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활터 초파정에서(4)

 

▲ 선수로서의 박관선 씨(활쏘는 이)


“어이 동생. 기분 나쁜가? 안 나쁘제?”

활터 초파정에서 두 번째 만나던 날 박관선씨는 내게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아직 서로의 얼굴조차 제대로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임에도 아무런 이물감이 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혼자 그 말을 하고는 혼자 기분 좋게 웃는 표정으로 술병을 들었다. 나는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잔머리를 한참이나 굴린 뒤에서야 겨우 감을 잡았다. 아, 이 양반이 아까 나한테 동생이라고 했었지.

“어이 동생. 술 한 잔 혀, 응?”

동생. 그 표현이 참 정다웠다. 그가 정말로 내 형님이라도 된 것 같았다. 형님도 무서운 형님이 아니라 늘 웃고 있는 넉넉한 형님이었다. 양말이라도 한 짝 벗어달라고 하면 금방 벗어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입은 무거웠다. 형님 소리 한 번 하는 것이 무슨 그렇게도 엄청난 일이라고, 내 입은 좀처럼 형님이란 단어를 못 만들어내고 있었다.

느리다고 할까. 아니면 낯가림이 심하다고? 이 나이에 낯가림 운운하는 게 가당찮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는 사람을 잘 사귀지 못했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동생의 친구들이 나를 형님이라고 불러도 나는 그를 선뜻 동생으로 대하지를 못했다.  그래서 만나면 으레 높임말을 쓰는데 그럴 때마다 동생의 친구들은 섭섭한 눈치를 보이곤 했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나 자신을 대번에 고치지는 못하고 이른바 ‘뻘쭘한’ 시기를 얼마나 보내고 나서야 겨우 어이, 자네, 하는 식의 친근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 심사위원으로서의 박관선 씨


박관선씨와 나의 관계는 글쎄, ‘뻘쭘한’ 시간을 얼마나 지내고 나서야 형님 동생 하고 마음의 저 밑바닥까지 드러내는 사이가 될 것인지 나 자신도 자못 궁금할 지경이었다. 어쩌면 다른 경우보다 훨씬 늦게 그날이 올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활터에서의 궁력이 삼십 년 가까이나 되는 대선배인 데다 전국대회 수상 경력도 있었고, 어쨌든 나로서는 선생님으로 모셔야 할 사람이었으니까. 

궁력이 높다 해서 무슨 권위의식으로 군림한다거나 잘난 체를 마구 해서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고, 오히려 활에 관한 한 아직도 겸손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궁력이 그렇게 높으면서도 겸손하니까 초보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각도를 조금 달리 해서 보면 훨씬 빨리 그날이 올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 웃기기를 전문 코미디언 뺨치게 잘하는 사람이니까.

활터에서의 그는 사실 스마일 메이커라 부를 만 했다. 그가 없는 날의 활터 분위기는 매우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마저 감돌았지만, 그가 있는 날의 활터 분위기는  어느 축제 현장의 한 부스를 방불케 했다. 날아가는 새를 보고도 웃어대는 소녀들처럼, 거의 아무것도 아니라 싶은 일에서도 그는 웃음의 소재를 찾아내서 사람들에게 안겨주었다.

기분 나쁜 일도 기분 좋은 웃음으로 둔갑시켜놓는 놀라운 재주를 지녔다고나 할까. 재담이 뛰어난 데다 순발력 또한 빨라서 어떤 상황이든 즉각 그 성질을 파악하고 장악해서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뒤집어놓고 있으니, 그 앞에서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제아무리 과묵한 사람이라도 최소한 엷은 미소나마 자아내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려운 거였다.
 

▲ 봐봐, 활은 이렇게 내는 것이여

 

이렇게도 유쾌와 통쾌를 온 몸에 두루 지니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게 말하면 인문학적 호기심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고자 하는 심리가 되겠지만, 명칭이야 무엇이건 나는 그를 좀 더 깊이 알고 싶었고, 그래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날이 왔다.

