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생생 역사 현장 탐방-단종비 애환 담긴 '동망봉'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단종비 정순왕후의 애환이 담긴 낙산 인근의 유적을 찾아가봤습니다. 지난호에서 다뤘던 비우당 뒤편 자주동샘에서부터 발걸음이 이어집니다. 15세에 결혼해 82세까지 한 사람만을 그리워하며 산 단종비의 불운했던 삶의 자취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종비의 릉 이름을 `사릉(思陵)`이라고 부르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 자주동천


"왕관을 벗어놓고 영월땅이 웬말이냐
두견새 벗을 삼아 슬픈 노래부르며
한양 천리 바라보고 원한으로 보낸 세월
아, 애달픈 어린 임금 장릉에 잠들었네.
두견새 구슬프게 지저귀는 청령포야
치솟는 기암절벽 굽이치는 물결은
말해다오 그 옛날에 단종 대왕 귀양살이
아 오백년 그 역사에 비각만 남아있네"
<심수경이 부른 `두견새 우는 청령포`>


낙산 근처는 단종비 정순왕후가 궁궐에서 쫓겨난 뒤 불운한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옷감에 염색을 하며 힘들게 생계를 이어갔던 정순왕후는 매일 같이 산에 올라 멀리 영월쪽을 바라보며 낭군인 단종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지난번에 소개했던 비우당 뒤쪽 자주동샘(紫芝洞泉)은 정순왕후가 비단을 빨았던 곳으로 이 샘에 와서 비단을 빨면 저절로 자주색 물이 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평생 님과 떨어져 지내야했던 한이 그만큼 사무치게 깊었기에 이런 얘기가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주동샘 바로 옆엔 `단종대왕 천도도량` 원각사가 있어 불행했던 왕의 영을 기리고 있다.

이 곳에 가기 위해선 동대문에서 낙산성곽을 따라 올라간 뒤 막다른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 청룡사


# 청룡사(우화루)



12세 왕을 위로하던 왕비

단종비인 정순왕후 송씨는 여랑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15세 때 단종 왕비로 간택됐다. 1454년(단종 2년)의 일이었다. 당시 단종의 나이는 12세에 불과했다. 두 사람 모두 어린 나이여서 정상적인 첫날밤(?)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모를 여윈 단종으로선 3살 많은 송씨만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어서 숙부인 세조에 대한 불안감을 자주 털어놨다. 그 때마다 송씨는 누나처럼 어린 단종을 위로했다고 한다.

송씨가 왕비가 된 지 불과 1년만인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는 일이 발생했다. 단종은 상왕으로 봉해졌다가 1457년(세조 3년) 영월로 유배되고 만다.



# 비각


# 비각(내부)


# 비각(영조 친필)


성삼문 하위지 이개를 비롯한 사육신이 수양대군 일파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우다 중도에 발각된 게 계기가 됐다. 사육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이로 인해 단종은 노산군으로, 정순왕후 송씨는 왕대비에서 부인으로 강등됐다.

송씨의 한많은 인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단종 복위 운동에 충격을 받은 세조는 송씨의 친정아버지인 송현수에게도 역모의 죄를 뒤집어 씌어 교수형에 처했고 단종은 영월로 유배보냈다. 권력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는 죽고, 왕이었던 어린 남편과는 생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3년 간 부부로 지낸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두 사람이 헤어지는 날 하늘도 슬퍼하는지 빗발이 흩날렸다고 한다. 떠나는 단종은 "중전, 부디 오래 살도록 하시오. 내 소원은 그것뿐이오"라며 송씨를 걱정했고 송씨는 "신첩은 오로지 전하의 뒤를 따르고자 할 뿐입니다"고 눈물을 흘렸다.
청령포에서 송씨를 애타게 그리워하던 단종은 두견새가 울자 이런 시를 짓기도 했다.

