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서울 그때를 아십니까?

 

세월에 따라 강산도 변한다고 해요. 그런데 요즘은 굳이 세월이라고 할 것도 없이 빨리 빨리 변하고 있는 게 서울의 모습이에요. 자고 일어나면 생겨나는 아파트, 그리고 새로운 빌딩들…. 아주 정신을 못차릴 정도지요? 여러분도 그런 경험 많이 있을 거에요. 그런데도 사방에선 고공크레인이 하늘을 찌르고, 포크레인이 땅을 파내고 있는 모습들 뿐이에요. 이러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집도 찾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해요.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렇게 변화속도가 빨라졌을까요? 그건 근대화 이후 현대 사회에 들어오면서부터에요. 조선 왕조 이후 한반도의 중심이었던 서울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서울이 조선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시골사람들에게는 살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었다는 건 알고 계세요? 이에 ‘사람의 새끼는 서울로 보내고, 마소 새끼는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이 생겨났을 정도에요.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서울>을 중심으로 근대화 과정에서의 서울을 매주 소개해볼까 해요. 사진에서 느껴지는 서민들의 삶이 풍요로운 오늘의 기반이 됐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더욱이 강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고충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셈이죠. 옛 서울의 모습도 감상하고 변화하는 생활상도 느껴보세요. 

 



1. 수표교(1892)

청계천은 원래 개천이라 했으며, 개항기에도 개천으로 불려졌다. 이 개천은 일제 강점 초기 서울의 지명을 개정할 때 청계천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청계천은 서울의 빨래터로 유명했다. 서울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른 청계천에는 광통교·수표교를 비롯한 24개의 크고 작은 다리가 있었다. 옛날 서울의 장사치들은 손님을 보낼 때 "안녕히 건너갑쇼"라고 했다.

 


2. 장작을 실은 소달구지

경인철도가 개통되고 전차가 보급되면서 사대문의 번잡함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당나귀와 우마차는 조선인이 애용하던 교통수단이었다.

 


3.궁녀들의 외출

궁녀와 기생은 천대받는 신분으로 조선시대에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천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궁녀는 왕과 왕비 등의 시중을 들거나 궁궐의 잡다한 일들을 했다. 궁녀들은 크게 상궁과 나인으로 구분되며, 무수리·각심·약방기생 등이 있다. 궁녀는 한번 궁궐에 들어가면 나가지 못하는 종신제였다. 그러나 상전이 세상을 뜨면 방출돼 수절하다 쓸쓸히 일생을 마쳤다. 조선시대 궁녀들의 수는 600명 정도였다고 한다. 

 


4.기생들

술자리에 나가 흥을 돋우는 기생에도 각기 급이 있었다. 제1급은 기생, 즉 ‘말하는 꽃’이니 이들은 소위 일패로 통했다. 가무기예와 법도에 능했다. ‘춤을 팔되 몸은 팔지 않는다’는 도도함이 있는 본래 의미의 기생이었다. 이패는 은군자라 불렀는데, 거의 기생 출신으로 가무기예보다는 매춘이 주업인 경우, 또는 구한말 기생 출신으로 첩이 됐다가 도로 쫓겨나서 기생조합 등에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지내는 여성들로 일패보다 낮게 취급받았다. 삼패는 더벅머리, 즉 창녀를 일컬었다. 대개 기생이란 일패기생만을 쳤다. 이런 기생제도도 일본의 왜각시(게이샤)가 들어오면서 그 풍속이 변해 가무기예는 사라지고 술시중과 잠자리 시중을 드는 매춘부로 전락했다.

 


5.남대문 안 거리를 활보하는 시민들

조선전기 서울의 인구는 대체로 10만명선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조선후기 현종 이후에는 18만∼20만명 정도였다. 개항 이후에도 20만 명 정도를 유지했으나 유동인구의 증가 등으로 실제 서울을 무대로 활동했던 인구는 30만명 정도로 보고 있다. 서울의 인구가 전국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체로 3% 정도이거나 그 이하였다. 고종 21년(1884)의 경우 전국 인구가 670만명 정도였던 것에 비해 서울의 인구는 20만명 선으로 3%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6.비숍 여사의 한국여행

전차나 기차가 대중 교통수단이 되기 이전에 사대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이용한 교통수단은 조랑말과 소였다. 맨 오른쪽이 비숍 여사.

 


7. 1900년대 초 경운궁 대안문

20여만 명의 서울 인구는 세계적 도시 인구와 비교해 적은 것이 아니었다. 산업혁명 이전 프랑스 파리의 인구는 10만명 정도였고, 영국 런던은 5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동양의 중국 북경은 100만명이 넘었으며, 일본의 도쿄도 50만∼70만명 정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서울의 인구는 지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이었다. 서울 다음의 인구를 자랑하는 개성이 3만명이 채 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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