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살아지기는 확실하게 잘살아졌는디, 재미는 확실히 읎어… 암 그때가 좋았지!”
“잘살아지기는 확실하게 잘살아졌는디, 재미는 확실히 읎어… 암 그때가 좋았지!”
  • 김수복 기자
  • 승인 2015.03.03 18: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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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뒤뜰에 동백이 피었는가 싶더니 떨어지고 그 옆에서 다른 녀석이 피어난다. 산수유 꽃봉오리가 손을 대면 금방 빵, 소리를 내며 터져버릴 듯이 아슬아슬하더니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매화도 역시 한껏 부풀어 올라서 오늘이냐 내일이냐 시간을 재고 있지만, 그것들을 보는 내 마음은 영 수상쩍기만 하다.

설 명절을 보내고 난 뒤의 쓸쓸함이 사흘, 나흘, 열흘, 계속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명절을 보낸 뒤의 쓸쓸함이 아니라 명절 자체가 쓸쓸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명절 자체가 쓸쓸했던 이유는 헤아리기로 하자면 열 개도 넘겠지만, 우선순위를 정하기로 하자면 아무래도 설 명절 기분이 너무 짧았다는 점을 첫손에 꼽아야 할 것 같다.

가래떡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비료를 가득 적재한 거대한 트럭이 마을 광장을 점령해 버렸다. 새벽부터 지게차 소리가 마을 전체를 휘감아 돌았다. 전진과 후진을 맹렬한 속도로 반복하는 게 특징인 지게차의 후진 신호음이 사뭇 날카로웠다. 마을의 개들조차 스트레스를 받아서 왈왈 짖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농업협동조합이 돈을 버는 소리라고 말해도 무방한 이 폭력적인 소리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농촌의 일상적인 풍경일 뿐 불법이나 무례 같은 것은 이미 아니었다.

농사철은 아직 멀었는데 웬 비료가 이렇게도 빨리 도착해버린 것이냐 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마을에 아무도 없었다. 설 명절 기분을 이렇게 망쳐놔도 되는 것이냐고 항의를 하는 사람도 당연히 없었다. 그런 의문은 시대의 흐름을 미처 따라잡지 못해서 어리둥절해 하는 나 같은 얼치기촌놈이나 갖고 있는 것일 뿐, 마을의 주류 어른들 입장에서 보자면 일상일 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농사는 일 년에 한 번뿐이었다. 그런데 농사철은  예전에 비하자면 두 달 가까이나 빨라졌다. 아직 얼음이 풀리지도 않았건만 비료가 마을에 들어와서 빨리 일 나갈 채비를 차리라고 독촉하는 형국이다.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훨씬 많았던 시절에는 상상도 해볼 수 없는 일이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깃발이 여기저기서 펄럭이던 시절의 농부들이라면 아직 농사 준비는커녕 세배를 다닐 시간이었다. 일 년 동안 남의 집 일로 고생하고 처자식이 있는 본가에 와 있는 머슴들도 아직은 돌아갈 날이 멀었다.

“아 그럼, 그때가 좋았지.”

어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신다. 하지만 ‘좋았던 그때’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설령 돌아갈 방법이 있다 해도 어른들은 아마 고개를 회회 내저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일하는 목적이 달라져 버렸으니까. <농자천하지대본> 시절에 어른들의 일하는 목적은 먹고사는 데 있었다. 돈이 아니었다. 일하는 목적이 돈으로 확실히 고착돼 있는 요즘의 어른들은 가끔 어리둥절해 하며 중얼거리곤 하신다.

“잘살아지기는 확실하게 잘살아졌는디, 재미는 확실히 읍써.”

일하는 목적이 먹고사는 데 있었던 시절에는 재미의 소재가 무궁무진해서 지루해  할 틈이 없었다. 돈이 일하는 목적이 되고 보니 산다는 것의 목적은 대체 뭐냐 하는 쓸데없는 의문이나 모락모락 피어오를 뿐 재미를 느끼기가 어렵다. 오늘도 해가 뜨는구나, 밥 먹고 텔레비전이나 좀 볼까, 아이고 텔레비전도 재미가 없네, 낮잠이나 좀 잘까, 이런, 잠도 안 오네, 이런 식으로 농한기의 농촌 어른들은 심심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신다.

