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예술이 되어가는 통영에서의 하룻밤(2)



# 동피랑


통영의 동피랑은 사진 찍기의 명소가 되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옆을 봐도 멋지게 포즈를 취한 사람이 있고, 찰칵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커다란 새의 날개를 그리면서 한쪽만 그렸거나, 양쪽 날개를 다 그렸어도 몸통은 쏙 빼버리는 방식으로 보는 이의 관심을 촉발하는, 요컨대 벽화를 그리면서 아예 사진 찍기용으로 구상한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완성품 앞에도 관광객들의 셔터 소리는 그저 경쾌하기만 하다.

상당히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들로 이루어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 벽화 마을을 최초로 구상하고 실무를 진두지휘한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했는데 마침 그에 관한 뉴스가 나왔다. 동피랑은 이제 거의 완성되었고, 그래서 서피랑으로 장소를 옮겨 새로운 관광상품을 만들 구상에 몰두해 있는 그녀를 통영시가 계약해지 통보를 했다는 것이었다.

누가 들어도 의아해 할 수밖에 없는 이 뉴스의 행간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나라 정치의 복수혈전이 보인다. 계약해지를 당한 그녀에 따르면 지난 지방 선거 때 선거운동을 도와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는데 그녀가 이것을 거절했단다. 거절을 당한 후보자는 당선되었고, 그리고 복수를 다짐했지만 딱히 방법이 없어서, 그래서 계약만료일을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통보했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의 말미에 그녀는 한 가지 덧붙였다. 실패하지 않은 사업은 계약연장이 당연한 것이라고, 지난 몇 년 동안 계속 그래 왔다고.

통영시의 입장은 물론 달랐다.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관례적으로 서류를 확인해본 즉 계약만료일이 돼서 해지를 통보했다는 것이다. 만인의 평등을 꿈꾸는 나라에서 한 사람에게만 일을 맡기는 것은 명백한 특혜가 되므로, 그래서 해지통보를 했다는 이 말을 객관적으로 잘못 됐다고 증명해낼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원칙주의와 법치주의는 이렇게도 준엄하고, 착실해서 무릇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공부해 둘 만하다.

그야 어떻든, 관광객 신분인 우리는 동피랑의 곳곳을, 그야말로 이 잡듯이 누비고 다녔다. 골목이 하도 좁아터져서 누빈다는 말이 다소 과장이다 싶기는 하지만, 누빈다는 게 뭐 몸뚱이로만 하는 것이던가. 그랬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정신은 호랑이 굴에 떨어졌어도 초롱초롱하게 눈빛을 반짝일 수 있을 정도는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어쩌면 보고도 못 본 것일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 본체


그 무엇인가의 첫째 조건은 너무 화려하지 않아야 하고, 동양 최대니 세계 최대니 따위 타이틀이 안 붙어 있어야 하고, 돈을 엄청나게 쏟아 넣지 않은 것이야 하고, 무엇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친근감만 느껴야지 내심으로나마 위화감을 느끼는 것이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그런 거창한 원칙이 부끄러울 정도로, 통영의 동피랑 마을은 대체로 작은 것을 더 작게, 소박하게, 그리하여 사람이 산다는 것의 맥락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그 중에서도 다 쓰러진, 쓰러지기 직전의, 지붕조차도 없는 집 한 채는 단연 압권이라 할만 했다. 복닥복닥 소리가 절로 들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많은 가족이 살고 있었을 폐허의 집 한 채, 아니 집이라기보다는 움막 한 채가 있었던 흔적을 발견한 우리는 이게 웬 보물이냐, 하며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모두 합하면 열 평도 채 안 되고 아마 일곱 평이나 여덟 평쯤 될 것 같은 그 작은 공간은 방이 두 개였고, 두 개의 방을 모두 관리하는 형식으로 폭 일 미터 정도에 길이가 오 미터 쯤의 부엌 겸 연탄창고 겸 장독대 겸의 공간이 길게 누워 있었다.

벽면마다 그림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이 그 집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었다. 하품이 유일한 취미인 할아버지가 계시고, 막일 나가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술집 나가는 누나와 중졸 학력으로 고시공부를 하는 큰형과 무협지에 탐닉하는 작은형과 막내 등등 그렇게 십여 명의 식구가 살았던 것으로 묘사돼 있는 벽화를 한참 보고 있자니 절로 어떤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술집 나가는 누나에게 책값 좀 달라고 보채는 큰손자의 목소리에 귀가 번쩍 열린 할아버지가 나도 용돈 좀 달라고 외치는데 시아버지의 요강을 비우던 며느리가 그 소리를 듣고 투덜투덜, 투덜거리는데 그 소리를 들은 남편이 저놈의 여편네 어쩌고 소리를 지를 듯하다가는 그만두고 딸년을 향해 술집 그만두라고 꽥 소리를 지르면 딸년은 지갑에서 현찰을 척척 빼 들고 흔들어대는데 이것을 본 둘째와 막내가 재빨리 달려가서 돈을 빼앗아 들고 집을 뛰쳐나가는 장면, 이런 장면을 내가 어디서 봤더라?