이 양반이 고추 모종을 하신단다. 다른 사람들은 고추 모종을 진즉에 다 끝냈는데 이 양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야 날을 잡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추 농사를 엄청나게 많이 짓는 것도 아니었다. 아들에게 줄 것, 딸에게 줄 것, 등등 해서 이백여 평쯤밖에 안 되는 것이니 이건 뭐 고추 농사랄 것조차도 없는 양이었다. 쌀농사는 삼십 마지기나 되지만 밭농사는 그게 거의 전부라는데 어쨌든 나는 그날을 디데이(?)로 잡았다.

“저도 한 번 가 봐도 될까요?”
“동생이? 아이고 좋제, 와, 와. 고맙네. 온다고 하니 고마워.”

그는 꼭 오라는 말을 두 번 세 번 연거푸 해서 아예 못을 박고 있었고,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또 그만큼 마치 다짐을 하듯이 되풀이 하고 있었다. 고맙다? 이게 무슨 뜻이지? 그 말을 듣는 순간에 그런 의문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듣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나서, 그러니까 집으로 돌아온 뒤에서야 문득 그런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고 전화를 해서 여쭤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사실 박관선씨가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그야말로 모자랄 것 하나도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겼다. 검은머리 시절에 만난 아내가 옆에서 듣기 좋은 잔소리를 해주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요즘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어린 손자 손녀들이 수시로 재롱을 부려주는,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유쾌한 소리가 절로 그냥 나와주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그 날은, 내 안의 선입견 하나가 여지없이 깨진 날이 되는 셈이었다. 
 

▲ 어느 하루 사대에서

 

“밥 안 먹었제? 우선 이거라도 좀 먹어둬.”

아침 일찍은 아니고 아홉 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농사철의 농촌 기준으로 보자면 해가 중천에 뜬 지도 한나절이나 지났다. 그때서야 고추밭에 도착한 내 앞에 박관선씨는 불문곡직 먹다 만 케이크를 내밀며 먹으라 한다. 이게 웬 케이크냐고 물으니 생일이란다. 생일? 누구 생일이요? 질문을 안 할 수가 없어서 외마디 비명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돌아오는 답은 싱겁기 짝이 없었다.

“아이 누군 누구여, 아무나 생일이제.”
“아무나 생일? 허허헛 참.”

일언이 폐지하고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어이없어 할 시간은 없었다. 웃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박관선씨 본인은 벌써 저만치 가 버렸다. 고추밭에는 이미 고추 모종 작업이 거지반 끝나 있었다. 모종은 다 끝났고, 비닐을 씌우는 작업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옛날식 농법으로 하자면 이백 평도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겠지만, 현대식 농법으로는 이백 평 그까짓 거 일도 아니게 끝내 버린다.

그런데다 사람은 또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았다. 활터에서 세 명이 왔고, 동네 아주머니 두 분에 관리기를 가져오신 아저씨 한 분, 합해서 일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고작 이백 평밖에 안 되는 고추 모종을 한다. 이건 농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이상한 그림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가 초대된 사람들이었다. 그날 일이 바쁜 사람은 초대에 응할 수가 없었고, 일이 바빠도 인간관계상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초대에 응해서 고추 모종을 조금씩 돕고, 고추 모종을 도왔다는 구실로 밥 한 끼 함께 먹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해 한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그 내용을 어렴풋이나마 눈치껏 알고들 있었다.
 

▲ 농부로서의 박관선 씨

 

어쨌든 고추 모종 작업은 오전 열 시가 조금 넘어서 완전히 끝났다. 그때부터 박관선씨의 언행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구시포 해수욕장 인근의 식당가로 가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기로 돼있으니까 서두르자는 거였다. 그런데 동네 아주머니 두 분이 다른 데 일하러 가야 한다고, 오래 전에 그렇게 하기로 약속돼 있어서 얼른 가봐야 한다고 울상을 지으신다. 아주머니들뿐만이 아니었다. 관리기를 가져오신 아저씨도 예약된 일이 있다고 고개를 저었고, 다른 남자 한 사람도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역시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주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종의 돌발변수가 생긴 셈이었다. 그런 문제는 꿈에서조차 미처 생각을 못 해봤다는 듯이, 아 이것 참 큰일났네, 하는 표정으로 “이것이 뭐여, 이러면 안 되는디, 안 되는디”, 혼잣말을 해가며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던 박관선씨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집으로들 가세, 그냥 우리 집으로들 가세. 밥은 먹어야 씅게. 밥도 안 먹으면 안 되니께 잉?”

