는 거, 속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참는다는 것만큼 마음이 복잡해지는 소재도 아마 인생에서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같이 화를 낼 때와, 알면서도 모르는 체 그냥 넘어가야 할 때를 즉각 판단해서 실천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김수영은  이런 탄식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 16년 전의 새만금 갯벌 장승촌


‘나는(우리는) 왜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가.’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를 읽은 뒤로 내가 나를 세뇌시켜 왔던 것인지도. 이를테면 국밥집 같은 데서 국밥에 머리카락 한 올 빠진 것을 놓고 불같은 화를 내는 따위 괴물은 되지 말자. 적어도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다는 게 명백하게 드러났는데도 불같은 화를 낼만한 도덕 역량을 지니지 못했다면 국밥에 머리카락을 흘린 국밥집 할머니 앞에서도 말없이 묵묵히 머리카락을 골라내고 국밥이나 ‘처먹어야 한다’는 뭐 그런 사상 비슷한 것을 나는 아마 김수영을 읽은 뒤로 갖게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썩은 사과에 대해 침묵하기로 했다. 내 옆에서 내여자는 속이 상해서 못 살겠다는 듯이 물건을 살 때 드러나는 남자의 단점에 대해 이런저런 항목들을 열거하고 있었지만 그 말도 그냥 못 들은 듯이 침묵한 채 운전이나 열심히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아무런 사고도 없이 우리는 그 유명한 새만금 방조제로 들어섰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가 저 아득하게 소실점이 보일 정도로 길기만 한데 특히 끝도 없이 늘어선 가로등이 뭐랄까, 전체주의 국가의 병사들이 벌이는 무슨 퍼레이드 같았다.

새만금. 만경평야와 김제평야에 버금가는 새로운 평야를 조성한다는 의미에서 새만금이란 이름을 붙였다던가. 내가 그곳을 처음 가본 것은 십육 년여 전이었다. 그때도 그곳에 딱히 무슨 목적이 있어서 간 것은 아니었다. 가보고 싶어서 가본 것도 아니었다. 



# 갯벌을 죽이지 말라!


명색이 귀향이랍시고 고향으로 내려온 지 일 년도 채 안 돼서 함께 살던 여자와 헤어지고, 아버지는 술병으로 돌아가시고, 키우던 소는 재미도 없고 신명도 안 나고 무엇보다 내 능력으로는 더 이상 관리할 자신이 없어서 한 마리도 아닌 세 마리를 단돈 일백팔십 만원에 팔아 치워야만 했던 제법 암울한 시기였다. 아무런 생각도, 하는 일도 없이 방구석에 처박혀서 밤낮 없이 비디오나 틀어놓고 있던 즈음의 어느 하루 위문객들이 들이닥쳤다. 어디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들이닥친 네 명의 사내들 과 차마 어깨동무까지는 못하고 어기적거리며 따라 나섰다.

저마다 각자 나름의 시를 쓴다고 떠들어대는 사내들과 함께 어디어디를 거쳐서 자리를 잡고 앉은 곳이 새만금이었다. 새만금 전체를 둘러본 것도 아니었다. 딱 한 군데, 전국 각처의 환경단체에서 한두 개씩 세워놓은 장승촌, 그 딱 한 곳에서 우리는 무려 세 시간 가까이를 소비했다. 새로운 전라북도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선전을 해대는 공무원들 앞에서 거짓말 좀 그만하라는 등의 ‘자발없는’ 소리를 몇 번인가 해보기는 했지만, 나로서는 크게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는 곳이 새만금이었다.

보면 알게 되고, 알면 사랑한다고 했던가. 새만금과 내 인생은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여겨온 내가 그날 참 많이 슬퍼 버렸다. 자연과 더불어 신나게 자유롭게 살아가던 중에 도둑처럼 갯벌을 잃어버린 갯사람들은 도시로 들어가서 새로운 빈민으로 등록되어 자본의 소모품으로 소비되어 갈 것이었다. 장승촌의 수많은 장승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우리는 그날 단 한 모금의 술도 마시지 않았건만 술이 잔뜩 취한 사람들처럼 소리를 질러대며 앉았다가 일어서기를 되풀이했다.

장승이란 그것 참, 보면 어찌 그리도 슬프게 웃기는가. 웃음이 터지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눈물이 나오면 웃음도 동시에 터질 것만 같은 장승의 표정을 하나하나 일일이 살펴 가면서 우리는 각자 나름의 소양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기도 하고, 묵념도 하고, 떠들어대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미친 짓을 벌이고 있었다.



# 과거의 바다


“이것은 폭력이다. 대단위적인 폭력이다. 야, 이런, 이런 니기미럴.”

그날 우리가 떠들어댄 내용을 요약하자면 아마 그런 정도쯤 됐었을 것이다. 아무런 생각도, 준비도 없이 새만금에 그야말로 뚝 떨어지듯이 도착해버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렇게도 무지막지한 욕지거리뿐이었다. 어쩔 것인가. 아는 것이 없는데 뭘 어쩔 것인가 말이다. 명색이 시를 쓴다고 낑낑대는 사람들이고 보매 그나마 상상력은 맞아죽지 않을 정도로 있어서 이런저런 스토리를 즉석에서 만들어내고 있기도 했다.

