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에 따라 강산도 변한다고 해요. 그런데 요즘은 굳이 세월이라고 할 것도 없이 빨리 빨리 변하고 있는 게 서울의 모습이에요. 자고 일어나면 생겨나는 아파트, 그리고 새로운 빌딩들…. 아주 정신을 못차릴 정도지요? 여러분도 그런 경험 많이 있을 거에요. 그런데도 사방에선 고공크레인이 하늘을 찌르고, 포크레인이 땅을 파내고 있는 모습들 뿐이에요. 이러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집도 찾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해요.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렇게 변화속도가 빨라졌을까요? 그건 근대화 이후 현대 사회에 들어오면서부터에요. 조선 왕조 이후 한반도의 중심이었던 서울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서울이 조선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시골사람들에게는 살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었다는 건 알고 계세요? 이에 ‘사람의 새끼는 서울로 보내고, 마소 새끼는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이 생겨났을 정도에요.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서울>을 중심으로 근대화 과정에서의 서울을 매주 소개해볼까 해요. 사진에서 느껴지는 서민들의 삶이 풍요로운 오늘의 기반이 됐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더욱이 강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고충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셈이죠. 옛 서울의 모습도 감상하고 변화하는 생활상도 느껴보세요.
1.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 카페
1930년대 `모던 보이`들이 드나들던 다방과 카페는 `근대의 멋과 풍류`의 상징이었다. 1927년에 생긴 `카카듀`가 서울에서 처음 생긴 다방이라고 한다.
2. 미쓰코시 백화점의 4층 식당
다방은 많지 않았다. 충무로 쪽에 두서너 곳, 종로 쪽에 두서너 곳 정도였다. 미술가 김용규(멕시코다방, 종로 YMCA 근처), 영화배우 복혜숙(뷔너스, 인사동) 등 예술인들이 다방을 내기도 했는데, 다방은 문화장소로 많이 애용됐다.
3. 카페
카페는 여급이 나와 술을 따르고 시중을 들었다. 카페의 커피 한 잔은 10∼15전, 맥주는 한 병에 40전으로 설렁탕값보다 비쌌다. 조선인 남자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대개 60∼80전이었으니 그림의 떡이었다. 허울 좋은 룸펜 멋쟁이들은 커피 한 잔 마시고, 밥값이 없어 정작 끼니를 곯아야 했으니 멋의 대가는 비쌌다.
4. 조선호텔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이 1918년 문을 닫고, 이화학당이 이곳을 사들여 보조기숙사로 이용하면서 구한말 커피향 가득하던 친미파·친러파의 정치무대는 사라졌다. 1910년 이후에는 서양인을 상대로 한 호텔과 서양식 여관이 많이 생겼다.
먼저 철도국 직영으로 운영된 철도호텔(조선호텔)이 1914년, 외국인 여행자를 위해 세워졌다. 조선호텔은 고종이 황제즉위를 고한 원구단 터에 지어졌다.
5. 반도호텔
사진은 1938년에 지어진 반도호텔.
6. 남성들의 복장
7. 일본화 된 본정(현 충무로)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