<농자천하지대본> 시절에는 설 명절 하나만 해도 최소한 한 달은 준비해야 하는 그야말로 축제라 할 만한 것이었다. 명절 자체도 요즘처럼 하루나 이틀 만에 끝, 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먼 곳의 친척들에게 세배를 다니랴, 멀리서 온 친척들의 세배를 받으랴. 해서 정월 대보름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 숫자도 어마어마해서 토방은 신발을 벗을 자리가 없었고, 방에서는 앉은 자리가 없어서 숟가락질 한 번 제대로 해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덕담은 끝날 줄을 몰랐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라도 있을라치면 그 사람이 살아온 내력과 언행이 줄줄이 쏟아져 나와 전기라도 한 권 써야만 할 정도였고, 조상님들 중 나라에 큰 공이라도 세운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또 그 사람에 대한 저마다의 감동과 교훈을 경쟁적으로 되새기느라고 일어설 줄을 몰랐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해가 지고 저녁이었다. 저녁이 왔으니 저녁밥을 먹어야 하고, 명절에 손님까지 왔는데 반주가 없을 수 없어서 한 잔, 두 잔, 하다 보면 밤이 깊어서 “자고 가야 쓰겠네” 소리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방도 비좁은데 어디서 잘 것인가. 앞집, 뒷집, 아랫집, 옆집이 이웃사촌인 이유가 여기서 분명하게 밝혀진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관계는 새로운 이야기를 낳고 또 낳아서 새로운 지식이 되어갔다. 

지식이란 습득한다는 생각도 없이 습득했을 때 제대로 응용되기 마련이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되는대로 섞여서 모여 앉으면 그 자리가 곧 생생한 공부의 현장이었다. 할아버지는 손주의 돌출발언에서 남몰래 무엇인가를 깨닫고, 손주는 할아버지의 고리타분한 이야기에서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의식도 없이 배웠다.

그 자리가 끝나면 며칠이나 혹은 몇 달 뒤에 할아버지는 그날 손주의 언행을 문득 생각해내고는 “어헛 참 고 녀석이 그러니까 그것이 그것이었구만” 하는 식으로 그날 배운 것을 반추하고, 손주는 몇 년 혹은 몇십 년이 지난 뒤의 어느 날 불현듯 그날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아, 그 말씀이 그 말씀이었구나” 하게 되는 것. 배움이란 곧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인체의 곳곳에 진을 치고 있다가 필요할 때면 즉각 나타나서 나 여기 있어, 하는 뭐 그런 것이어야 제대로 된 배움이라 할 수 있었다. 설 명절의 세배 자리는 그런 신묘한 배움을 가능케 하는 현장이었다.





그 시절의 설 명절은 대체로 가을걷이가 끝난 직후부터 준비단계에 접어들었다.  벼 타작을 끝내고, 고구마도 다 캐고, 마지막으로 마늘이며 양파 것들을 심는 작업을 끝내고 나면, 그때부터 엄마들은 아버지로 하여금 아궁이를 고치게 하고 장작을 준비하게 했다. 그리고 고구마를 깎았다. 경우에 따라 호박 껍질을 벗기기도 했다. 호박이든 고구마든 한 가마니는 족히 되게 깎고 다듬어서 거대한 가마솥에 쏟아 붓고 장작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장작불은 적어도 하루 이상 이틀은 족히 타들어갔다. 엄마는 한밤중에도 잠자리에서 일어나 장작불을 점검하러 나갔고, 아버지는 새벽녘에 일어나서 장작불을 점검하는 한편 새로운 장작을 패느라 구슬땀을 흘렸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그 유명한 조청이었다. 이 조청은 설 명절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써, 거의 모든 과자와 떡과 심지어는 음식과도 궁합이 잘 맞았다.

