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예술이 되어가는 통영에서의 하룻밤(3)



# 통영의 등대


어둠이 내려오는 동피랑 마을 골목에 홀연 고양이 한 녀석이 나타났다. 무엇을 그리도 잘 먹었는지 살이 통통 오른 녀석은 낯선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그 좁은 골목을 요리조리 마치 곡예라도 하듯이 갈팡질팡 하는가 싶더니 굳이 도약을 할 필요도 없이 바닥에서 지붕으로 그냥 훌쩍 올라가버린다. 그리고 순식간에 열 집, 아니 스무 집 정도의 지붕을 건너뛰더니 빨간 지붕 위에서 잠시 고개를 돌려보고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 녀석 참, 뭐지? 무슨 신기한 꿈이라도 꾼 듯이 약간은 어리둥절한 기분인 채로 동피랑 마을을 빠져나온 우리는 다시 시장 골목으로 들어섰다. 문득 배가 고팠다. 여행은 먹는 재미로 한다지만 우리에게 여행은 어쩌면 망각이라고 보는 게 옳은지도 모르겠다. 이것을 보고, 저것을 보고, 여기를 갔다가 저기를 갔다가, 그야말로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동안 세상만사 다 잊어버리고 심지어는 배가 고픈 것까지도 잊고 있었다. 

먹을 것들 냄새가 코를 간질이니 배가 고프다. 뭘 좀 먹을까? 뭘 먹지? 모처럼 집을 나왔으니 생선회로 질러버릴까? 눈물이 찔끔 나오는 매콤한 소스에 날생선 한 점 찍어들고 소주 한 잔을 들이키면 절로 나오는 소리 캬아, 그 순간의 기쁨을 어찌 꿈에선들 잊을까마는, 그런데 이게 뭐냐. 너무 오랜만에 생선회가 있는 풍경을 접했었나 보다.

세상이 온통 생선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보이는 것마다, 가는 곳마다 생선회집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값도 엄청 쌀 것 같은 착각이 들었지만, 가격표를 보고는 그만 엄두가 안 나서, 못나고 또 못나게도 맛도 없어 보이는구만 비싸긴 또 되게 비싸네, 어쩌고 온갖 불평을 쏟아내며 우리는 생선회 골목을 후딱 빠져나오고 말았다.

뭘 훔치다가 들킨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훔쳤는데 아직 들키지는 않은 상태? 그래서 혹시 어디 멀리의 누구라도 나를 봤으면 어쩌나, 내 마음을 읽어버렸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에 초조감까지 더해져서 걸음걸이만 괜히 빨라지는 것, 우리는 그런 이상한 수렁에 빠져 있었다. 한순간이었다. 빠지는 것은 잠깐이었지만, 헤어 나오기까지는 한참이 걸려야 하는 수렁이었다.



# 동피랑의 고양이


배가 고픈데도 뭘 먹고 싶다는 생각이 일단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부지런히 뭔가 적당한 음식점을 찾는다고 찾고는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면서도 못 보는 그 이상한 수렁에서 빠져나오기까지는 그 뒤로도 아마 삼십 분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걷다가 막창구이 집으로 들어가서 소주 두 병을 비웠다.

주인아저씨가 이야기꾼이었다. 이것저것 아는 것이 많았고, 사람을 보는 눈도 정확했다. 들어서는 우리를 보자마자 여행 중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고, 통영이 초행이라는 것도 알아보았다. 너무 금방 꿰뚫어 봐버리니까 조금 징그럽기도 했지만, 이야기를 듣는 동안 시나브로 친구 같은 느낌이 들고 있었다. 만약에 손님이 없어서 이야기를 계속 들을 수 있었다면, 우리는 어쩌면 막창구이 집에서 새벽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행이랄까 불행이랄까 손님이 계속 들어왔다. 요즘 세상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식구가 무려 여섯 명으로 구성된 일가족이 들어오기도 했다. 중년 부부에 아이가 넷인데 가장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 이삼 학년쯤이나 돼 보였다. 막창구이 집은 소주가 기본옵션인데 초등학생이라니, 정말로 특이한 손님들이어서 우리는 보고, 또 보며 빙그레 웃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소주 한 잔을 마시고 나면 시선이 자동으로 그쪽으로 갔다. 그래서 보고 있노라면 또 빙그레한 미소가 자동으로 지어지는 것이었다.

막창구이 집을 나와서 길가는 사람에게 윤이상 기념관이 어느 쪽이냐고 물어보았지만, 모르신단다. 하긴 밤도 깊었다. 여름철이라면 몰라도 겨울 밤 아홉 시는 한밤중이다. 설령 윤이상 기념관이 어느 쪽에 있는지 알았다 해도 아마 다음 날로 미루었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호텔로 들어갔지만, 갑자기 어디 무슨 먼 외지에라도 불시착한 듯이 공허하고 이상해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 동피랑 벽화


“어디 가서 소주 한 잔 더 하자.”
“그래요.”