사람들은 하나같이 난감한 표정들이었지만, 그것조차도 거절할 수는 없다는 듯이, 거절하면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논둑길을 지나서, 마을 앞 공터를 지나서 그의 집으로 한 사람씩 들어섰다.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에 뭔가 확 감이 잡혔다. 짖지도 않는 개 한 마리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진도견 품종으로 순백의 털을 가진 개 한 마리가 온 몸을 뒤틀어대며 낑낑, 소리를 내는데 그 모양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숨이 턱 멎는 줄 알았다. 외로움이 얼마나 극한에까지 사무쳤는지 낯선 사람을 보고도 짖기는커녕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며 얼굴을 마치 수줍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녀처럼 어디로 자꾸 숨는 자세를 취하다가는 자신의 발등에 대고 비벼대며 오줌을 불불 흘리고 있는 개 한 마리,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개는 주인을 닮는다. 문득 그 한 마디가 생각났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박관선씨는 자신의 생일 날 밥 한끼를 여러 사람들과 함께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먹고 싶었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고추 모종 날짜도 그날로 잡았다. 근사한 식당도 머릿속에 그려두었다. 그런데 일이 뜻대로 안 된다. 어쩔 것인가. 사람들을 그냥 돌아가게 할 수는 없다. 반찬은 없지만 집에서라도 어떻게 해보자.

 

▲ 고추모종 하던 날


이렇게 해서 박관선씨의 생일날 생일 밥상이 급하게 차려지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두 분이 그릇을 씻는다, 수저 젓가락을 찾는다, 해서 바쁘게 움직였고, 박관선씨 본인은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놓고 묵은 반찬을 하나씩 둘씩 꺼내다가 밥상을 차렸다. 반찬 한 가지가 추가될 때마다 그와 관련된 설명이 곁들여졌다. 이것은 누가 가져온 것이고 이것은 내가 직접 만든 것이고 등등.  

“나는 반찬이 맛있다, 안 맛있다, 이런 것 안 따지는 사람인게 잉? 무조건 다 맛있단 말이거든. 그래서 누가 뭘 가져오면 무조건 맛있다고 해. 그래야 해. 그래야 다음에 또 가져오거든. 맛있단 소리 안 하면 절대로 다음에 또 안 가져와. 이것은 확실하게 명심해둬야 해, 그럼.”

이런 얘기는 아무래도 웃음과 함께 해야 할 것 같지만, 그런데 그토록 웃음을 좋아하는 그가 이번에는 웃지도 않고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마치 절대적인 무슨 진리라도 발견한 것 같은 눈빛으로 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그 자체가 우스워서 박장대소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는 남자가 혼자 살아가는 데 필요한 나름의 노하우를 축적해두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래도 뭐든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어서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즉각 명쾌한 답이 나왔다.

“마누라도 없이 혼자 하는 농사가 힘들기는 힘들제. 농사뿐이간디. 세상에 힘 안 드는 일이 뭐 있겠어. 생각해 봐. 산다는 것도 사실은 힘 든 일이잖어.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말이여. 잉? 얼마나 힘 든 일이냔 말이여. 힘 안 드는 일 하겠다는 생각이 도둑의 심뽀제.“
“맞습니다. 맞고요. 그런데 활을 엄청 많이 좋아하시잖아요. 그렇다면 농사와 활 중에 선택을 하라면 어느 쪽을?”,
“농사는 내 직업이고, 활은 내 인생이여, 뭔놈의 선택이여 선택은.”

우문현답이라는 말은 아마도 이런 때 쓰는 것일 게다. 그런 질문밖에 못한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다고나 할까. 슬그머니 일어서서 밖으로 나오니 짖지도 않고 다만 수줍어만 하던 개가 이번에는 그 사이 얼굴을 익혀서 알아본다는 듯이 두 귀를 쫑긋 세운 채로 벌떡 일어서며 낑낑, 소리를 낸다. 자신의 절대적인 고독을 어떻게든 좀 해달라는 듯이 그렇게.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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