조청 만들기가 끝날 즈음이면 뻥튀기 장사들이 마을을 돌면서 엄마들을 유혹해낸다. 엄마들은 너냐 나냐 할 것이 없이 거의 모두 뻥튀기 장사에게 볼 일이 있었다. 뻥이요, 한 번에 한 됫박씩의 쌀이 튀겨지고 기장이 튀겨지고 땅콩이 튀겨졌다. 참깨나 들깨 같은 것들은 뻥튀기 장사를 활용하지 않고 집에서 가마솥에 볶았다. 이렇게 튀겨지고 볶아진 모든 재료들은 조만간 조청의 강력한 접착력에 힘입어 쌀강정이 되고 들깨강정이 되고 땅콩강정이 될 것이었다.

뻥튀기 장사가 마을을 한바탕 들썩거리게 하고 떠난 다음이면 엄마들이 이 집 저 집에 삼삼오오로 모여 앉아 찹쌀로 뭔가를 열심히 빚어낸다. 찹쌀을 절구통에 곱게 빻아서 물에 이긴 다음 갓난아이의 손바닥 정도나 될 만한 크기의 둥글납작한 호떡 같은 것을 수백 수천 개나 만들어서 뜨뜻한 아랫목에 널어놓는다. 이것이 돌멩이처럼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지면 남자들이 시내에 나가서 모래를 퍼온다.

모래를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낸 다음 가마솥에 담아놓고 불을 지핀다. 모래가 손을 넣을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볶아지면 찹쌀가루 반죽해서 돌멩이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것을 하나씩 집어넣는데 이것이 꿈틀, 꿈틀, 몸을 비틀어대면서 크기를 키워나가는데 순식간에 스무 배는 족히 커져버린다. 아이들의 눈으로 보자면 마술도 그런 굉장한 마술이 없다. 여기에 조청을 발라서 쌀 튀긴 것을 입히면 그 이름도 유명한 한과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른들이 날이면 날마다 그렇게 과자 만들기에만 열심을 파는 것은 아니다. 장날이면 장날마다 장보기를 나가는 것도 이 시기이고, 무엇을 팔아서 무엇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밥상머리 토론이 벌어지는 것도 이 시기이다. 조기를 사다가 염장해서 굴비로 만드는 날은 언제가 좋고, 홍어나 서대 혹은 장대 같은 생선을 사다가 꾸덕꾸덕 쫄깃하게 살짝 말리는 날은 또 언제쯤이 좋다는 것을 어른들은 다 알고 있지만, 알면서도 자신의 의견과 다른 사람의 의견을 나란히 세워놓고 맞춰보느라고 한가할 틈이 없다.

그리고 또 있다. 아이들의 설빔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너무도 큰 문제가 있어서 어른들의 머릿속은 이중 삼중으로 바쁘기만 하다. 특별히 영악한 아이는 다른 형제 몰래 엄마나 아빠를 붙잡고 엄마 응? 아빠 응? 하는 식의 로비를 벌이느라 정신이 없기도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탁월한 로비스트를 고용한다 해도 엄마 아빠를 불합리한 시험 속으로 밀어 넣지는 못한다.

선택 한 번 잘못하면 아이들 중에 몇인가는 몇날며칠 울고불고 난리를 피울 수 있다는 것을, 심지어는 설날 당일에도 입이 퉁퉁 부어서 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고 세배조차도 포기해 버린다는 것을 부모는 너무나 잘 아는 까닭에 불합리한 편애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모든 아이들에게 새 옷을 사줄 수는 없다. 그래서 엄마 아빠는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인다. 가끔은 교묘하게 여론전을 펼치기도  하고, 심리전을 펴기도 한다.

“아빠가 돼서 새끼들 옷 한 벌도 제대로 사줄 수가 없으니, 응? 이 큰 슬픔을 어찌할까. 올해 설이나 쇠고는 그냥 칵 죽어버려야 할랑갑다.”