우리는 밤길을 걸었다. 바닷바람이 매서운 밤이었다. 우리는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가 또 잡기를 되풀이했다. 우리는 나란히 걷고 있었지만, 자동차 한 대가 지날 때마다 우리의 나란히 걷기는 자동적으로 풀렸다. 나란히 걷기가 풀리면 손도 풀렸다. 전통의 도시 통영의 거리는 그렇게도 좁았고, 자동차는 많았다. 아마도 태반이 관광객들일 터이었다. 통영의 고정 인구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등대. 실내포장마차 이름이다. 이름이 좋아서 들어갔다. 서울의 종암동 텍사스골목맞은편에서 했던 포장마차 시절이 잠깐 생각났다. 그때만 해도 나는 해삼이나 낙지 같은 연체동물은 징그러워서 못 먹는 이른바 순수파(?) 청년이었다. 그랬던 내가 포장마차를 하면서 무조건 다 먹어대는 타락 혹은 성장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낙지 안주를 주문한 손님이 소주 한 잔을 권하면 먹어야 했고, 그날 못 팔고 남은 해삼이며 낙지 또한 버리기 아까워서 내 입에 넣고 있는 동안 나는 바야흐로 잡식성 동물이 되어갔다. 

등대는 안주가 오천 원에서 칠천 원, 팔천 원, 일만 원으로 특이하게 구성돼 있었다. 실내포장마차는 안주값이 비싸다는 선입견을 갖고 들어선 나로서는 조금 뜻밖이었다. 낙지볶음을 주문했는데 그 양이 엄청 많다. 나의 그녀는 양이 많으면 맛이 없는데 큰일이라고 했지만 맛도 좋다. 게다가 사리까지 듬뿍 주신다. 그 뒤로도 무슨무슨 이런저런 서비스 안주를 마구 내오신다. 장사를 이렇게 해서 어떻게 하느냐고, 집 팔아먹겠다고 농담 한 마디 했더니 주인아주머니 왈 “두 번째부텀은 안 드립니다” 하신다.

처음 손님이니까, 낯선 손님이니까 또 오시라고 내놓는 거란 뜻이다. 어쩌나, 우리는 내일 떠나야 하는데 어쩌나, 그 말을 해버릴까 했지만, 안 하는 게 서로에게 어쩐지 좋겠다 싶어 안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술상을 파하고 밖으로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 윤이상 동상


“자주 와야겠어요. 와서 집 팔아먹는 꼴을 기어이 보고야 말 거예요.”
“호호홋, 팔아먹을 집도 읎다 아이요.”

웃음소리가 등대만큼이나 반짝인다는 느낌이다. 여운도 길다. 사심이 없다는 건 바로 이런 때의 이런 웃음을 가리키는 것이겠다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대통령이 청와대 식구들은 사심이 전혀 없다고 했던 말이 불현 떠오르기도 한다. 미쳤다. 이렇게도 좋은 날 좋은 자리에서 이 무슨  방정맞은 그림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기분은 널널했다. 거세게 몰아치는 바닷바람이 코를 베어갈 듯이 날카롭긴 했지만 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 조금은 비틀거리면서, 콧노래도 가끔 흥얼거리면서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 옆 좁은 보도를 땀박땀박, 천천히 어렵게 걸었다.

커피 생각이 났다. 어디에 커피 파는 집 없나? 기왕이면 그윽한 향기가 솔솔 콧속을 간질이는 원두였으면 좋겠다. 우리는 커피 집을 찾아서 낯선 동네를 빙빙 돌다가 그만 포기하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도시를 떠난 지도 이십 년이 다 돼가는 나는 아무래도 촌놈이라서 편의점 커피는커녕 편의점 자체에 익숙하지 않지만 그녀는 아주 익숙했다. 서울에서 무슨 선생 노릇인가를 할 때 시간에 쫓겨 이틀에 한 번씩은 편의점 라면으로 허기를 달래고 편의점 커피로 입가심을 했다나 어쨌다나. 그래서 그녀는 편의점에 원두커피가 있다는 것도 나보다는 훨씬 잘 안다.



# 윤이상 기념관


일반 종이컵보다는 훨씬 크고, 생긴 것도 어쩐지 고급으로 비쳐지는, 뚜껑까지 달고 있는 종이컵 속에 원두 맛을 내는 커피가루가 들어 있어서, 여기에 뜨거운 물을 붓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커피 두 통을 그녀는 골랐다. 우리는 그 중에 한 잔은 편의점에서 나눠 마시고, 다른 한 잔은 호텔에 들어가서 나눠 마시자며 들고 나왔다.

