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활터 ‘초파정’에서 (3)



# 기본 중에 기본인 빈 활 당기기
 

“그놈의 얘기는 이제 그만 나와도 되는 거 아녀, 어?”

그날 그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말문을 잃었다. 아니 입이 붙어버렸다. 어쩌면 혀가 순간적으로 제 기능을 잃어버렸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순간의 위력은 컸다. 순간은 마치 영원처럼 길었다. 나는 머리를 뒤로 젖힌 채 길게 심호흡만 잇달아 해대고 있었다. 녀석은 아마 내 기분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자기 나름의 흥분에 취한 녀석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내 안의 살기를 깨웠다.

“아 돈도 십 억씩이나 준담서? 더 달라는 거여, 뭐여?”

나는 뒤로 젖힌 고개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자세를 바로잡는 것이 두려웠다. 자세를 바로잡는 순간, 나는 어쩌면 내 앞의 친구 녀석을 그대로 들이받아 버릴 것만 같았다. 성난 황소가 그 거대한 덩치와 뿔로 사람을 들이받아서 불구나 혹은 시체로 만들어버리듯이, 어쩌면 내가 그렇게 친구 녀석을 불구나 혹은 시체로 만들어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도무지 자세를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현상을 아마 살이 내렸다고 하는 것일 게다. 홧김에 주먹을 한 번 쑥 뻗었는데 그 주먹을 당한 사람이 그냥 바르르 떨면서 죽거나 불구가 돼버리는 것. 내 몸에는 그런 살이 있었다. 그 살을 나도 모르게 썼던 경험도 당연히 있었다.

서울에 살 때 어느 날인가 임금 문제로 다투는 영업장 주인과 종업원 사이로 끼어들 일이 있었다. 그때 영업장 주인의 오만방자함이 내 안의 살을 깨웠다. 나는 앞뒤 계산은커녕 분간도 거의 못할 정도로 화가 났고, “이런 개” 소리와 함께 그대로 주먹을 뻗었는데 다행히도 주먹은 빗나갔다. 빗나간 주먹에도 영업장 주인은 턱을 움켜잡고 쓰러졌고, 바로 뒤의 유리로 된 거대한 칸막이가 쩍 갈라지면서 쏟아졌다. 그리고 내 손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 자세 바로 잡기

그와 유사한 일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세상은 툭하면 내 안의 살을 깨웠다. 아니 어쩌면 내 오지랖이 쓸데없이 넓기만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내 자신의 이익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의 일에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어대는 무슨 귀신같은 버릇에 들려 있었다. 어쨌든 나는 내 자신이 두려웠다. 돈이 사람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서울 생활을 계속 하다간 내가 아무래도 살인자가 될 것만 같았다. 도시 탈출, 내지는 시골 생활을 결심한 배경에는 그런 기막힌 고민도 있었다.

서울을 떠나면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휘말려드는 일이 적어지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골 생활을 시작한 이후 실제로 그런 아슬아슬한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스스로 사람을 골라서 만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러나, 옛 친구를 골라서 만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옛 친구가 달리 옛 친구인가. 어쩌다 한 번씩, 문득 생각이 나서 만나는 옛 친구들 가운데 그런 녀석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당연히 꿈에서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날 마치 복병을 만나 곤욕을 치르듯이, 호젓한 산길을 아무 생각도 없이 걷다가 산적을 만나듯이 그런 상황에 딱, 부딪히고 만 셈이었다. 생각하면 우연도 그런 우연이 없었다. “어디 가냐?” 해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내 자신의 일정을 말했던 것일 뿐이었다. “세월호 참사 일주기를 맞이해서 몇몇이 모여 토론을”어쩌고 하는 소리가 내 입에서 나오는 순간 옛 친구 그녀석이 짜증도 이런 왕짜증이 없다는 투로 한 마디 툭 던지던 것이었다.

“그놈의 세월호, 이제 그만 해야 되는 거 아냐?”

옛 친구의 그런 발언 자체가 내 안의 살을 깨운 것은 아니었다. 나의 옛 친구를 그렇게 만들어놓은, 그런 쪽으로 유도해 낸 그 어떤 흐름이 나는 끔찍한 것이었다. 진상 조사가 왜 필요하냐, 죽은 사람 몸값으로 현금 십 억원 근처를 국가에서 제시했으면 충분한 거지, 하는 그런 생각이 만약에 옛 친구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나는 그를 상대로 토론을 해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말이 토론이지 사실은 토론이랄 것조차도 없는, 여러 말도 필요 없이 단 한 문장이면 무너지게 되어 있는 너무나도 허술한 논리였다.

