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후 정부는 박헌양과 함께 죽은 장흥 장졸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순절비를 세워주었으며 이 비는 현재 남산공원 한쪽의 언덕에 위치한 영회당의 비각 안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장흥부를 점령한 동학농민군들은 12월 6일 오후 2시경 장흥과 강진의 경계인 사인점(舍人店:현재 장흥읍 송암리) 앞들에 집결하였습니다. 그리고 7일 오전 8시경 강진현을 포위하여 공격준비를 서둘렀습니다. 이때 강진 현감 이규하(李奎夏)는 나주로 도망쳐 버리고 없었으며 김한섭과 그를 따르던 유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보군이 성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김한섭은 유학자 임헌회의 제자로 이방언과는 동문수학의 친구였는데 이젠 서로의 적이 되어 만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동학농민군의 공격에 성은 함락되었고 성을 지키던 김한섭과 제자들은 성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 장흥석대들


강진을 점령하여 기세를 올린 동학농민군들은 12월 10일 새벽 2시쯤 병영을 공격하여 가볍게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규태가 이끄는 관군은 12일 강진을 거쳐 장흥으로 들어오게 되며 일본군은 12월 15일, 이두황의 관군은 20일에 장흥으로 집결하게 되었습니다.

12월 12일 남문 밖과 모정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은 13일 새벽 통위대 교장 황수옥(黃水玉)이 이끄는 30명과 12일 밤늦게 장흥에 도착한 일본군과 1차 접전을 하였으나 신식무기의 위력에 눌려 수십 명의 희생자를 내고 퇴각하였습니다. 동학농민군은 13일부터 14일 사이에 재집결하여 수만의 군세를 이루면서 장흥부를 재차 포위하였습니다. 12월 15일 동학농민군은 자울재를 넘어 석대들을 가득 메우며 장흥부로 진격해 들어왔습니다. 당시의 전투상황을 순무선봉진등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도중대가 잠시 쉬는 사이 뜻밖에 비류 삼만 명이 고봉아래로부터 북쪽 후록 주봉까지 산과 들 가득히 수십 리에 뻗혀 봉우리마다 나무사이로 기를 꽂고 함성을 질러 서로 호응하며 포를 쏘아대며 날뛰어 창궐하니 그 세력을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요 성내 부민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아우성이었다. 일본군 중위와 상의한 뒤 통위병 30명으로 후록 주봉의 적을 막게 하고 교도병으로 성모퉁이 대밭에 �� 하고 먼저 민병 수십 명을 내보내 평원으로 유인하게 하였다. 그리고 양로에서 공격하여 나가니 적이 도망하여 20리 밖 자오현(자울재)까지 추격하다가 해가 저물어 본진으로 돌아왔다.』

석대들 전투에서 일본군은 구르포와 무라다 소총 등 최신 무기를 앞세워 공주 우금티 전투와 마찬가지로 화승총과 죽창이나 몽둥이로 무장한 3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처참하게 학살했습니다. 석대들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농민군은 강진과 해남으로 도망갔지만 해남 앞 바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은 피신하는 동학농민군을 무참히 사살하였습니다.

한편 12월 20일에는 우선봉장 이두황이 이끄는 경군이, 29일에는 출진참모관 별군관이 이끄는 경군이 장흥에 도착하자마자 일본군과 함께 집집마다 수색을 하며 농민군들을 색출하여 매일같이 수십 명씩 잡아다가 장흥 장대와 벽사역 뒤 저수지 둑에서 잔인하게 학살하고 그 시신을 불태웠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이제 화해와 상생으로

한 세기의 세월을 훌쩍 넘긴 장흥에는 아직도 당시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나자 관에서 장흥부를 지키다가 동학농민군으로부터 죽음을 당한 부사 박헌양을 비롯한 수성장졸 96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영회단을 세워 해마다 전몰수성장병 기일이면 장흥의 정부기관을 중심으로 지역의 유지들이 모두 모여들어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장흥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지역주민들이 수성장졸들과 동학농민군의 양편으로 나뉘어 싸웠습니다. 그 후 동학농민군으로부터 장령성을 지키다 죽은 이들의 죽음은 나라에 대한 충(忠)으로 인정받았고 실패한 동학농민군은 난을 일으킨 역적으로 낙인 찍혀 왔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장흥지역에서의 관군 후손들이 세력을 얻어 지역의 유지로 거듭났으며, 상대적으로 동학농민군 후손들은 대부분의 동학농민군 후예들이 그래왔듯이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암울한 시기에 먹고살기에도 급급한 형편 속에서 부모들의 비참하고 잔인한 죽음에도 입이 있으나 말을 못하는 그저 죄인으로만 지내왔습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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