바람은 아까보다 훨씬 세고 훨씬 차가워져 있었다. 도로는 이미 얼어붙고 있었고, 길에서 보이는 사람은 세상 천지에 아무도 없다는 듯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호텔로 돌아오니 열두 시도 훌쩍 넘었다. 편의점에서 들고 온 커피를 뜨거운 물에 타서 둘이 나눠 마시는데 뭔가 살짝 에로틱해지려 한다. 키스를 할까? 그래, 키스를 해야지. 기념일로 정하기에 충분한 이런 날 키스도 안 한다면 아마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야.

오전 10시. 호텔 직원에게 윤이상 기념관의 위치를 묻고, 늦은 아침 식사를 맛있게 할 수 있는 곳을 물은 다음 호텔을 나와서 시장 주변을 빙빙 돌았다. 호텔 직원은 복어 국을 맛있게 잘 끓이는 집을 말해 주었지만, 우리는 기억력이 아주 나쁜 사람들처럼 복어는 벌써 잊어버리고  ‘시락국’ 간판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차할 곳이 없어서, 주변을 빙빙 돌다가 무슨 행운처럼 윤이상 기념관을 발견하고는 무조건 들어가서 차를 세워놓고 나왔다.

멀리서 볼 때는 시락국, 세 글자만 보였지만, 가서 보니 ‘방송에 나온 원조 시락국’이라는 등 간판이 꽤나 길다. 문을 여는 순간 놀랐다. 타임머신을 타고 순식간에 육십 년대의 시장바닥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판자 두 개를 잇대어서 만든, 길이가 족히 삼 미터는 됨직한 탁자 세 개와 꼭 그만한 길이의 나무의자가 멋대로 길게 배치돼 있는데 탁자 위에는 이런저런 온갖 반찬 그릇이 즐비하다.



# 윤이상 기념관 내의 한 건물


손님은 들어서면 자기에게 필요한 도구를 스스로 집고 따르고 덜어야 한다. 주인이 직접 내주는 것은 시락국 뚝배기 하나와 밥공기 하나뿐이다. 시락국은 무청을 삶고 또 삶아서, 마치 사골을 고듯이 고아서 약간의 된장과 이런저런 양념으로 맛을 낸 일종의 해장국 같은 것인데 맛이 매우 깊었다. 가격은 달랑 삼천 원. 주변의 시장 상인들과 관광객이 바싹 붙어 앉아서, 혹은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마주앉아서 시락국을 훌훌 맛나게 떠먹는 장면이 마치 영화 속의 한 풍경 같았다.

복어국 대신 시락국 한 그릇을 마치 자동차에 기름을 넣듯이 그야말로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우리는 곧장 윤이상 기념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내부로 선뜻 들어서지는 못하고 주차장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발걸음이, 마음이 무거웠다. 처음은 아니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라고 특정할 수는 없지만, 나는 한동안 윤이상이 간첩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신문이건 방송이건 가리지 않고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 어쩌고 저쨌다는 둥 떠들어댔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나도 부득이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라는 것이 실제 있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나는 아직도 멀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내가 어리석어서, 공부할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권력자들의 선전선동에 개처럼 놀아났었다고 얘기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윤이상 하면 동백림이 생각나고, 동백림을 생각하면 간첩조작 사건이 생각나고, 간첩조작 사건을 생각하면 자동적으로 박정희가 생각난다고 말한다. 간첩이 아니면 유지될 수 없는 정권 하의 국민 노릇을 오래 전부터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조금은 서글프고 불쌍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만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 윤이상 생가에 잇대어진 집


아직도 윤이상을 간첩의 아이콘으로 생각하는 자칭 보수주의자들이 기념관을 놓고 시비를 하는 시절이기는 하지만, 박정희가 그랬고 그 수하의 온갖 권력자들이 그랬듯이, 그들도 이제는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 그것만은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이내 알 수 있는 것.

주변에 이중섭이 가난한 삶을 부둥켜안고 가쁜 숨을 내쉬었던 골목도 있고, 김춘수와 박경리의 흔적도 있다지만, 우리는 윤이상만으로도 일단은 배가 불렀다. 배가 불러서 기념관 아래 아무 데나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제부터 우리 어디로 가요?”
나의 그녀가 눈빛을 초롱하게 빛내면서 묻는다. 이 사람은 그새 잊고 있었나 보다. 연탄보일러를 얼어 터뜨리지 않게 하려면 지금쯤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면 어떻게 하나. 다른 어디로 다시 행선지를 잡고 출발해야 하나? 아니다. 어쩔 수 없다.

“집으로 가야지.”
“으응.”

빛나던 그녀의 눈동자가 아래로 살짝 내려앉다가 다시 올라온다.
“그럼 가요, 집으로. 얼른.”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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