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생생 역사 현장 탐방- 약현성당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구세군본영, 정동제일교회, 성공회 성당, 명동 대성당에 이어 이번에는 약현 성당과 인근의 서소문 성지를 찾아가봤습니다.




# 약현성당은 명동대성당에 앞서 실험적으로 건축된 최초의 벽돌조
서양식 건축물이다.



2008년 초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국보 1호이자 서울의 대표적 문화재인 남대문이 화마에 휩싸여 하나씩 까맣게 타들어 갈 때도 속수무책인채 발발 동동 굴러야 했�. 일차적인 책임이 방화범과 관리책임에 소흘했던 당국에게 있지만 그 동안 우리 문화재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의 생각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남대문에서 멀지 않은 곳, 과거 서소문 밖에서 대형참사를 예고했던 한 사건이 1994년 발생했다. 근대 종교건축물로 가치를 인정받던 약현 성당이 술취한 한 노숙자로 인해 화재로 전소된 것이다. 남대문도 어쩌면 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자신의 운명을 예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양쪽 기둥을 따라 삼등분으로 구성된 내부


주로 ‘평신도’ 순교

서울시 중심부에 몰려 있는 근대 종교 건축물들은 종로에서부터 광화문을 거쳐 정동과 명동에 이르기까지 조금만 발품만 팔면 하루에 다 돌아볼 수 있다. 물론 각각 날짜를 달리해 찾아가는 것도 무방하다.

종로쪽 천도교 대교당을 시작으로 새문안 교회와 구세군 본영, 정동제일교회, 성공회 성당을 거쳐 명동성당에서 잠시 휴식을 가진 뒤 서울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자.

중간에 복원 공사 중인 남대문의 답답한 모습과 남대문 시장의 옛 자리, 그리고 상공회의소  옆 서울 성벽의 남은 자취들도 감상할 수 있어 일석삼조 이상의 볼꺼리를 만끽할 수 있다. 중앙일보를 지나 큰 길과 철로를 건너면 나무로 뒤덮인 작은 공원이 나온다. 공식 명칭은 ‘서소문 근린공원’이지만 일반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에겐 서소문 성지로 불린다.

조선시대 서소문은 남소문(일명 광희문, 장충공원에서 동대문으로 가는 길에 위치)과 함께 도성 내 장례를 지낼 때 시체를 문밖으로 운반하던 출입구 역할을 했다. 인근에 남대문 시장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잦던 곳이기도 했다. 조선의 국기를 문란하게 했던 국사범들을 처형해 효수하는 데 이만한 곳도 드물었다.

때문에 천주교 박해 시기 수많은 사람들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다. 19세기 초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을 비롯 정약종, 최창현, 강완숙 등 한국 천주교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이 이 곳에서 순교했다.

새남터나 당고개, 절두산에서 김대건 신부 등 성직자들이 많이 순교했다면 서소문 밖 네거리는 학문 연구를 통해 자발적으로 신앙을 갖고 교회를 세웠던 천주교 평신도들이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켰던 곳이다. 정하상, 유진길, 남종삼 등도 이 곳에서 참수되는 등 문헌에 기록된 숫자만 해도 100명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 중 44명이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성인 품에 올랐다.



# 약현성당 제대  



# 성당 천정 갈빗대 모양 뼈대



# 뒤편 성가대석



‘갈빗대 모양’ 뼈대

과거 순교의 피를 흘렸던 자리는 아현 고가도로와 서울역~서대문 도로의 교차점에서 서울역과 가까운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한쪽에 위치한 서대문 근린공원엔 이 곳이 순교 성지임을 알리는 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원형에 새겨진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린 사람들’이라는 문구와 함께 순교자들에 둘러싸인 십자가가 눈길을 끈다.

이 곳은 또 서울역 인근의 노숙자들이 한낮 땡볕을 피해 그늘을 찾는 곳이자 인근 주민들의 휴식처로도 사용되고 있다.




# 측면과 후면에서 본 약현 성당


약현 성당은 바로 이 서소문 성지에서 큰 길을 하나만 건너면 쉽게 찾을 수 있다.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걸린 입구를 지나 오르막길을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기도동산’이 보인다. 자연을 배경으로 돌에 새겨진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다보면 종교와 상관 없이 절로 경건해지게 된다.

‘약현’이란 이름은 이 곳에 약초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마 조선시대 민중들은 이 곳에서 약초를 캐 남대문 시장에 내다 팔았을 가능성이 높다. 허준 등 명의들이 이 곳에서 약초를 찾아 이 곳 저 곳을 누비고 다녔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소문성지 전시관’

‘기도동산’을 조금만 올라가면 붉은 벽돌의 약현성당이 나온다. 중림동약현성당은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벽돌조 서양식 교회 건축물이다. 1887년 현재 순화동에서 공소로 시작했으며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인 뮈텔 주교가 1891년 이 곳 대지를 매입하고 성당 건립을 시작했다.



# 서소문 성지 현양탑


# 과거 서소문 성지에 있던 현양탑. 지금은 약현 성당 앞에 있다.



# 100여년 전 약현 성당 인근의 풍경


명동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가 설계를 맡았으며 1891년 착공돼 이듬해인 1892년 완공, 1893년 4월 축성됐다. 1894년 봉헌된 명동대성당보다 이전에 세워진 건물인 것이다. 1896년엔 한국 땅에서 최초로 사제서품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겉모습만 봐도 현대식 종교건축물과는 달리 푸근함이 느껴진다. 폭 12m, 길이 32m, 종탑 높이 26m의 고딕풍 건축으로 이후 한국 교회 건축의 모델이 됐다. 1998년 방화로 성당 일부가 소실된 것을 1999년 복원했다.


# 1998년 노숙자에 의한 화재로 인해 시커멓게 탄 약현성당


# 화재 당시 건물은 탔지만 왼쪽 앞에 있던 성모상은 그을리기만 했다고 한다. 



# 대나무밭과 ‘십자가의 길’이 있는 기도동산



종탑이 있는 고딕형이지만 벽돌조 바실리아식 영향도 받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명동대성당을 짓기 전 내부 공간을 구성하고 건축 재료 생산 가능성을 타진하는 실험이 바로 약현 성당에서 이뤄졌다. 

성당 내부는 양쪽 기둥에 의해 삼등분된 삼랑식 평면 구성이다. 반원아치형의 창이 둘레를 감싸고 있고 중앙 천장의 갈빗대 모양 뼈대가 인상적이다.

성당 뒤편으론 서소문순교성지 전시관이 있다. 약현 성당의 역사와 천주교 박해시대에 관한 자료들, 1998년 화마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약현 성당을 뒤로하고 서울역으로 내려오는 길, 근처 계단에 노숙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소외된 이들을 위한 종교의 책임이 이 땅에 여전히 크게 남아있음을 새삼 느껴보게 된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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