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 대둔산 전투



▲ 대둔산부근 전투상보 요지 (1895년 2월 18일 특무군조)

1) 2월 17일(양) 지대(일본군 3개 분대와 한병 30명으로 편성)는 고산현에서 명령을 받고 오전 3시 30분 출발하여 오후 4시 30분에 대둔산에 도착했다.

2) 그 날은 한병(韓兵) 사관 윤세영(尹勢榮)과 김광수(金光洙)를 대동하고 산 위로 올라가 정찰했다. 남쪽에선 6㎞, 북쪽에서 8㎞ 남짓했다. 적은 절벽 위 큰 바위 사이에 3채의 집을 짓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우리를 발견하자 몇 차례 사격을 가해왔다. 작년 음력 11월 중순경부터 5, 6명의 적은 이 산 위 암굴 속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공주 군대는 이것을 알고 15, 6일 전에 3일간 공격하다 돌아갔다.
그 후 민병이 와서 공격하다 1명이 총상 당하자 달아났다. 2, 3일 전에는 전주에서 군사가 와 공격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여러 곳의 적들은 모여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50여 명이 된다고 한다. 관군이 공격하면 큰돌과 거목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총을 쏘기도 하여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적굴은 바위 위에 있으므로 사다리가 있어야 겨우 오를 수 있다.

3) 18일 오전 3시에 야습할 계획이었으나 바람 비가 심하고 안개마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어 동이 트기만 기다렸다. 오전 5시 고마쯔(小松直幹)에게 2개 분대를 인솔하고 적의 배후로 40리 남짓 우회하게 했다. 그리고 소관은 6시 30분 일본군 1개 대대와 장위영병 30명을 인솔하고 적의 정면을 기어올랐다. 적의 소굴 100m전방까지 접근하자 돌과 나무토막을 떨어뜨렸다. 안개는 여전히 자욱하여 적은 보이지 않고 까마득히 말소리만 들려왔다.

4) 오전 9시 30분, 배치를 마치니 적의 전방 사면 왼쪽 200m 지점 고지에는 한병 20명을 배치하고 나머지 한병과 일본군 1개 분대는 왼쪽 고지에 배치하였다. 배후로 올라갔던 고마쯔(小松) 지대가 10시에 도착하자 뒤쪽 고지에 배치했다. 오전 11시 10분 경에 큰바람이 불어 안개가 걷히며 적의 소재를 볼 수 있었다. 얼마 후 적은 5, 6명을 아래쪽에 배치하자 정면에 있던 한병이 저격했다.
다리를 맞고 새끼줄을 타고 올라갔다. 적의 소굴은 큰 바위로 삼면이 뒤덮여 지붕만 겨우 보일 뿐이었고 큰 돌을 쌓아 정면에 총구멍을 내었다. 위에는 거목을 올려놓아 우리 군대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려 무언가 시도해 보려는 것 같았다.
1시 40분, 세 방향에서 맹렬히 엄호사격을 가하게 하고 소관은 일본군 1개 분대와 한병 사관 두 명을 대동하고 산정에서 배후를 공격하기로 했다. 가파른 언덕을 내려와 겨우 적의 소굴 뒤쪽 아래까지 돌진했다. 그런데 몇 길이나 되는 암석이 담벽과 같이 서 있어 전진할 도리가 없다. 갖고 오던 사다리를 중도에서 버렸으니 대책이 없었다. 사람 사다리를 만들어 한 사람씩 올라가게 하니 15분만에 전 대원을 등반시켰다.
다행히 적은 산이 험준한 것만 믿고 배후는 고려하지 않고 전방의 한병을 향해 계속 발포하였다. 이 틈을 타서 불시에 소리를 지르며 돌격했다. 적도들은 허둥지둥 당황하여 어떤 자는 천 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뛰어들었고 어떤 자는 바위 굴 속으로 숨었다.
살아남은 자는 모두 포박하려 했으나 우리가 돌격한 다음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한병이 이들을 모두 죽이고 겨우 한 소년만 남겼다. 이 소년에게 적의 정황을 물었더니 적은 25, 6명이 있었는데 대개는 접주 이상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했다. 또 28, 9세 되는 임산부가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접주 김석순(金石醇)은 한 살 짜리 여아를 안고 천길의 벼랑을 뛰어 내리다 암석에 부딪쳐 박살이 나 즉사했다.

5) 압수된 서류를 조사해 보니 주요한 자는 도금찰(都禁察) 최학연(崔鶴淵), 도집강(都執綱) 장지홍(張志弘), 도집강(都執綱) 최고금(崔高錦), 도집행(都執行) 이광의(李光儀). 이광우(李光宇), 대정(大正) 이시열(李是悅), 접사(接司) 조한봉(趙漢鳳), 접주(接主) 김재순(金在醇), 접주(接主) 진수환(陳秀煥), 교수(敎授) 강태종(姜泰鍾), 봉도(奉道) 전판동(全判童)이다. 명단에 없는 나머지 사람들은 알 길이 없다.

한편 오지영의 `東學史`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一日은 관병(官兵) 수백 명이 안개 속에 몸을 숨기어 가만히 그 산 후면으로 기어들어오며 일제히 총질을 하였다. 그 석굴(石窟)은 一夫當關 萬夫莫開之地(한 명의 힘으로서 빗장을 걸면 만명이 열지못하는 땅)임을 믿고 있던 그들은 졸지에 변을 당하여 총에 맞아 죽은 이도 많고 절벽에 떨어져 죽은 이도 또한 많았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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