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채무 재조정 논의할 새 협상 본격 시작

그리스와 국제 채권단이 구제금융 연장에 합의해 채무 재조정을 논의할 새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리스는 20일(현지시간)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18개 채권국과 현행 구제금융을 4개월 연장하기로 합의해 새 협상 타결까지 유동성을 지원받은 `가교`를 놓는 데 성공했다. 긴축 반대와 채무 탕감을 공약해 지난달 총선에서 승리한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은 본격적으로 공약을 이행하기 위한 정책 마련에 나선다.

우선 이날 합의에 따라 그리스는 이달 23일까지 현행 구제금융 지원을 계속 받기 위한 개혁 정책들을 채권단에 제출하기로 했다. 그리스 전 정부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와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으로 구성된 채권단 `트로이카`가 요구한 지원 조건을 수용하는 방식이었으나 이번 합의는 그리스가 스스로 지원조건(개혁 정책)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다만 트로이카는 그리스의 개혁 정책들을 현행 구제금융 지원조건과 연계해 실사하고 부합한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4월 말에 분할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시리자 대표인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취임 이후 "서로에 이익이 되는 해법을 찾겠다"고 수없이 강조했듯이 이날 합의는 그리스와 트로이카 모두의 요구를 충족시킨 타협안으로 평가된다.

그리스가 23일 제출할 개혁 정책들은 탈세와 부패 척결, 공공행정의 투명화 등의 조치들이 담길 것으로 예측된다. 시리자는 정권, 언론 등과 결탁한 소수 자본가 세력인 `올리가르히`가 탈세와 정부조달 비리, 부동산 투기 등의 부패를 저지른다고 보고 이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그리스 새 정부는 또 개혁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치프라스 총리는 지난 11일 앙헬 구리아 OECD 사무총장과 회동하고서 "우리는 그리스가 필요한 개혁을 수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위해 OECD와 긴밀하게 협력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구리아 사무총장도 "개발의 이익은 다수에게 돌아가야지 소수 부유층에 집중돼서는 안 된다"며 "우리는 부패와 싸울 도구들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그리스는 개혁 정책을 우선 합의하면 6월 말을 목표로 추진하는 새 협상에서는 국가채무의 상환 부담을 줄이는 방안을 요구할 계획이다. 시리자는 긴축과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적 처방인 기존 구제금융 프로그램은 부채만 늘리고 빈곤을 악화하는 `인도적 위기`를 일으켰다며 이를 거부하겠다고 언명했다. 특히 국내총생산(GDP)의 1.75배 규모인 국가채무는 지속 가능한 수준이 아니라며 탕감을 요구했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은 "헤어컷(상각)은 요구하지 않겠다"며 대안으로 기존 국채를 명목 GDP 성장률에 연동한 채권과 영구채권으로 교환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반면 채권단은 경제가 좋으면 상환액도 늘린다는 성장률 연동 채권은 헤어컷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속임수라고 비판하는 등 부채탕감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유로그룹은 지난 2012년 그리스와 기초재정흑자를 내면 채무 상환 부담을 덜어주기로 합의한 바 있어 만기 연장 등은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시리자 정부는 새 협상과 무관하게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법 개정을 추진하고 국유재산 매각 계획을 재검토하는 등 긴축 완화를 추진할 계획으로 트로이카와 신경전을 벌일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스는 이번 합의에서 경제 회복과 재정지표 목표, 금융 안정 등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자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법 개정은 민간 부문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재정에 부정적 효과는 없다는 입장이다.

바루파키스 재무장관은 협상 타결 직후 기자회견에서 민영화 중단이 재정수입의 감소라는 부정적 효과보다 공기업의 경쟁력을 키워 국유재산의 가치를 높이려는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리스 전 정부는 지난해 11월 트로이카와 정례 협상에서 지난해 말로 예정된 구제금융을 연장하지 않고 조기졸업을 추진했던 것과 달리 시리자 정부가 6월 말에 채권단과 새 협상을 추진하는 것은 채무 재조정과 기존 지원조건을 바꾸려는 목적이기 때문에 협상에 난항이 예상된다.

그리스는 지난해 국채 중기물 발행에 잇따라 성공해 자본시장 복귀 기대감이 커졌지만, 3차 구제금융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어 6월 말까지 새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다시 채무불이행(디폴트) 우려가 커질 수 있다.

오진석 기자 ojs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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