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학생들을 상대로 국사 수업시간을 활용하여 명성황후 OST 뮤직비디오를 보여준 다음 즉석에서 역할을 나눠 패러디를 해본 적이 있답니다. 배역을 나누는데 아이들은 서로 정준호(홍계훈 역)를 하겠다고 나섰답니다. 하긴 그럴 만도 합니다. 제가 봐도 홍계훈 역을 맡은 정준호는 멋있으니까요. 명성황후를 향한 일편단심, 화려한 무술 실력과 비장한 최후, 무엇보다도 잘 생긴 외모는 아이(본인이 재직중인 학교는 여중학교 임을 감안하기 바람)들을 단번에 사로잡고도 남을 매력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뮤직비디오의 여파로 한때 홍계훈이란 인물이 인터넷 검색어 순위에서 상위를 차지한바가 있었답니다. 그리고 한 인터넷 지식 검색 질문에 다음과 같이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gatsby21 조회 : 299 답변 : 1 (2003-06-02 23:17 작성)
홍계훈장군님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그의 생애나 업적 모두…동학 농민운동 1차 봉기때 진주성에서 막고 임오군란때 명성황후를 장호원으로 피신 시키고 을미사변때 광화문에서 맞서 싸우다 저세상으로 가신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스러운 분중 한 분인데, 그분에 대해서 자세히 좀 알려 주실수 있는 분 없습니까? 사학자라든지. 아님 대학에서 사학전공이라 잘 아신다든지. 그분에 대해 너무나 궁금하고 존경 스럽습니다. 더욱더 그분에 대해 알고 싶사와요.』

이쯤 되면 앞서 살펴본 명성황후와 같은 맥락으로 홍계훈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지요. 홍계훈은 조선 고종 때 무관을 지내다 임오군란 때 무예별감(武藝別監)으로서 명성황후를 등에 업고 궁궐을 빠져나가 명성황후의 목숨을 구원한 공으로 출세가도를 달려, 1882년 8월 포천 현감을 지내고 충청도 수군절도사,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으나 군포(軍布) 수납이 부진하여 파직되기도 하였습니다.



# 대둔산전투


이는 명목상으론 군포수납이 부진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 수령들 사이에 만연해 있던 부정보다도 더 큰 부정을 저질러 묵과하고 넘어갈 수 없었을 지경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러나 명성황후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어 그 후 고종31년 장위영(壯衛營) 정영관(正營官)으로 복직하여 활동 중,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가 되어 동학농민군을 학살한 공으로 1895년 훈련대(訓鍊隊) 연대장에 승진했고 유길준(兪吉濬)과 박영효(朴泳孝) 타도에 앞장섰으나, 이듬해 을미사변 때 광화문을 수비하다 일본군에게 살해되었던 인물입니다.

이러한 홍계훈에 대한 평가는 명성황후 개인의 입장으로 볼 때는 충성스러운 심복이 될지는 모르나 당시 민중의 입장에서 평가는 출세를 위해 명성황후란 실세에 줄을 댄 감각적인 정치인으로 그 목적을 위해서는 자기 나라 백성마저도 학살하기를 서슴치 않았던 민씨 정권의 주구(走狗=사냥개)에 불과하다는 평가 또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홍계훈은 죽은 후 대신으로 추증되었으며 충의(忠毅)란 시호(諡號)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안개 낀 장충단공원’이란 노래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나이 드신 분들의 애창곡으로 사랑 받는 노래로 요절가수 배호가 불렀지요.

여기서 말하는 ‘장충(裝忠)’이란 충을 권장한다는 뜻입니다. 장충단에는 본래 제단과 사전(祀殿), 부속건물 등이 있었고, 그 앞으로 ‘장충단’이라고 새긴 석비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지키다가 죽은 홍계훈을 비롯한 군인들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 등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지요.

그러나 일제는 1920년대 이 일대에 벚꽃 수천 그루를 심고 연못, 놀이터, 산책로 등 시설을 설치하고 공원을 조성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1932년에는 장충단이 있던 근처에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博文寺)란 절을 세웠답니다. 해방 이후 박문사에는 이토 히로부미 대신 안중근 의사의 위패가 모셔져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의 기막힌 사후 인연이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홍계훈의 중앙군을 격파한 장성 황룡강 전투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농민군은 남진하여 고을마다 점령한 후 함평에 들어서 한껏 세를 과시하면서 고도의 심리전을 폈습니다. 농민군들은 진세를 펼치고 기예를 보이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고 황현의 「오하기문」에는 전합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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