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분은 없어도 윗분은 있다
아랫분은 없어도 윗분은 있다
  • 엄민용 기자
  • 승인 2015.06.23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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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우리말 달인’ 엄민용의 ‘우리말 나들이’

 

▲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

요즘 사극이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물론이고 젊은 사람들도 사극에 흠뻑 빠져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요. 그런 사극을 시청하다 보면 가끔 쓴웃음이 절로 나오곤 합니다. 전체 줄거리는 참 재미있는데, 중간에 정말 어처구니없는 표현들이 종종 나오기 때문입니다. 작가들이 줄거리를 만드는 재주는 좋은데, 우리말을 잘 모르는 탓이겠지요.

예를 들어 이들 사극에서는 무수리나 상궁들끼리 싸움을 벌이다가 “웃전에 고해 혼꾸멍내주겠다” 따위로 얘기하는 장면이 가끔 나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때 무수리나 상궁이 ‘웃전’에 고하기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흔히 ‘윗전’으로 잘못 쓰는 ‘웃전’은 “임금이 거처하는 궁전”이나 “임금을 높여 이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웃전’은 임금이 대비마마를 가리켜 말하는 2인칭 호칭으로도 쓰였습니다. 

그런 말을 무수리나 상궁끼리 싸움하면서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했을 말은 ‘윗분’입니다.
이 ‘윗분’의 경우 한때 “‘아랫분’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윗분’이라는 말도 있을 수 없다. ‘웃분’으로 쓰는 게 옳다”는 주장이 큰 힘을 얻었습니다. 실제로 어느 사전에도 ‘아랫분’이라는 단어가 올라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큰 기업의 회장과 하청업체의 과장이 대화를 한다고 가정할 때, 하청업체의 과장이 큰 기업의 사장을 지칭하면서 ‘아랫것’으로 쓸 수는 없습니다. 이때는 흔히 “아랫분들이 모두 훌륭해 일하시기 편하겠습니다” 따위로 표현하게 됩니다.

실제로 신문 등에서도 “협상 진행 상황 등에 대한 언급은 담당할 아랫분들이 많지 않습니까?”(노컷뉴스) 따위처럼 씁니다.

이런 언어 현실을 감안해 국립국어원이 누리집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윗분’을 “‘윗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로 올려놓았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윗분’이 바른 표기입니다.

다만 아직 어느 사전에도 ‘아랫분’이라는 말이 올라 있지 않은 게 아쉽습니다. 사람들이 널리 쓰고 있는데, 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국어사전들은 정말 혼꾸멍내야 합니다.

그건 그렇고요. ‘성은’도 사극에서 잘못 쓰는 일이 흔한 말입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할 때의 그 ‘성은’ 말입니다. 

‘성은(聖恩)’은 “임금의 큰 은혜”를 뜻하는데요. 사극 등을 보면 “임금님의 성은을 입어 왕자를 생산했다” 따위처럼 임금과 잠자리를 함께한 것을 말할 때 ‘성은을 입다’라는 표현을 무척 많이 씁니다. 

하지만 “여자가 임금의 총애를 받아 밤에 임금을 모시는 것”을 뜻하는 말은 ‘성은’이 아니라 ‘승은(承恩)’입니다. 한마디로 후대를 잇게 한 은혜라는 얘기죠.

참, 그리고요. 임금이 죄인을 죽게 할 때 내리는 약 있지요? ‘사약’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사약의 한자를 ‘死藥’으로 알고 있는 듯한데요. 사실은 그게 아니라 ‘賜藥’입니다. ‘죽이는 약’이 아니라 ‘임금이 내린 약’이라는 뜻이지요. 이런 것이 왕조시대의 사상이고, 언어입니다. <경향신문 엔터비즈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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