달 밝은 밤 자규새는 구슬피 우는데/ 시름 겨워 자규루에 기대노라/ 네 울음 슬퍼 내 마음 괴롭구나/ 네 소리 없으면 이내 시름없을 것을/ 부디 춘삼월에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



# 동망봉(동망정)




# 동망봉(안내판)


단종은 청령포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1457년 끝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후 정순왕후는 낙산 근처에서 시녀들과 외로이 살다가 1521년(중종 16년) 세상을 떠났다. 단종이 죽고 64년을 혼자 외롭게 살다 간 것이다.

그 후 1698년(숙종 24년)에야 단종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다시 올려졌고 종묘에 신위가 모셔졌으며 능호는 사릉(思陵, 사적 제209호)이라 했다.

비우당과 자주동샘을 둘러본 후 다시 5분쯤 큰 길을 따라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청룡사`라는 사찰을 만날 수 있다. 922년(고려 태조 5년) 태조 왕건의 명으로 창건한 유서 깊은 절이다. 낙산이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청룡사 대웅전 건너편에 꽃비가 흩날린다는 뜻의 `우화루`가 있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이별하기 전 이 곳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고 한다.

정순왕후가 살았다는 초가집 터는 절 옆 화장실쪽 철문을 통해 들어가면 되는데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정업원 옛터)라고 불린다. `정업원`은 왕가의 후궁들이 과부가 된 뒤 비구니로 머물며 자신이 모셨던 왕의 명복을 빌며 수절을 지킨 곳이었다. 그들에겐 그게 정해진 `업`이었던 것이다.

기자가 청룡사에서 만난 한 노승은 "정순왕후는 이 곳에서 비구니로 살다 생을 마쳤다. 그런데 바깥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영도교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

송씨가 불교에 귀의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곳에 머물며 매일 같이 산에 올라 단종의 명복을 빌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조정에서 이를 가엾이 여겨 근처에 영빈정을 지어주기도 했지만 송씨는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송씨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한 백성들이 밤이면 처마 밑에 몰래 곡식을 갖다놓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한경지략>에 따르면 영도교 인근에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유래도 송씨와 관련돼 있다. 송씨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끼니때마다 채소를 가져다주자 궁에서 이를 못하게 말렸다. 그러자 여인들이 지혜를 짜내 송씨의 초막에서 멀지 않은 이 곳에서 채소를 파는 척하며 송씨에게 가져다 줬다고 한다.

현재 초가집 터엔 작은 비각이 하나 있는데 영조 47년에 정순왕후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호)다. 비각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내부는 들여다볼 수 없다. `전봉후암 어천만년(앞산의 봉우리, 뒷산의 바위여 천만년이나 영원하라)`이라는 비각 현판의 글과 `정업원구기 세신묘 구월육일 음체서`라는 비문은 영조가 직접 쓴 글이다.

청룡사와 정업원 옛터를 둘러본 뒤 다시 큰 길로 나와 5분쯤 골목길을 따라가면 동망봉에 오를 수 있다. 현재는 숭인공원(동망봉공원)으로 불리는 곳이다.

정순왕후가 매일 영월 쪽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었던 자리에 영조가 친필로 `동망봉`이라고 새겼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일제시대 때 채석장이 생기면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대신 근래에 `동망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단종비 송씨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은 하산길에도 이어진다. 동망봉에서 내려와 큰 길을 건너면 동관왕묘(동묘)가 있고 그 뒤쪽 청계천에 `영도교`(永渡橋)라는 다리가 놓여있다.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는 의미로 단종과 정순왕후가 이 곳에서 마지막 이별을 했다. 지금도 다리 위 양쪽엔 연등이 줄지어 있어 비오는 날이면 유달리 슬픔이 묻어나는 곳이다.

조선 오백년 역사에서 대표적인 비극의 주인공이었던 단종과 정순왕후. 이승에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생이별을 했지만 저 세상에선 그 어떤 사랑보다 아름다운 재회의 기쁨을 나눴으리라.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