“너는 너의 자식이 아무런 이유도 원인도 없이 비명횡사를 했을 때, 그때 누가 돈 몇 억을 줄 테니 그냥 잊어라, 하면 오케이 좋아, 할 수 있겠냐?”

친구 녀석은 순간 당황하는 눈치였다. 할 말을 못 찾고 얼버무리는 친구 녀석을 보고 있는 내 안에서 미증유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왜 이런 따위 서글픈 얘기나 하고 있어야 하는가. 사람은 왜 사는가 하는 문제만 가끔씩 생각하며 살아도 그 정도는 대번에 풀리는 문제 아닌가 말이다.


# 가르쳐준 대로 하고 있나~

게다가 그것은 친구 녀석의 생각조차도 아니었다. 눈만 뜨면 켠다고 하는 텔레비전에서 떠들어대는 몇 마디를 주워듣고 그것이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친구 녀석은 자신의 생각은 하나도 없이 그저 정부의 대국민 전략에 농락을 당하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화가 나는 것이었다.

국민을 몇푼의 돈에 깜짝 눈이나 뜨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재주도 능력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 세상에, 이런 바보 멍텅구리 같은 녀석이 내 친구라니. 네가 감히 누구를 나무라고 드느냐 이놈아.

되돌아 생각하면 아슬아슬하기 짝이없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내가 만일 활터를 드나드는 중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거의 틀림없이, 그날 살인에 준하는 사고를 내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랬다. 그날의 그 만남은 사고로 기록될 개연성이 매우 높은 충돌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이제 나를 다스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화살에 내 마음을 담아서 허공의 구름 속으로 내보내기 직전 내 가슴은 만작이 되어 쩍 벌어진다. 그리고 내 마음은 순간적으로 홀연히 뚝 떨어지는 붉디붉은 동백처럼 아무런 구속감도 여한도 없는 저 아득한 적막 속으로 안착해 들어간다. 적막 뒤에는 아주 큰 선물 평온이 찾아온다.

“기본이 중요합니다. 기본이, 기본이 안 되면 아무것도 안 돼요.”

활터에서는 지도하는 사람을 선생님이라거나 사범님이라 하지 않고 기본 법칙이라는 뜻의 사법(射法)이라고 하는데 사법님은 첫날부터 줄기차게 기본을 강조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나의 그녀도 역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다. 우리는 세상을 살만큼 살아봐서인지 기본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만큼은 알고 있었다. 기본도 갖추지 않은 자들이 뭘 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세상이 얼마나 혼탁해져 버렸는가에 대해서도 알만큼은 알고 있었다.

태권도나 체조를 처음 시작하면 다리 찢기가 있듯이, 활터에 처음 들어서면 가슴 빠개기가 있다. 태권도의 다리 찢기와는 달리, 활터의 가슴 빠개기는 자기 스스로 알아서 해야만 한다. 해부학적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무엇이 어떠했으니 무엇은 어떠할 것이라는 식의 이해를 즉각 하면서 만작에 이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느 순간 홀연, 갑자기, 새가슴 같던 내 가슴이 크게 활짝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숨통이 확 트이는 느닷없는 첫 경험을 하게 된다.


# 마침내 혼자서 주살내기를...

“아, 이것이 만작이란 것이로구나.”

느낌이 좋을 때는 그런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런 황홀한 순간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단 자세부터 제대로 잡아야 한다. 자세 하나 잡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 싶지만 막상 해보면 어려움도 그런 어려움이 없다.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안 쓰는 근육을 불러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살도 없는 빈 활을 들고 현을 당겼다가 놓았다가 다시 당기기를 수백 아니 수천 번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조금씩 천천히 잡히는 이 자세 잡기 훈련은 뭐랄까, 마치 허공을 부유하는 유령을 잡으려 하는 것처럼 한편으론 미친 짓 같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지만 그만큼 지루하기 짝이없기도 하다.

그래서 초심자들은 이 과정을 견뎌내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하기도 한단다. 하루면 될까 했는데 아니고, 이틀 아니 사흘이면 될까 했는데 그것도 아닌, 열흘 가까이나 흘렀는데도 화살은 손에 잡아보지도 못한 채 빈 활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이게 뭔가 싶어지면서 그만 슬그머니 돌아서 버린다는 것이다.