바다 생물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재앙도 이런 재앙이 없을 것이라는 점에 우리는 의견을 같이했다. 툭하면 기름을 유출시켜서 떼죽음을 시키는가 하면, 오폐수를 흘려보내 온갖 생명을 기형으로 만들어놓고, 이제는 아예 갯벌 자체를 없애겠다고 나선 인간들은 대체 무슨 존재인 것일까 하고, 바다를 고향으로 태어난 바다 생물들은 아마도 의아해 하며 분통을 터뜨리고 잇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바다 생물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린 그동안 인간들에게 먹을 것을 엄청나게 공급해 주었어. 우리가 애써 새끼를 낳으면 인간들이 잡아다가 가죽을 벗겨 회를 뜨고 토막 내서 매운탕을 끓이고 짓이겨서 젓갈을 담그고 등등 이런저런 온갖 방식으로 처먹어댔어. 그렇게 먹어댄 결과로 인간들은 엄청나게 건강해졌단 말이야. 그렇게 건강해진 몸으로 인간들은 이제 중장비를 만들어서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고 있단 말이거든. 이게 대체 뭘 말하는 걸까, 응? 다함께 망하자는 걸까?



# 미래의 육지


그날 우리가 내린 결론은 결국 그런 것이었다. 다함께 망하는 길을 향해 대한민국 정부는 지금 열심히 세금을 쓰고 있다는 것. 그런 어설픈 결론을 각자 가슴에 품고 우리는 우울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십육 년이 흘렀다. 우리는 그동안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새만금은 안 된다는 등의 주장을 펴기는 했지만 막강한 국가권력의 벽을 넘기는커녕 벽 앞에 다가서지도 못한 채 물막이 공사는 계속됐고, 그리고 끝났다고 요란한 준공식이 열렸다.

누군가는 말했다. 현대의 토목기술은 못 하는 게 없다고, 있는 산을 없애기도 하고 없는 산을 새로 만들기도 한다고. 어떤 사람은 새만금을 일러 세계 최대 규모의 간척사업이라고 말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새만금을 일러 세계 최대 규모의 환경파괴 즉 지구의 미래를 망치는 행위라고 말한다. 찬성과 반대 의견이 팽팽하게 맞설 때는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 사업도 당연히 중단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리분별이고, 상식이고, 도덕이라고 우리는 배웠다.

사리분별도 없고, 상식도 없고, 도덕심마저 물 말아 먹기를 손바닥 뒤집기처럼 해대는 게 정치권력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새만금은 해도 너무 했다는 게 정부당국 자신들이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내놓은 이른바 개발계획이라는 것을 들여다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도대체 그 목적이 몇 번이나 바뀌었던가. 세계 각국의 온갖 기업과 단체와 정치 권력자들과 사진 빵빵 찍어대며 채결한 양해각서는 도대체 몇 장이나 될 것이며, 투자의향서는 또 몇 장이나 될 것인가.

지난 세월을 복기해보면 어지럽기만 하다. 그동안 정부 당국자들이 내놓은 청사진에 따르면 새만금은 세계 각국의 온갖 첨단 산업이 다 들어와야 한다. 첨단산업뿐만 아니라 미국의 라스베이거스에 버금가는 도박장도 들어서야 하고, 세계 최대 아니 우주 최대 규모의 골프장도 들어서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 규모의 말 목장도 들어서야 하고, 역시 세계 최대 규모의 예술촌도 들어서야 한다. 거기에 더해서 얼마 전 전북도 당국에서는 대한민국의 토종 고래인 상괭이를 활용하는 무슨 트래킹 코스를 개발한다는 청사진을 내놓고 있기도 하다.



# 돌아오는 길에...


오, 애제라. 사리분별도 없고 상식도 없고 도덕심마저 물 말아먹기를 손바닥 뒤집기처럼 해대는 정치 권력자들이 미래를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나마 양심을 가진 인간이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깨져 버렸다. 십 년 앞도 못 보는 자들이 백 년 미래를 설계한다고 떠들어대고 있다는 것을 새만금만큼 극명하게 증명해주는 것도 아마 없을 것이다.

돌아보면 끝나자마자 실패로 결론나고 있는 4대강 사업은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다. 대다수 국민들이 반대하는데도 밀어붙인 새만금의 전례가 없었다면 4대강도 차마 그렇게까지 자신만만하게 밀어붙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과연, 땅이 없어서 뭘 못하는 것일까? 대한민국 땅덩어리가 좁아터져서, 그래서 무엇이든 할 만한 능력이 되는데도 못하는 것일까? 생활 만족도가 높기로 유명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대한민국보다도 훨씬 작다. 우리는 남북통일이 된다면 유럽의 어느 국가와도 비교우위에서 크게 밀리지 않는다. 

물론 새만금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신시도라는 이름의 섬을 중심으로 바다를 성채처럼 막아놓았을 뿐이다. 방조제를 중심으로 바다 이쪽과 저쪽이 있는데 이쪽을 돌과 흙으로 채우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깊고도 넓고 푸르기만 한 저 바다를 다 채우려면 산은 또 앞으로 몇 개나 없어져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면 아찔하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런 사업이 내가 낸 세금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그 돈의  태반이 재벌들의 덩치를 키워주는 것 이상의 별 역할도 못한 채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생각하면 짜증이 나서 납세거부 운동이라도 벌여야지 않나 하는 생각조차도 든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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