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린 지음/ 자음과모음






섬세하고 감각적인 필치로 우리 시대 여성의 삶을 기록해 온 작가 전경린의 열한번째 장편소설이 출간됐다.‘최소한의 사랑’이 내재한 상실의 체험과, 뜨거운 문제의식이 돌출된 ‘열정의 습관’을 넘어,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그/녀’들에게 부과된 ‘괄호 쳐진’ 삶과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다.

‘유지’는 어린 시절 큰 고모부를 아버지로 알고 살았지만, 그의 죽음과 더불어 작은 고모인 ‘손이린’이 생모임을 알게 된다. 크레바스를 건너듯 단숨에 그녀의 삶이 변하고, 이린과 함께 새로운 생활을 꾸려나가게 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유지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런 그녀에게, 생물 교사인 ‘이사경’의 존재는 각별하다. ‘침묵의 음성’을 가진 그에게 유지는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되고, 자신의 감정과 존재성을 인정받기 위해 그의 앞에서 옷을 벗는다. 어린 제자의 돌발적 행동 앞에서 이사경은 당황하고, 곧 이 사건은 그의 아내인 ‘백주희’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이사경의 어머니인‘노부인’은 유지를 손자인 ‘연조’의 피아노 교사로 집에 들이고, 되려 유지를 다그치는 이는 백주희가 아닌 손이린이다. 이 묘한 관계성 속에서, 유지는 이린과 사경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

“삶이란 부재의 사과를 깎는 일”이라는 이린의 말처럼, 우리에게 사랑이나 이별이라는 존재 양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그것이 지나가버렸을 때, 즉 부재했을 때다. 모든 갈등과 슬픔, 고독과 공허를 바다로 흘려보낼 때, 비로소 강의 줄기들이 드러나는 것처럼.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과 이별을 반복하는 것은, 이 같은 체득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공간들이 항상 새롭게/불현듯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삶의 진실’이란 항상 그러한 잠재적 공간에서 출몰하기 마련이다.

정리 이주리 기자 juyu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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