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생생 역사 현장 탐방 - 조선 청백리의 상징 '비우당'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 선생이 머물렀던 낙산의 `비우당`을 찾아가봤습니다. 황희 정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류관의 청렴함을 되새기며 현대인들의 물욕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류관이 살았던 `비우당`. 울타리도 안쓰럽게 여긴 태종이 사람을 보내 몰래 설치했다고 한다.



청계천을 걷다 보면 수많은 다리를 만나게 된다. 모두 저마다의 `이름`이 있다.

그 중 신설동역 인근 다리 중 한 곳의 이름은 다름 아닌 `비우당교`다. 기자는 이 곳을 수 차례 지나다녔지만 왜 그렇게 부르는지 알지 못했다.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다리 밑에 달랑 붙어있는 명칭 하나만으로 호기심을 갖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 신설동역 근처 청계천에 있는 `비우당교`


`이왕 고민해서 다리 명칭을 만들었다면, 그 유래가 어디인지 안내문이라도 설치돼 있다면 더 좋은 역사 교육이 됐을텐데…`하는 아쉬움이 크다.

청계천 `비우당교`

오늘 찾아가는 곳은 `비우당교`의 주인공인 `비우당`이다. 비우당교는 신설동과 가깝지만 실제 `비우당`을 찾아가려면 어느 정도의 발품은 팔아야 한다. 가장 찾아가기 쉬운 방법은 동대문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동대문을 간단히 답사한 뒤 이화여대부속병원을 바라보면 낙산과 함께 골목길 한쪽으로 이어져있는 서울성곽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낙산 서울성곽 길을 걸어 올라가자. 산이라고 하지만 그리 높지 않기에 연인들의 산책 코스로도 유명하다.

여기서 낙산에 대한 기본지식 몇 가지. 낙산은 산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해 낙산 또는 낙타산으로 불렸다. 현재는 서울 종로구와 성북구에 걸친 산으로 서울 도성의 동산(東山)에 해당한다.



# 비우당 입구의 안내 표지판


남산 북악산 인왕산과 함께 서울 내사산의 하나로 풍수지리상 동쪽 좌청룡에 해당한다. 서쪽 우백호가 건너편 인왕산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 암반으로 돼 있으며 예전엔 숲이 우거지고 절경이 많아 삼청 인왕 백운 청학동과 더불어 도성안 5대 명승지로 꼽혔다고 한다.

조선 시대엔 왕의 아우 인평대군의 거소인 석양루가 있었고 이화정과 영조 때의 문인 이심원이 지은 많은 정자가 있었던 곳이다. 하지만 일제 시대 때 채석강이 만들어져 상당 부분 훼손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지금도 산 곳곳에서 절벽과 같은 아픈 흔적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집에 비새면 우산으로"

낙산 성곽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지루하지 않다.

산업화 시대부터 있었던 판자촌을 보며 그 시대 노동자들과 서민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낙산 공원까지는 대략 20분 정도 걸린다.



# 낙산 성곽도 돌아볼 수 있어 `비우당` 나들이는 일석삼조다.


막다른 길에 이르면 두 갈래 길로 갈라지는데 왼쪽이 낙산 전망대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이 `비우당`으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으로 꺾어져 빠른 걸음으론 5분, 넉넉잡아 10분 정도만 걸으면 목적지인 `비우당`을 만날 수 있다.

`원각사`와 `자주동샘`, 그리고 `비우당` 안내판이 따로 걸려 있지만 실제로는 모두 인접해 있다. 큰 도로에서 아래를 보면 아파트촌에는 어울리지 않는 초가지붕이 보이는데 바로 그 곳이 `비우당`이다.

`비우당`은 조선시대 실학자인 이수광(1563∼1628)이 <지봉유설>을 지은 곳이다. 그가 지었다는 <비우당기>엔 이수광의 외가쪽 5대 할아버지인 청백리 정승 류관이 이 곳에 초가삼간을 집고 살았는데 비가 오면 우산으로 빗물을 피하고 살았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 류관은 비가 새면 과거 급제 때 받은 우산으로 피했다고 한다.


어느 해 장마가 한 달이나 들었을 때 집안에는 빗물이 새고 있었는데 다급해진 그가 과거급제 때 하사받은 우산으로 빗물을 피하면서 부인을 보고 "우산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디겠소"하고 걱정하자 부인이 "우산 없는 집이야 다른 준비가 있겠지요"라고 말하니 류관이 빙긋이 웃었다고 한다.

그처럼 류관은 살림살이를 다스리지 않고 언제나 학문을 즐겨 그의 청렴결백함은 당시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후 이수광의 부친이자 삼조판서를 지낸 이희검(1516-1579)이 청빈사상을 몸소 실천하면서 이 집에서 살았다.

"우산 받고 살아오신 조상들"

`비우당` 옆 검은 돌 위에 새겨진 <비우당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임진왜란에 없어진 집터에 조그만 집을 짓고 비우당(庇雨堂이)라고 했다. 비바람을 겨우 막겠다는 뜻이다. 우산을 받고 살아오신 조상의 유풍을 이어간다는 뜻도 그 속에 담겨 있다."



# 짧지만 정겹고 이쁜 비우당 옆 계단길


이수광의 호인 `지봉`도 고개를 숙인 듯 남쪽으로 뻗은 지봉(芝峰)에서 나왔다. <비우당기>에 따르면 류관이 처음 이 곳에 초가집을 지을 때만 해도 수십여명이 앉을 만한 넓은 바위와 10여 그루의 소나무, 루봉정(樓鳳亭)과 동산이 그윽하게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때 심하게 훼손돼 없어진 초가집은 1996년 서울시에서 주관해 복원했다. 때문에 <비우당기> 비 아랫쪽엔 `서울특별시장 조순`이란 글자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오직 초가집 한 채 뿐인 비우당의 면적은 약 152㎡(46평)에 불과해 `정승을 지낸 사람이 정말 이 곳에서 살았을까`하는 의문이 생겨날 정도다.

한편으론 `더 좋은 곳, 더 편한 곳`에서 살기 위해 고심하는 현대인들에게 `집`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들어준다. 2009년 대한민국엔 수백여평의 호화 주택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1평 남짓의 쪽방에서 하루를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다. 과연 인간에게 집이란 무엇일까.



# 단종대왕 천도도량 `원각사` 안내표지판



`자주동샘`과 `원각사`


비우당 뒤편엔 단종비였던 정순왕후의 일화가 얽힌 자주동샘이 있다. 비운의 왕비인 정순왕후가 궁궐에서 쫓겨나 동대문 밖 민가에서 어렵게 살 때 옷감에 염색을 해 근근히 생계를 유지했는데 이 때 이 샘에 와서 비단을 빨면 저절로 자주색 물이 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바로 옆에는 `단종대왕 천도도량`이라는 간판을 단 원각사가 있어 이 주위가 단종과 깊은 인연이 있음을 보여준다.



# 단종비 정순왕후의 애환이 담긴 `자주동샘`


조선 청백리의 삶이 여실히 드러나는 비우당으로의 나들이는 서울성곽과 함께 다양한 유적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석삼조 이상의 외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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