기본 중에 기본이라 할 자세 잡기 과정을 마쳤다 해서 지루함이 해소되고 흥미가 부쩍 당기는 것은 아니다. 더 큰 지루함이 다음 과정으로 기다린다. 게다가 이 과정은 눈물과 아픔과 비명의 시간이기도 하다. 뺨따귀를 사정없이 얻어맞고도 맞은 것이 창피해서 안 맞은 척 시치미를 떼는 시간이기도 하고, 자기도 모르게 질러버린 비명이 또한 창피해서 웃음으로 얼버무려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언제라도 무기로 전환될 수 있는 화살을 함부로 마구 다뤄서는 안 된다는 것이 활터의 대원칙이다. 그래서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하고, 자세 잡기가 완성되면 이윽고 살을 만지게 되는데 이때의 살은 보통의 살이 아니다. 촉에 구멍을 뚫고 나일론 줄로 묶은 다음 줄의 다른 한쪽을 장대에 매달아 놓은, 다소 희화적으로 비유를 하자면 완전히 애들 장난감 수준의 것이다. 그래서 처음 그 살을 잡을 때는 웃음이 절로 나오기도 하지만, 웃음은 순식간에 비명으로 변한다.

정식 명칭으로 주살내기라고 하는 이 과정에 들어서도 사법님의 강의는 진지하기만 하다. 잘못 하면 피투성이가 된다는 말씀에 다소 긴장이 되기도 하지만, 아직 당해보지 않은 까닭에 실감은 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현에 살을 걸고 쭈욱 당겼다가 놓는 순간, 어이쿠, 소리가 절로 나와 버리는데, 그 순간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기본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중요한 것이로구나, 실감을 하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얻어맞고 있었다. 줄에 매달린 살은 허공을 잠깐 나는 듯하다가 돌아와 버리건만, 우리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사정없이 얻어맞은 싸대기는 푸르딩딩하게 멍이 들어갔고, 팔뚝은 붉게 변색이 되다가 다시 퍼렇게 피멍울이 되어갔고, 활을 잡은 손의 엄지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다. 기본자세 연습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사대에 서서 정식으로 살을 내는 것도 아니고 주살내기에서조차 그렇게 많이 얻어맞고 있었다. 


# 주살내기도 그냥 막 하면 안 된다.

“저는 매 맞는 여자랍니다, 흑흑.”

집으로 돌아오면 그녀는 짐짓 슬픈 표정으로, 슬픈 목소리로 호소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키득키득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또 활터로 나가서 얻어맞기를 되풀이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왼쪽 뺨은 그야말로 얻어맞고 사는 여자처럼 푸르딩딩해서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우리는 또 웃고, 또 웃어야만 했다.

웃음의 소재는 그 자체만이 아니라 엉뚱한 곳에도 있었다. 팔뚝의 피멍울은 옷으로 가려지기라도 하지만, 얼굴의 밤탱이 같은 모습은 그 무엇으로 가릴 수도 없는 것이어서, 장보기라든가 이런저런 이유로 거리를 걷고 있을라치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는데 그 장면이 우리는 또 우스워 죽겠는 것이었다. 혹시 누군가 저기 남자에게 얻어맞고 사는 여자 있다고 신고라도 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하고 있노라면 도무지 웃지 않고는 견뎌낼 수가 없는 것이어서, 우리는 집에서도 웃고 밖에서 웃는, 그야말로 밤낮 없이 웃어야만 하는 세월을 한 달도 넘게 살고 있었다.

그렇게 웃고, 또 웃기만 하던 중에 우리는 문득, 섬뜩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활터에서 자꾸 얻어맞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본이 아직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본이란 무엇인가. 있을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음을 말함이 아닐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이어서 탄성을 질렀다.

“아, 그래서 우리나라가 이렇게도 개판인 것이었구나?”

너무도 엉뚱한 곳에서 너무도 엉뚱한 것을 발견했다고나 할까. 기본을 주제로 생각을 발전시키다 보니 박근혜 정부의 특징은 기본이 안 됐다는 것으로 요약이 가능한 것도 같았다. 무슨 같잖은 행정 경험이 풍부하다거나, 대통령 아버지를 십팔 년이나 어깨 너머로 지켜봤다 해서 그것을 기본이 됐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민주 국가에서 중요한 기본은 행정경험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엄중한 마음자세여야 할 테니 말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국가 운영에 관한 기본적인 마음자세조차 없이 덥석 권력을 끌어안아 버린 이 정부는 흡사 뜨거운 무를 물어버린 개를 연상케 한다. 먹을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건 일단 입으로 받고 보는 개에게 푹푹 삶은 무를 던져주면 덥석 받아 무는데 물고 나서야 뜨겁다는 것을 알고 쩔쩔맨다. 우리는 활터 초파정에서 박근혜 정부의 그런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돈 몇푼으로 국민의 마음을 흔들어볼 생각밖에 못하는 이런 정부를 어찌 정부다운 정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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