# 화장실


아, 한참만에야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동안 잊고 있었다. 이런 집이 우리나라 도처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서울 하고도 미아리 길음동, 삼양동을 거처 봉천동 달동네를 헤매다가 한남동 산꼭대기로 들어가기 전 고려대 뒷산 종암동 비탈에 월세방을 얻었을 때 바로 옆집이 그와 거의 같았다.

모두 합해서 일곱 평도 채 안 되는 땅 위에 큰방 작은방 건넌방까지 세 칸이나 방을 만들고, 부엌을 만들고, 심지어 다락방까지 만들어서 열한 식구가 복대기치던 그 집은, 그 집 주인은 애써 이름을 붙이자면 나의 직장동료였다. 말이 동료라고 했지만 내가 황씨 아저씨라고 부르는, 경력이 삼십 년도 넘는 베테랑 미장 기술자였고, 나는 이제 갓 입문한 열아홉 살의 신출내기 ‘개잡부’였다.

무슨 엉뚱한 귀신이 내 안에 들어왔던 것인지 그 무렵에 나는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다. 사진작가는 찍는 것뿐만 아니라 인화하는 것도 스스로 한다. 딱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사진작가의 모든 것이었다. 찍는 것은 별 흥미가 없었다. 필름을 확대해서 인화하는 게 내 흥미의 전부였다. 그러자면 제일 먼저 확대기가 있어야 했다. 확대기는 그 당시 일제와 독일제가 있었는데 일제가 조금 쌌다.

그 가격이 팔만 얼마였던 것 같은데 정확한 것은 모르겠고, 어쨌든 확대기 하나를 산다는 꿈을 안고 룸살롱 보이 노릇 그만두고 공사판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룸살롱은 그놈의 것 외양만 화려했지 돈은 하나도 안 되는 반면 공사장 막일은 일당을 받아서 안 쓰면 금방 확대기 하나쯤은 살 것 같았다. 하지만 돈을 안 쓴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꿈만 꾸다가 말았다. 딱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주는 일당으로 확대기는커녕 월세 내기도 벅차던 것이었다.



# 부엌 겸 연탄창고 겸 장독대 겸~


지금이야 건축현장 노동자들의 일당이 숙련공 기준으로 십 만원이 훨씬 넘는 까닭에 최저생활은 기본적으로 유지되고 잘하면 여행도 다닐 만한 상황이 되어 있다지만, 당시의 건축현장 노동자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다는 말이 딱 맞을 정도로 도대체 임금이랄 것조차도 없었다.

이 대목에서 문득 드는 의문 하나는, 오늘날 노동자들의 일당을 십 만원 이상씩 지급하고도 일 년이면 순이익으로 몇백 억이 잡혔네 몇천 억이 잡혔네 심지어는 몇 조를 벌었다는 발표까지 자랑삼아 해대는 대기업 집단들이, 그 시절에는 오늘의 기준으로 보자면 십 만원은커녕 고작 몇천 원씩을 일당으로 지급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긁어 들였고, 그 중에 얼마나 많은 뭉칫돈을 권력자들에게 받쳤으면 그렇게도 당당하게 큰소리까지 쳐가면서 대기업 집단으로 성장해 왔느냐 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노가다인생 데뷔무대가 되는 현장이 남산의 중앙정보부 신축 공사장이었다. 육군 대령 계급장을 달고 다니는 감독관이 툭하면 워커발로 노동자들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매우 살벌한 곳이었다. 점심시간이면 모든 노동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누구, 누구, 누구, 이름을 불러대며 앞으로 나오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삼분의 일 정도는 아줌마들이었다. 부르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태반이 오줌을 쌌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중인환시 하에 자아비판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놈의 공사장은 규모가 어찌나 큰지 지하실에 한 번 잘못 들어가면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였다. 지하실이 아니라도 화장실은 저 멀리, 너무도 먼 곳에 마치 별세계처럼 자리하고 있어서 웬만한 사람은 엄두를 내기도 어려웠다. 건물은 이쪽에 있는데 화장실은 저 멀리 현장사무실 옆에 달랑 한 동 숨바꼭질 하듯 숨어 있을 뿐이었다. 그때는 어느 건설 현장이나 그랬다. 그래서 용변이 마려우면 아무 데나 사람만 안 보이면 그곳이 화장실이었다. 그런 관행에 익숙해 있던 노동자들에게 남산의 중앙정보부 신축 현장은 악마의 소굴이었다.

