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그러나 유독 최공우 한 사람만은 살아 돌아 왔었다. 그는 관병이 총질할 때에 있어 안마음에 생각하기를 내 비록 죽을지라도 결코 적의 손에는 죽지 않겠다 하고 이어 空石을 무릅쓰고 千丈의 절벽으로 내리 굴러 떨어졌다. 담력이 큰 최공우는 오히려 정신을 수습하였다. 절벽에서 굴러가는 최공우는 홀연 나뭇가지에 걸리어 있는 동안 空石 구멍으로 목을 내밀어 내다보았다. 내 一定 죽었거니 어찌하여 이곳에서 머물러 있게 되었는가. 이것이 정말 죽음인가. 산 것이 도리어 이러한가. 스스로 의아하기를 마지 아니 하였다. 차차 정신을 돌이켜 가만히 空石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내다 보았다. 자기 몸은 이미 천장의 절벽 중간에 걸리어 殘命이 오히려 남아있음을 깨달았다. 최공우는 다시 정신을 수습하여 이리저리 살펴보니 어찌 轉身만 잘하고 보면 可以 할 도리가 있음을 뜻한지라. 이어 空石을 벗어버리고 절벽사이로 이리저리 몸을 붙여 나뭇가지도 붙잡으며 돌부리도 어루만지며 혹 기기도 하고, 혹 뛰기도 하고, 혹 둥굴기도 하여 천신만고로 죽을 힘을 다들이어 이윽고 평지에 내려섰다.』




# 대둔산 전투



위 두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대둔산 항쟁이 얼마나 치열했으며 그 결과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1월 하순의 눈 쌓인 산 정상에서 고립무원 동학농민군의 심정을, 적의 손에 잡히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절벽으로 뛰어들었던 그 심정을 헤아려 보면 숙연해지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김개남과  임병찬 
 
김개남과 임병찬은 우리 역사책 속에 모두 애국지사로 자리 매김 되어 있습니다. 두 분 모두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똑같이 나라를 사랑하는 삶의 길을 걸었으나 그 방법은 달랐으며,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비장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개남 (金開男)의 본래 이름은 영주(永疇)로 1853년 9월 15일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서 김대현의 제3자로 출생하였습니다. ‘개남’이란 이름은 그가 훗날 동학에 입교하여 문자 그대로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고 남녘 세상을 새롭게 열겠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한편 임병찬은 1851년 2월 5일 전북 옥구군(沃溝郡) 서면(西面) 상평리(上坪里)에서 임용래(林榕來)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호는 돈헌(遯軒)으로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과 함께 정읍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일제의 국권강탈 이후 고종의 밀서를 받고 전국적 규모의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의병전쟁을 일으키다 일제에 피체(被逮)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문도에 유배되어 순국하였습니다.
그러나 갑오년(1894)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두 분은 집안 대대로 씻을 수 없는 악연을 맺었습니다. 1890년 낙안 군수로 있던 임병찬이 은퇴하여 태인 산외면 종송리(種松里 : 현,宗聖里)에서 학문에 전념하던 중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한편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태인은 이웃 금구의 원평과 아울러 호남에서 동학이 가장 그 세를 떨친 곳입니다. 또 이곳은 김개남의 집안인 도강 김씨들이 많이 살고 있어 그들이 동학의 중추적 인물로 등장합니다.

▲혁명적 풍운아 김개남

김개남은 동학농민군이 남녘 땅을 휩쓸 때 남원에서 우도의 금산, 무주, 진안, 용담, 장수를 비롯하여 좌도를 호령하였고 순천에 영호도회소를 설치하고 영남의 서남부지방까지 세를 떨쳤습니다. 삼례에서 2차 봉기가 일어나 공주로 진격하는 전봉준과 달리 그는 10월에 청주로 진격하였습니다.
전봉준, 손화중과 아울러 동학의 3거두 중 최고 강경파였던 김개남은 북상 도중 전주에서 남원부사 이용헌과 고부군수 양필환을 체포했는데 굴복하지 않고 반항하자 일거에 이들을 단호하게 참수해버립니다. 이런 그의 명성은 양반 관료들에겐 공포의 대상인 동시에 원한의 대상이었지요.
그는 11월 10일 청주를 공격했으나 일본군에 패하여 진감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와 태인 너듸에 있던 매부 서영기 집에 숨어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웃 종송리에 살고 있던 임병찬이 김종섭을 시켜 종송리에 있던 송두용 집으로 유인하도록 시켰습니다. 종송리는 회문산 자락에 위치하여 앞서 숨었던 너듸마을 보다 험하고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으니 더욱 안전한 곳으로 와 있으라는 김종섭의 설득이 그럴싸하여 김개남은 은거지를 종송리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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