아빠가 밥상머리 앞에서 느닷없이 그런 슬픈 소리를 하고 나오면, 엄마가 뒤를 이어 한 소리 하시는데 꼭 이렇다.

“글믄 나는 어쩌라고? 나도 칵 죽어뿌러야지 뭘.”





아이들은 아무 할 말이 없다. 그저 눈물만 나올 뿐이다. 이렇게 해서 엄마 아빠는 그해의 설빔을 각자 한 켤레씩의 양말로 낙찰되었다는 얘기가 지금도 전설처럼 남아 있다. 물론 엄마도 그것만으로 끝을 내고 만 것은 아니었다. 가슴에 미안함이 가득한 엄마는 일찌감치 쑥떡을 해서 아이들에게 안겨주기도 한다. 어차피 할 쑥떡인데 한 열흘쯤 앞당겨서 한다고 누가 뭐랄 할 것인가.

이렇게 해서 일단 한숨을 놓은 엄마는 이제 본격적인 설 명절 준비에 들어간다. 반다지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한복을 꺼내서 빨아 말리는 한편 콩나물이며 숙주나물을 기르고, 도토리를 빻고 갈아서 묵을 쑤는 틈틈이 다 마른 한복을 다듬이돌에 얹어놓고 다다닥, 다닥 다듬이질을 하고, 쌀이나 좁쌀을 쪄서 누룩에 섞어 술을 익히는 한편 메주콩을 갈고 삶아서 두부를 만들기도 하고, 봄부터 가을까지 열심히 뜯고 삶아서 말려둔 고사리며 토란대며 온갖 나무새들을 꺼내놓고 먼지를 털어내는 등 다시 한 번 다듬어서 물에 불리기도 한다.

엄마가 하는 이 모든 과정을 아이들은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구경하고, 맛을 보고, 품평을 하며, 배운다는 의식도 없이 배워간다. 물론 타인처럼 구경하고 맛보며 품평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궁이에 불도 지펴야 하고 물도 길러야 하고 등등 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일이 일로 느껴지지 않고 재미있는 놀이로 여겨지는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설 명절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이들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살판이 났다. 설날 당일의 최대 관심사는 누가 뭐래도 세뱃돈이다. 아이들은 그날 하루 주머니에 들어온 세뱃돈의 총액을 놓고 우열을 가린다. 너는 얼마냐? 너는? 처음에는 이렇게 신경전을 벌이지만, 진실은 곧 밝혀지게 되어 있다. 금액이 엄청나다고 할 정도로 많은 경우 그 아이는 화제의 주인공으로 급부상해서 몇 달씩이나 어깨를 으쓱거리게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나름 지혜를 짜내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세뱃돈을 엄청나게 많이 확보할 수 있을까. 관건은 발품이다. 그것은 곧 노동이다. 얼마나 많은 어른들을 찾아가서 얼마나 많이 절을 했느냐에 따라 세뱃돈의 총액은 결판난다. 그래서 친척이건 아니건 마을의 모든 어른들이 세배의 대상이 되고, 나중에는 건넌 마을로까지 진출하기도 한다. 멀리에 계신 친척을 굳이 찾아가서 세배를 하겠다고 엄마 아빠를 조르는 것도 결국이 이 때문이다.

세뱃돈의 열풍이 가셔질 즈음이면 새로운 설렘이 아이들을 사로잡는다. 정월 대보름의 쥐불놀이, 이것은 세뱃돈 이상으로 아이들을 잠못 들게 한다. 집집마다 어른들은 불깡통을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선물하고, 아이들은 눈만 떴다 하면 마을 광장으로 뛰쳐나가서 불깡통을 제대로 잘 돌리는 법을 놓고 설전에 설전을 거듭한다.

이렇듯이 우리의 설 명절은 중국의 춘절에 못지않게 기나긴 축제의 연속이었지만, 돈맛을 제대로 알아버린 요즘은 그저 전설로나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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