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생생 역사 현장 탐방- 서울시 근대건축물 4(언론사와 옛 국회의사당)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언론사 건물과 옛 국회의사당 건물을 둘러봤습니다.

 

▲ 전통과 현대가 잘 조화됐다는 평가를 받는 옛 동아일보 사옥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근대기와 일제 시대엔 서구의 영향을 받은 건물들이 서울 중심에 앞다퉈 세워졌다. 상권의 중심인 은행과 백화점, 관공서가 주를 이뤘고 성당과 교회, 교육기관도 위풍 당당한 건물들이 분위기를 주도해가기 시작했다.

‘제4의 권력’이라 불리는 언론사 역시 민중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시대의 방향을 제시하며 사회의 중심 위치로 자리잡았다. 현재까지 서울 도심엔 당시의 언론사 건물들이 빛 바랜 시대상을 담아내고 있다.
 

1920년 업무시설의 전형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 위치한 옛 동아일보 사옥은 과거와 현재가 잘 조화된 건물로 평가받는다. 현재 ‘일민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근대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1920년대 업무시설의 전형으로 손꼽힌다.

옛 동아일보 사옥은 일제 총독부에 의해 두 번째 정간조치를 당한 1926년 준공됐다. 1994년 사옥이 충정로로 이전하면서 3개층을 전시장으로 교체했으며 이후 일민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1997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리모델링 작업을 했으며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됐다.

 

▲ 옛 동아일보 사옥의 정문과 내민창

 

동아일보는 원래 종로구 화동의 옛 중앙학교 교사를 빌려 1920년 4월 1일 창간했다. 인촌 김성수 선생의 집과 멀지 않은 곳이다. 현재 안국동 정독도서관 앞에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광화문 옛 사옥은 1926년 12월 전용 사옥으로 지은 건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언론사 건물이다.

동아일보 발행인이었던 김성수 선생은 “조선총독부를 감시하기 위해선 광화문 앞 네거리에 사옥을 지어야 한다”는 뜻을 당시 밝혔다고 한다.

준공 당시엔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지어졌으며 철근 콘크리트와 벽돌로 이뤄져 있다. 외벽엔 석재와 타일을 붙였고 인조석도 부분적으로 사용했다. 현관에서 옥탑까지 수직으로 이어져 있는 내민창이 특징인데 이는 1920년대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모더니즘으로 옮아가는 당시의 디자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통치’의 첨병

1963년 4월 이 건물에서 동아방송이 개국하기도 했다. 몇차례 증개축을 거쳐 1968년 지상 6층으로 확장됐다. 특히 2001년엔 대대적인 보수 및 증축 공사로 내부 모습은 많이 달라졌으나 외관과 내부 공간의 일부는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된 건물이다. 1920년대 건축양식과 건축 재료를 보여주는 동시에 근대화 시기 광화문 거리의 추억을 유일하게 보여주는 건물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일민미술관 맞은편 쪽 대로엔 옛 국회의사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서울시의회 건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처음 지어진 일제 시대엔 경성부민관으로 불렸다.

 

▲ 시대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담당한 옛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건물
▲ 서울시 의회 입구

 

1935년 경성부는 지금의 서울시 중구 태평로 1가에 부립극장을 세웠다. 경성에 대규모 공연장이 없었던 당시 부민들의 예술적 욕구를 충족시키겠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실제론 ‘문화통치’의 일환이었다. 경성전기주식회사로부터 100만원을 기부받아 준공했다.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이뤄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다목적 회관으로 1800석의 관람석과 냉난방 시설까지 갖춘 대강당을 비롯해 중강당, 소강당 등을 갖췄다. 이 외에도 담화실, 집회실, 식당, 이발실 등 부대시설도 당시로선 첨단이었다.

이 곳에선 극단들의 연극과 음악, 무용 공연 등이 이뤄졌으며 영화도 상영됐다. 하지만 일제가 좀 더 주안점을 둔 것은 정치집회와 친일문예행사였다. 친일 문예인이었던 이광수가 학병지원을 권유한 연설을 한 곳도 바로 여기였다.

 

▲ 격동의 시기를 거쳐온 신아일보사 별관 건물
▲ 신아일보사 별관 정문
▲ 역시 붉은 벽돌로 지어진 신아일보사 본관


1945년 7월 24일 친일파 박춘금은 이 곳에서 일본을 위해 최후의 1인까지 싸우자는 ‘아시아민족분격대회’를 열었다가 강윤국 유만수 조문기 세 청년으로부터 폭탄 세례를 받았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국내 의열 투쟁이 일어나는 곳인 셈이다. 건물 앞쪽엔 ‘4?19 혁명의 중심지’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 곳은 3?1 만세운동과 4.19 혁명을 거쳐 1987년 6월 민주화항쟁까지 민중의 염원이 가장 격렬하게 이뤄진 장소다.
 

드물었던 ‘철근 콘크리트’ 구조

8?15 광복 뒤 미군이 접수해 임시로 사용하다가 1949년부터 서울시 소유가 됐다. 1950년 4월 29일 국립극단이 창단되면서 국립극장으로 지정됐으며 1950년 서울 수복 뒤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됐다.

1966년 김두한 당시 국회의원이 한국비료주식회사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질의하며 국무총리를 비롯 각료들에게 미리 준비한 인분을 투척한 ‘오물투척사건’도 이 곳에서 일어났다.

지방자치제가 시작된 1991년부터 현재까지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사용 중이다. 벽면 중간마다 세워져 있는 기둥들이 특징이다.

옛 국회의사당 건물을 지나 정동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신아일보사 별관(등록문화재 제402호) 건물이 보인다.

 

▲ 옛 조선중앙일보 사옥. 현재는 농협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덕수궁 인근은 격변의 시기마다 민심이 분출되는 중심지였다. 사진은 ‘4.19 혁명 중심지’ 표지석.



1930년대에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어진 철큰콘크리트 건물로 중국 상하이에서 가져온 붉은 벽돌로 외벽을 쌓았다. 1975년 현재의 지상 4층으로 증축됐다. 구한말엔 세무총사(현재의 관세청) 사옥으로 쓰였으며 독일인 외교고문 뮐렌도르프의 사무실도 이 곳에 있었다. 그 뒤 미국기업 싱어미싱회사의 한국지부 사무실과 상사원들의 숙소 등으로 사용돼다 1963년 신아일보사에 매각됐다. 이후부터 1980년 언론기관통폐합으로 신아일보가 경향신문에 흡수, 통합되기 전까지 신아일보사 별관으로 사용됐다.

구한말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함께 1980년 신군부 언론기관통폐합 조치로 언론수난사의 현장을 대변하는 등 역사적 가치가 높다. 당시 민간 건물에선 거의 볼 수 없었던 철근 콘크리트 구조와 원형철근 사용 등 일제 강점기의 건축수법이 잘 반영됐다. 맞은편 정동교회 앞엔 역시

붉은 벽돌로 세워진 신아일보사 본관 건물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종로 SC제일은행 본점 인근엔 농협 건물이 있는데 일제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함께 민간 3대 신문의 하나였던 조선중앙일보(사장 여운형)의 사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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