그런데 훗날 대통령까지 해먹게 되는 이명박씨가 이것을 보고 배웠던 모양이다.   이명박씨가 현대 가문에서 임원을 하던 시절 현대의 공사장은 툭하면 비명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당시는 안전화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발바닥에 못 같은 것이 안 박히도록 군용 워커를 신고 다녔겠지만, 이놈의 워커발이 제 본분을 망각하고 호시탐탐 사람의 정강이를 노리는 사냥꾼이 돼 버렸다.



# 술집 나가는 누나는 화장을 하고...


그는 현장에서 오줌을 쌌다고 사람을 걷어차지는 않았다. 오줌 같은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관심사가 무엇인가는 아무도 몰랐다. 오직 그 자신만이 알았다. 그래서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보이면 그가 현장소장이건 기사건 일반 잡역부건 가리지 않고 불렀다.

“어이 거기, 거기, 이리 와 봐. 똑바로 서 봐.”

그렇게 해서 그가 차렷 자세로 똑바로 서면, 그냥 그대로 달려가서 공을 차듯이 워커발을 높이 들고 내질러 버렸다. 선방불패라고 했던가. 이유는 나중에 말해주었다. 정강이를 걷어차인 사람은 바닥에 나뒹굴기 바빠서 얻어맞은 이유에 대한 해명조차 할 여유가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건설업자들은 룸살롱을 주요 사업장 겸 놀이터로 삼는 경향이 있는데, 정치인으로 변신하기 전의 이명박씨도 그쪽 방면으로 꽤나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낮에는 현장에서 아버지의 정강이를 워커발로 걷어차고, 밤에는 그 딸로부터 접대를 받았던 셈이라고 풀이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어쨌든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바쁜 건설현장을 직장으로 삼고 있었던 황씨 아저씨의 딸내미는 룸살롱에서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아버지가 다하지 못하는 동생들의 학비며 할아버지의 용돈을 댔다. 황씨 아저씨는 자신의 그런 딸내미가 영 못마땅해서 툭하면 소 닭 보듯이 했지만, 딸내미는 그런 아버지가 또 못마땅해서 툭하면 구더기 소굴이라는 등으로 아버지의 기를 꺾어놓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구더기 소굴을 떠나지는 않았다. 룸살롱 아가씨들은 대개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살거나 혼자서 자취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집을 나와서 식구들과는 가능한 한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옆집 사람들의 눈치는 물론이고 식구들에게까지 구박을 받으면서도 구더기 소굴을 포기하지 않고 고집했다. 



# 큰아들은 고시공부를 하며...


종암동 산동네에서 쪼르르 내려와 개천 하나를 건너면 그 이름도 유명한 텍사스 골목이 나오는데, 훗날 그녀는 텍사스 골목 옆의 간판이 무슨 ‘질퍽집’인가 하는 데로 일자리를 옮겼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 바닥 기준으로 보자면 이류급으로 강등된 셈이었다. 이류나마나 그녀의 씀씀이는 룸살롱 시절이나 마찬가지로 재벌 가문의 자식 못지않았다. 자기 엄마는 버스비도 아까워서 걸어 다니건만 그녀는 오백 미터만 가려도 택시를 탔다.

대통령 박정희가 연예인들 불러다놓고 외로움을 노래하다가 살해됐을 때 그녀의 어머니가 골목길 계단에 주저앉아서 어찌나 슬프게 울어대던지, 슬퍼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나조차 눈물이 나는데 그것 참, 도대체 내가 울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질퍽집’으로 근무처를 옮긴 지 얼마 안 된 그녀가 한 마디 꽥, 일갈하고 있었다.
“아니 저 여편네가 미쳤는가 달쳤는가. 니 에미가 죽었냐 애비가 뒈졌냐, 왜 울기는 쳐 울고 지랄이야 지랄이, 뒈져야 할 것 뒈진 걸 두고.”

그녀의 이 악담을 뚝 떼어놓고 보면, 도저히 자기 엄마에게 한 소리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날 알았다. 사람이 이리 치고 저리 치고 오직 치이기만 하는 세월을 살다 보면 세상을 관통해서 보는 직관이 생긴다는 것을.

말없이 당하기만 하는 사람들을 쥐어짜서 정권을 유지하고, 당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당신들은 지금 당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어디에 나타났다면 하면 귀신도 모르게 잡아다가 없애버렸던 사람, 그런 아버지를 자그만치 십팔 년이나 대통령으로 두고 살아오신 오늘의 대통령이 그 시절에 무엇을 보고 듣고 배웠을지는 누구한테 물어보지 않아도, 지나가던 개도 아마 안다고 하지 않을까.

우리의 그런 현대사가, 시퍼렇게 살아서 꿈틀거리는 오늘이 통영의 동피랑에는 보존되어 있다. 거의 박물관급이기는 하지만, 다행히도 아직 박물관으로 옮겨놓을 날짜까지는 받아놓지 않는 날것 그대로 말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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