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한편 임병찬은 김개남을 유인해 놓고 김송현, 임병옥, 송도용을 시켜 전라도 관찰사 이도재에 고발하니 이도재는 황헌주로 하여금 강하병 80명을 거느리고 종송리에 와서 12월 1일 새벽 김개남을 잡아갔습니다.

그가 잡혀 전주감영에 끌려갈 때, 백성들은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 군사 어디다 두고 짚둥우리에 묶여 가다니 그게 웬 말이냐”라는 노래를 불렀고 전합니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김개남을 전주로 압송한 뒤, 중도에 탈주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김개남을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시켰습니다. 그 때의 광경을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도재는 마침내 난을 불러오게 될까 두려워 감히 묶어서 서울로 보내지 못하고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냈는데 큰 동이에 가득하여 보통사람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다투어 내장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머리를 상자에 넣어서 대궐로 보냈다.”

당시 일본공사 이노우에는 1894년 12월 27일 조선정부에 서한을 보내 “비도 (동학농민군)의 처형은 신중을 기해야 하며 체포된 비도들은 정토대(일본군)에 넘겨 처리토록 하라”고 요구했는데 전라관찰사 이도재는 김개남의 명성에 겁을 먹고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 도중 탈취사건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전주에서 임의대로 이토록 잔인하게 처형시킨 것입니다.

▲충의의 의병장 임병찬

임병찬은 김개남을 밀고한 대가로 1895년 정월 정부로부터 임실군수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했습니다. 포상에 눈이 멀어 밀고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대신 황헌주를 임실군수로 임명하였습니다. 그 후 임병찬은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1906년 6월 4일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현재 전북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 임병찬유적


그 후 최익현과 함께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1906년 7월 9일에는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최익현이 단식항쟁(斷食抗爭)으로 순절(殉節)하였고 임병찬은 이듬해 1907년 1월에 유배가 해제되어 귀국하였습니다.

또 그는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국권이 강탈당하자 재차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하던 중 1912년 고종으로부터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북도 순무대장(全羅南北道巡撫大將)으로 임명한다는 밀명을 받고 전국적인 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다가 일제에 붙잡혀 거문도(巨文島)에 유배되어 1916년 음력 5월 23일 유배지에서 향년 66세의 생을 마쳤습니다.

그런 그가 불과 몇 달 전 일제와 싸웠던 김개남을 밀고하여 잔인하게 죽게 만든 것입니다. 차라리 몇 달 전 김개남 등 동학농민군과 함께 힘을 합해 일제에 저항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임병찬은 포상이 탐이 나서 김개남을 밀고한 것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선비로서 최고의 가치 덕목인 충과 효를 위해 살다 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충성은 나라의 주인인 임금에 대한 충성이지 오늘날처럼 백성을 위한 충성은 아니었답니다.

당시 유림들은 왕이 아무리 잘못하여도 또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여 의롭게 일어난 백성들의 항거를 모두 ‘난(亂)’으로 인식했던 것이지요. 따라서 몇 달 전 민씨 정권 타도를 외치며 일어선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개남을 밀고한 것은 나라의 주인(국왕과 국모)에 대항하여 일어선 역적을 타도하겠다는 그 나름대로의 충을 위한 신념에서였을 것입니다.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유림들이 충을 위해 의병을 일으킨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습니다. 이것이 당시 유림들이 지닌 의식의 한계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임병찬의 임씨 집안과 김개남의 김씨 집안은 대를 이어 원수지간이 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저승에서 만난 두 분은 과연 어떤 대화를 했을까요?
 
▲ 다시 전봉준을 돌아보며 

전봉준은 1855년(乙卯年) 12월 3일 전라도 고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출생지에 관해서는 한때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 마을에서 출생하였다는 설, 전주 태생으로 어려서 태인현 감산면으로 이주하였다는 설, 정읍(이평면 조소리) 태생이라는 설 등이 있었으나 이 중 1993년 즈음해서는 고부 고창읍 죽림리 당촌(現, 高敞邑 竹林里 52番地)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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